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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서운한 게 있어서

  • “임신 좋지. 임신….”
  • 배수지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 “주지훈 그놈 아이야?”
  • “그래.”
  • “젠장! 그럼 어떡해? 그 사람한테 말할 거야?”
  • 문서연은 고개를 흔들었다.
  • “아니. 어차피 이혼할 사이에 뭐 하러.”
  • 배수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 “그럼 이 아이… 낳을 거야?”
  • 문서연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였다.
  • 처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당연히 아이를 지우고 싶었다.
  • 하지만 돌아와서 오래도록 고민해 보니 드는 생각이 있었다.
  • 주지훈과 그녀 사이에 낀 죄 없는 이 아이가 불쌍했다.
  • 매번 눈을 감으면 3년 전, 아이가 점점 배속에서 목숨을 잃어가던 그때가 떠올랐다.
  • 그런 느낌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 하지만 만약 낳는다면….
  • 문서연이 말했다.
  • “아직은 모르겠어. 나중에 고민할래.”
  • 배수지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이내 화제를 전환했다.
  • “참, 오늘 좋은 소식 있어. 첫사랑 시리즈의 목걸이와 반지 완제품이 내부 인사들의 뜨거운 호평을 받고 있어. 많은 여자 직원들이 발매 시작하면 가장 먼저 구매하겠다고 예약까지 한 상황이야. 나중에 출시되면 분명 잘 팔릴 거야. 이제 남은 건 팔찌인데… 일주일 뒤에 발표회인데 그전까지 완성할 수 있겠어?”
  • “그럼. 3일이면 충분해.”
  • 배수지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 “너 지금 임신 중인데 완제품까지 제작할 수 있겠어? 제작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화학 물질을 만지게 되는데 그냥 공장에 의뢰하자.”
  • “괜찮아. 마스크랑 장갑 착용하면 돼.”
  • “그럼 꼭 조심해. 힘들면 나한테 얘기하고.”
  • 문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 “걱정하지 마. 문제없어.”
  • 욕실에서 나온 문서연은 한참 고민하다가 주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 한참 뒤에야 수화기 너머로 서시윤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주 대표님 지금 나랑 있어. 방해하지 말고 전화 끊어.”
  • “그래, 알았어.”
  • 문서연은 주저 없이 전화를 끊었다.
  • 한편, 화장실에서 나온 주지훈은 자신의 핸드폰을 들고 있는 서시윤을 보자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물었다.
  • “전화 왔었어?”
  • 서시윤은 눈을 깜빡이며 말을 얼버무렸다.
  • “아… 아니요….”
  • 주지훈이 핸드폰 통화목록을 확인하니 1분전 문서연과 통화한 내역이 있었다.
  • 그는 고개를 들고 서시윤을 쏘아보았고 서시윤은 용기 내서 말했다.
  • “대표님, 문서연이 전화 와서 대표님 어디 계시냐고 묻길래 대표님은 너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 끊었어요. 그 외에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어요.”
  • 주지훈은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이 멍청한 여자의 뻔한 수작에 같이 장단 맞춰줄 생각도 없었다.
  • 이때, 협력사 대표가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 “주 대표님, 아직 안 가셨네요. 잘됐네요. 제가 MS클럽에 VIP룸을 하나 예약했는데 대표님도 같이 가시죠.”
  • 주지훈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 “오늘의 주인공은 서시윤 씨니까 저는 빠지겠습니다. 재밌게 놀다가 가세요.”
  • 서시윤이 다급히 그를 만류했다.
  • “대표님….”
  • 주지훈은 협력사 대표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 업소를 나온 주지훈은 바로 차에 올랐다.
  • 운전기사가 물었다.
  • “대표님, 오피스텔로 모실까요? 아니면 선오동으로 모실까요?”
  • 주지훈은 휴대폰을 힐끗 보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 “선오동으로 가지.”
  • “네, 알겠습니다.”
