문서연은 임서준의 안내를 받으며 사람들 틈을 파고들었다.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문재균을 보자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죠?”
문재균은 그녀를 보자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너 마침 잘 왔다. 주지훈 나오라고 해. 재산 분할 얘기는 똑바로 해야지.”
“얘기했잖아요. 그 사람 돈은 저랑 아무 상관이 없다고요.”
그 말을 들은 문재균이 언성을 높였다.
“어떻게 너랑 상관이 없어? 너 3년 동안 공짜로 그 남자랑 자준 거야? 말도 안 돼! 그놈이 밖에서 여자랑 놀아날 때 돈을 안 줬을 것 같아?”
문서연은 갑자기 그와는 대화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임서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경찰 불러요.”
임서준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서연이 발길을 돌리자 문재균은 다급히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이렇게 가면 어떡해! 내가 이러는 게 다 누굴 위해서인데! 그놈한테 받은 돈은 내가 조금 챙기고 전부 네 거잖아! 그런데도 넌 나를 무시해? 네가 그러고도 딸이야!”
문서연은 짜증스럽게 그의 손을 밀쳤다.
“뭐 때문에 이러시는지 아버지가 더 잘 알겠죠. 계속 소란 부릴 거면 그렇게 하세요. 아버지 잡혀가면 나도 며칠 조용히 살 수 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절대 보석금으로 풀어줄 거라는 기대를 하지 마세요. 서율이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조용히 감옥에 가셔서 잘 살아요. 거기서 먹고 자고 하면 마침 빚쟁이들도 피할 수 있겠네요.”
문재균이 손을 들어 그녀의 귀뺨을 내리쳤다.
“네가 사람이니? 힘들게 너희 남매를 키워줬더니 이제 다 커서 재벌가에 시집갔다고 이 아빠를 무시한다는 거지?”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주변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있었다. 문서연은 더는 이곳에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재빨리 자리를 떴다.
문재균은 한참 소란을 부려도 주지훈은 나타나지 않고 현장에 나타난 문서연마저 등을 돌리자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대로 경찰에 잡혀가면 정말 콩밥을 먹을 수도 있었다.
그는 경비 직원들을 향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가서 당신들 대표한테 가서 전해. 며칠 뒤에 또 올 거라고!”
문재균이 자리를 뜨자 모여 있던 사람들도 각자 흩어졌다.
임서준은 사무실로 가서 아직도 창가에 서 있는 남자에게 공손히 말했다.
“대표님, 해결했습니다.”
주지훈은 핸드폰을 보며 차갑게 물었다.
“문서연은?”
“가셨습니다.”
주지훈이 비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그대로 돌아갔다고?”
“네. 그리고….”
그녀가 아버지한테 귀뺨을 맞았다는 얘기를 임서준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주지훈이 입을 열었다.
“오후에 있을 회의를 전부 내일로 미뤄.”
임서준은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주지훈은 핸드폰을 꺼내 무표정한 얼굴로 문서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세 시에 법원에서 만나.]
10분 뒤,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다.
[알았어요.]
문서연은 그에게 답장을 보낸 뒤 길가의 벤치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문재균이 없고 주지훈이 없고 모욕적인 말로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는 인간들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서연은 눈물을 닦고 법원으로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극심한 현기증이 느껴지며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렇게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주변에 온통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공간에 누워 있었다.
병원이었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네 시 30분이었다.
‘큰일 났네.’
문서연이 주지훈에게 문자를 보내려던 순간, 간호사가 들어오며 말했다.
“깼어요? 간단한 검진은 마쳤어요. 저혈당이신데다가 아침을 안 드셔서 쇼크가 왔었나 봐요. 좀 쉬시다가 퇴원하시면 돼요.”
문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참, 임신 중이신데 몸이 많이 허약하셔서 꼭 조심하셔야 해요. 특히 임신 초반에는 더욱 신경 쓰셔야 할 것 같아요. 시간 날 때 신랑분이랑 같이 산부인과 검진 한번 받아보세요.”
간호사는 신신당부를 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문서연은 멍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대상을 거머쥔 그날 밤 사채빚을 졌다는 문재균의 연락을 받았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 빛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분명 행복한 삶이 눈앞에 있는데 거대한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침대에서 일어선 문서연은 주지훈에게 연락한다는 것도 깜빡하고 바로 산부인과로 향했다.
검사를 마친 의사가 말했다.
“임신 맞습니다. 이제 6주 차에 들어섰네요. 태아는 건강합니다. 하지만 전에 유산한 적 있고 그 뒤로 몸 관리를 제대로 하시지 못하셨기에 산모 건강 상태가 매우 안 좋아요. 이번에 임신한 것도 거의 기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돌아가서 푹 쉬시면서 천천히 관리하시면 됩니다.”
문서연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만약… 제가 이 아이를 원하지 않으면 수술해 주실 수 있나요?”
의사는 의외라는 듯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수술은 가능하지만 잘 고민하신 뒤에 결정하는 걸 추천드려요. 자궁 건강에 문제가 많아서 이번에 수술하면 다시는 아이를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유산하면 다시 임신이 힘들다는 말씀이신가요?”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많이 힘들 거예요.”
문서연은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의사가 계속해서 말했다.
“먼저 돌아가서 잘 고민해 보세요. 지금은 몸이 많이 허약한 상태라 수술하기 적합하지 않아요. 정말 꼭 수술을 해야겠다면 2주 뒤에 다시 오세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서연은 무슨 정신으로 병원을 나섰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언뜻 이 사실을 주지훈에게 알려야 하나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도 그녀가 무슨 목적이 있어서 이혼한다고 생각하는 남자한테 임신 사실까지 알렸다가 그가 어떻게 나올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주지훈은 절대 이 아이를 반기지 않을 것이다. 혐오라면 모를까.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피임 조치를 했다고 해서 백 퍼센트 피임이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제 어쩐담?’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배수지는 불이 꺼진 방 안에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있는 문서연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