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자리에 착석하고 주변이 조용해진 지금 다시 일어서기도 난처했기에 그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강시현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주예은이 저렇게 온순할 때가 다 있네. 항상 궁금하긴 했어. 쟤는 그때 왜 갑자기 유학을 떠난다고 했을까? 게다가 꽤 오래 있었잖아.”
주지훈이 말했다.
“그렇게 궁금하면 당사자한테 가서 물어보지 그래.”
“그냥 호기심이랄까?”
“나도 몰라.”
주예은이 출국하던 때, 그는 영국 출장 중이었고 그가 돌아왔을 때 주예은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와 상관없는 일이었기에 굳이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잠시 후, 발표회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과 함께 성광 쥬얼리 대표가 무대에 올랐다. 그 뒤로 임석훈도 무대에 올라 앞으로의 발전 전망과 브랜드의 첫 출시작인 ‘첫사랑’을 소개했다. 그는 앞으로 이 시리즈는 장기 프로젝트로 진행될 것이며 더 많은 디자인의 제품들을 출시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 뒤로 모델들이 무대에 올랐다.
주예은이 말했다.
“명준 오빠, 이 시리즈 작품들 전부 예뻐요. 다 사고 싶어요.”
하지만 계명준의 신경은 온통 무대 뒤에 집중되어 있었다.
성광 쥬얼리는 오늘 디자이너도 무대에 오를 거라고 말했다.
한편, 강시현도 감탄사를 남발했다.
“역시 Ruan이야. 감각이 전혀 사라지지 않았어. 저 작품들 좀 봐. 어떤 여자가 저걸 보고 반하지 않을 수 있겠어? 벌써 풋풋하면서도 아련한 첫사랑의 느낌이 느껴져.”
주지훈은 말없이 모델이 착용한 목걸이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는 이 목걸이를 문서연이 착용하면 분명 예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하얀 피부와 예쁜 목선에 무척 어울리는 액세서리였다.
그녀보다 이 목걸이에 어울리는 사람은 찾기 힘들 것 같았다.
주지훈의 시선이 모델의 손가락을 향했다. 만약 문서연이 정도껏 하고 먼저 고개를 숙인다면 반지까지 선물할 생각도 있었다.
모델들의 쇼가 끝나자 사회자가 다시 무대에 올랐다.
“그럼 우리 성광 쥬얼리 ‘첫사랑’ 시리즈의 디자이너인 Ruan 씨를 모시겠습니다. 열렬한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수가 끝나자 익숙한 여인이 무대에 올랐다.
“안녕하세요, Ruan입니다. 성광 쥬얼리에서 전속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습니다.”
강시현이 충격에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저 사람 네 와이프잖아?”
주지훈도 고개를 들고 무대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문서연은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제품을 디자인하게 된 과정과 재질에 관해 설명했다.
사회자가 물었다.
“아시다시피 첫사랑 시리즈는 젊은 층을 타겟으로 하고 있는데요. 그럼 Ruan 씨가 생각하는 첫사랑은 어떤 느낌일까요? 혹시 첫사랑에 관한 추억 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문서연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사회자가 거듭 재촉해서야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하는 첫사랑은 풋풋하고 달콤한 느낌입니다. 가끔 떠올리면 오래된 술처럼 처음 맛보았을 때와는 색다른 느낌을 들게 하죠. 추억이라면… 첫사랑은 그 마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 때 가장 아름다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줄곧 말이 없던 주지훈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 여자 지금 나한테 고백하는 거야.”
강시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주지훈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 말고 저 여자한테 남자가 어디 있어?”
“정말… 자신감 넘치네.”
주지훈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다시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 난동을 벌여서 미안했나 보지? 이런 방식으로 내게 호감을 표시하다니.’
이때 무대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럼 Ruan 씨의 첫사랑은 언제였나요?”
문서연은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대학교 시절이요.”
주지훈이 순간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강시현은 당황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기자가 또 물었다.
“Ruan 씨가 아직도 잊지 못한 첫사랑이라면 참 대단한 사람이었을 것 같은데요?”
사회자는 무대 아래에서 열심히 눈짓하는 배수지를 보자 다급히 마이크를 잡고 중재에 나섰다.
“지극히 사적인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우리 작품에 관해 더 궁금한 게 있으면 말씀 나누시죠.”
사회자의 중재로 사람들의 관심은 Ruan의 첫사랑에서 다시 작품으로 넘어갔다.
무대 아래에서 주예은이 이를 갈며 투덜거렸다.
“왜 하필 저 여자야? 정말 역겹네. 우리 오빠랑 결혼해 놓고 아직도 첫사랑 운운하고 있다니!”
그 말을 들은 계명준이 고개를 돌리며 다급히 물었다.
“너 뭐라고 했어?”
“명준 오빠, 저 여자가 바로 제가 예전에 얘기했던 그 여자예요. 가짜 임신으로 우리 오빠 속여서 결혼한 여자요. 절대 저 예쁘장한 외모에 속지 마세요. 저 여자 무서운 여자예요. 우리 오빠까지 저 여자한테 깜빡 속았다니까요.”
한편, 당사자인 주지훈은 차갑게 식은 얼굴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고 있었다.
주지훈의 옆에 앉은 강시현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조금 전 주지훈은 아주 자신감 넘치게 문서연이 자기한테 고백한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와이프라는 여자의 멘트는 그에게 큰 굴욕을 안겨 주었다.
발표회가 끝나자 관중석 전등이 켜지고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대에서 내려온 문서연은 가슴이 갑갑하고 속이 좋지 않았다.
‘토할 것 같아….’
그녀가 물 한 잔을 따라서 마시는데 배수지가 달려오며 말했다.
“서연아, 발표회 대성공이야. 예매 수량이 폭주하고 있어. 세 작품 모두 구매 예정자가 10만을 넘었어. 발표회가 금방 끝났는데!”
문서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그녀가 물었다.
“계명준은 갔어?”
관중석이 너무 어두워서 그가 어디에 있는지 보지 못했다.
“그건 몰라. 조금 전 봤는데 아마 가지 않았을걸. 분명 무대 뒤로 찾아올….”
배수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훤칠한 그림자가 대기실 앞에 나타났다.
얼굴이 차갑게 식은 주지훈이 문서연을 쏘아보고 있었다.
문서연과 배수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지?
몇초 뒤, 배수지는 대기실 온도가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저… 서연아, 나는 밖에서 기다릴게. 두 사람 편하게 얘기 나눠.”
말을 마친 배수지는 재빨리 현장에서 도망쳤다.
그렇게 대기실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주지훈은 담담한 눈빛으로 탁자에 놓인 쥬얼리들을 바라보더니 그녀에게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이게 어떤 상황인지 설명이 좀 필요하지 않아?”
문서연은 그가 기세등등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뒷걸음질 치며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