  • 대략 30분 뒤, 주지훈이 차에서 내리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 발신자는 문서연이었다.
  • 그가 전화를 받았지만 상대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 주지훈은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풀며 말했다.
  • “말해.”
  • 한참 뒤에야 여자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바쁜 일은… 끝났어요?”
  • 사실 문서연도 그에게 전화하는 게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해명하지 않으면 주지훈은 그녀가 일부러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테고 그렇게 되면 이혼이 더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 그래도 이 전화로 그의 즐거운 순간을 방해했다고 생각하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 “무슨 일인데.”
  • 문서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 “오늘은 죄송했어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갔어요. 고의는 아니에요.”
  • 주지훈이 차갑게 대꾸했다.
  • “문서연, 나 당신 한 시간이나 기다렸어.”
  • “미안해요. 정말 급한 일이라서 그랬어요. 내일은 시간 괜찮아요? 당신 편한 시간으로 정해요. 아침에 나오라고 하면 그렇게 할게요.”
  • “난 당신처럼 한가하지 않아. 내일 벨기에로 출장 가.”
  • 그 말을 들은 문서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
  • “그래요? 그럼 돌아와서 다시 얘기해요.”
  • ‘너무 바쁜 사람이라 이혼도 미리 예약을 해야 하다니.’
  • 한참 뜸을 들이던 주지훈이 입을 열었다.
  • “초콜릿 먹고 싶어?”
  • 문서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 “네?”
  • 주지훈은 짜증스럽게 다시 한번 물었다.
  • “나 벨기에 출장 가는데 초콜릿 필요하냐고?”
  • 문서연은 그제야 그가 저번 출장 때 협력사에서 선물했다면서 초콜릿을 가득 가지고 들어온 날이 떠올랐다.
  • 그는 단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간식을 먹지도 않았다.
  • 하지만 문서연은 단것을 무척 좋아했다.
  • 주지훈은 어차피 버릴 거 그녀에게 주었다.
  • 한참 뒤에야 문서연이 말했다.
  • “아, 괜찮아요. 신경 써줘서 고맙네요.”
  • 주지훈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전화를 끊었다.
  • 그날 밤, 문서연이 침대에서 잠을 청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 주지훈이었다.
  • “숙취해소제 어디 있어?”
  • “주방으로 가시면 세 번째 서랍에 있어요. 하지만 그거 한번 데워서 드셔야 하는데… 혹시 당신 귀찮으시면….”
  • 수화기 너머로 그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그녀의 다음 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 문서연이 말했다.
  • “고용인한테 데워달라고 하세요.”
  •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주지훈은 전화를 끊었다.
  • 문서연은 입을 삐죽이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 ‘어쩐지 오늘 평소보다 태도가 부드럽다 했어. 술 마셨었구나.’
  • 주지훈은 매번 술을 마시면 평소보다 부드러운 태도를 보였다.
  • 가끔 문서연은 그가 얄밉게 행동할 때면 술을 먹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 물론 그녀는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 주지훈은 고용인을 부르는 대신, 차가운 물 한 잔을 들이켜고 방으로 올라갔다.
  •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가려던 그는 옷방 한쪽에 꽉 찬 여자옷들을 바라보았다.
  • 문서연이 집을 나간 지 벌써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 오늘 오후, 그는 법원 앞에서 임서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 “여자가 이혼을 고집하는 이유가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면 또 뭐가 있을까?”
  • 최근 들어 그는 짜증이 심해졌다. 문서연은 돈도 필요 없고 이혼만 해달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핑계를 그는 믿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본사까지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것만 봐도 그랬다.
  • 하지만 문서연은 이번에 단단히 작정한 것 같았다. 오늘이 그에게서 돈을 요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그래서 더욱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 한참 침묵하던 임서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대표님, 사모님께서 뭔가 서운한 게 있어서 그러시는 것 아닐까요?”
  • “서운한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