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배수지가 요구한 물건들을 구매하다가 자신도 생리가 두 달이나 늦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3년 전 사고로 유산한 뒤로 생리 주기가 줄곧 불안정했기에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며칠 있으면 올 것 같은데.’
혹시나 하는 경우를 대비해서 문서연은 생리대를 몇 봉지 더 구입했다.
결제를 마친 뒤, 밖으로 나가려는데 입구에서 어떤 여자가 들어오면서 그녀와 어깨를 부딪쳤다. 정작 부딪친 건 그쪽인데 여자는 옷을 툭툭 털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문서연은 고개를 들고 차갑게 대꾸했다.
“넌 아직도 걸음마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니?”
주예은은 문서연의 얼굴을 확인하자 더 기세등등해져서 말했다.
“아, 난 또 누구라고. 늦은 시간에 여기서 뭐 해? 오빠가 집에 없다고 남자랑 비밀 데이트 나온 건 아니지?”
문서연은 그녀와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았기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워 들고 담담하게 말했다.
“주예은, 해외로 도망갔으면 계속 거기서 살 것이지. 너는 모르지? 나 악녀라서 원한은 꼭 갚아야 하는 성격이야.”
그 말을 들은 주예은의 표정이 살짝 굳더니 뒤로 뒷걸음질 쳤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문서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지금 뭘 할 생각은 없고 앞으로 평생 아이 갖지 마. 혹시라도 임신했다가는 매일 나 경계하느라 노심초사해야 할 테니까. 혹시 알아? 내가 언제 너 찾아가서 복수할지? 나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사람인 거 알지…?”
말을 마친 문서연은 주예은을 힐끗 훑어보았다.
주예은은 임신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문서연의 무시무시한 눈빛에 많이 당황한 듯 다급히 말했다.
“이거 미친년 아니야? 내가 그때 네가 임신했는지 어떻게 알아? 내가 좀 부딪쳤다고 나한테 덮어씌우지 마. 그리고 내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대봐! 주씨 가문에서 널 가만두지 않을걸? 우리 오빠도 너랑 이혼하고 넌 우리 가문에서 쫓겨나게 될 거야. 네가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그럼 해봐. 어차피 난 손해 볼 거 없으니까.”
“미친년!”
주예은은 욕설을 퍼부으며 다급히 걸음을 돌렸다.
마트에서 나온 주예은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길가에 세운 레인지로버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담담하게 물었다.
“생수 사 온다고 하지 않았어?”
주예은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불평을 터뜨렸다.
“명준 오빠, 예전에 내가 했던 얘기 기억하죠? 가짜 임신으로 우리 오빠 협박해서 결혼한 여자 있잖아요. 마트에서 그 여자를 만난 거예요. 정말 역겨워 죽겠어요.”
계명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생수 안 살 거면 이제 가자.”
“오빠….”
주예은은 그제야 계명준의 시선이 창밖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열려는데 계명준이 갑자기 차에서 내리더니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주예은도 다급히 따라갔다. 계명준은 사람들 틈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명준 오빠, 왜 그래요? 누구 찾아요?”
계명준은 천천히 숨을 고르더니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 잘못 봤나 봐.”
조금 전 보았던 그 뒷모습은 그가 꿈에서도 그리던 사람과 많이 흡사했다.
주예은이 말했다.
“그럼 이제 가요.”
계명준은 그녀의 손을 살짝 밀치며 말했다.
“예은아, 내가 차 불러줄 테니까 먼저 가. 나는 다른 볼일이 생겼어.”
“하지만 저랑 약속했잖아요….”
계명준은 그녀가 서운해하건 말건 바로 휴대폰을 꺼내 차를 불렀다.
“차량번호 문자로 보냈어. 나 먼저 갈게.”
말을 마친 그는 주예은의 부름에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한편, 집으로 돌아온 문서연은 구매한 식자재들을 냉장고에 넣었다. 그리고 아직도 소파에 웅크리고 있는 배수지에게 따뜻한 밀크티 한잔을 건넸다.
찻잔을 받은 배수지가 갑자기 잔뜩 흥분한 듯, 말했다.
“조금 전 누구한테서 연락받았는지 알아?”
“누군데? 좋아하는 연예인?”
“아니. 나 진지하다고.”
배수지는 핸드폰을 문서연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나야, 계명준. 서연이 소식 아는 거 있어?]
문서연은 문자를 보고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배수지가 말했다.
“계명준 귀국하고 사방으로 너를 찾고 있나 봐. 누가 내 연락처를 걔한테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랑 나랑 같이 산다고 얘기할까? 아니면 바로 네 연락처 걔한테 줄까?”
문서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직 그러지 마….”
배수지도 그녀가 뭘 걱정하는지 잘 알기에 한숨을 쉬며 계명준에게 답장을 보냈다. 자신도 문서연이랑 연락 안 된지 꽤 됐다고, 무슨 소식 있으면 연락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계명준에게서 고맙다는 짧은 답장이 온 뒤로 더는 문자가 없었다.
그날 밤, 문서연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잡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그녀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 벨 소리에 그녀는 다시 잠에서 깼다.
수화기 너머로 한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 회사에 좀 문제가 생겼는데 직접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잠결에 전화를 받은 문서연은 전화를 끊은 뒤에야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회사? 사모님?’
문서연은 발신자를 확인해서야 상대가 주지훈의 비서 임서준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움켜쥐며 욕실로 들어갔다. 간단하게 외출 준비를 마친 문서연은 바로 택시에 올랐다.
그녀가 주씨 그룹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 열두 시 정각이었다. 점심식사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이 로비에 몰리는 때였다.
그리고 오늘따라 로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나 당신들 대표의 장인이라고. 당장 해고시켜 버릴까? 지금 당장 주지훈한테 가서 전해. 이혼하려면 최소한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줘야 한다고. 내 딸이 그놈이랑 3년을 같이 살았는데 이혼한다고 한 푼도 안 주는 게 말이 돼? 그러고도 남자야?”
마침 도착한 문서연은 이 말을 듣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수치심이 몰려왔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그녀가 발길을 돌리려는데 언제 온 건지, 임서준이 그녀에게 다가오며 작게 말했다.
“사모님, 아버님께서 여기서 소란을 부리신지 30분이 넘었어요. 그룹 이미지에 타격이 커요. 대표님께서는 3분 안에 이 일을 해결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안 그러면 경찰 불러서 법대로 처리하겠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