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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제발 이혼해요

  •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 문서연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낯선 방 안에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누워 있었다.
  • 침대 밑에 널린 옷가지들이 어젯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해 주고 있었다.
  • 그녀는 목이 타들어 가는 고통이 느껴졌다. 한참 상심하던 그녀는 그래도 40대 아저씨가 아닌 젊고 잘생긴 남자에게 처음을 빼앗긴 게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 그리고 아직 집에 혼자 있을 문서율이 떠올랐다. 그녀는 다급히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때 잠에서 깬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문서연은 얼른 다가가서 이불을 그의 머리끝까지 덮어 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 “아무 일 없으니까 계속 자요.”
  • 마치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 이불 속에서 더는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자, 문서연은 다급히 도망쳤다.
  • 빚쟁이들이 집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만다행인 건 문서율은 사라진 그녀를 찾는다고 집을 나간 것 같았다.
  • 문서연은 급히 문서율에게 전화해서 안부를 전하고 친구 집에서 며칠 신세 지라고 당부했다.
  • 그리고 그녀도 배수지를 찾아갔다.
  • 그렇게 두 달을 숨어 살던 문서연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문서연은 새벽 네 시에 잠에서 깼다. 그녀는 거실로 나가서 물 한잔을 마신 뒤, 소파에 앉아 첫사랑에 관련된 드라마를 찾아보았다. 다시 순수하고 풋풋했던 시절의 영감을 떠올리기 위해서였다.
  • 그렇게 사흘 동안 문서연은 방 안에 틀어박혀 작품을 구상하고 초안을 그렸다. 마침 괜찮은 구상이 떠올라서 펜을 드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 그녀는 펜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사모님, 저 주 대표님 비서 임서준인데요. 내일 대표님께서 몰디브로 출장을 가세요. 그런데 파란색 체크무늬 셔츠를 못 찾으셔서 사모님께 여쭤보라고 하셔서요.”
  • 작업 중 방해받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문서연은 이런 사소한 일로 연락을 했다니 욕설이라도 퍼부어 주고 싶었다.
  • ‘이 남자 일부러 이러는 건가?’
  • 그녀는 주저 없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 “그 사람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우리 이혼한 사이예요. 그 사람 셔츠가 어디에 있든 나랑 무슨 상관이죠? 가정부한테 찾아달라고 해요.”
  • 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 2분 뒤,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주지훈이었다.
  • 그녀는 한참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 “문서연, 30분 안에 집으로 와.”
  • “아니….”
  • 이번에 상대는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 문서연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이 남자에게 귀뺨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 그녀는 길게 심호흡한 뒤, 기분을 가라앉히고 방을 나섰다.
  • 그 모습을 본 배수지가 물었다.
  • “서연아, 이 밤에 어디 가?”
  • “그 나쁜 자식 죽이고 나도 죽으러!”
  • 말을 마친 그녀는 할 말을 잃은 배수지를 뒤로한 채 문을 나섰다.
  • 당연히 그냥 홧김에 한 소리였다. 주지훈은 그녀가 마음대로 주먹을 휘두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 선오동 별장에 도착하니 고용인들은 이미 쉬러 간 건지 주변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 문서연은 2층으로 올라가서 침실 문을 열었다. 편한 복장을 입은 주지훈이 소파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그는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 문서연은 곧장 옷방으로 가서 한참 뒤, 드디어 비서가 말한 파란색 체크무늬 셔츠를 찾아냈다.
  • 셔츠를 손에 든 그녀는 한참 멍하니 서 있었다.
  • 이건 그와 금방 결혼한 해, 주지훈이 하와이로 출장 간다는 얘기를 듣고 특별히 그를 위해 준비한 그녀의 선물이었다.
  • 해변과 어울리는 셔츠였다.
  • 그날 그녀가 셔츠를 내밀자 주지훈은 냉랭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 “앞으로 이런 얕은 수법으로 내 호감을 사려고 하지 마. 뻔한 수작 부리지 말라고.”
  • 문서연은 그를 위한 호의가 왜 뻔한 수작으로 오해받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뒤로 그녀는 한 번도 주지훈에게 뭔가를 선물하지 않았다.
  • 그때는 그렇게 혐오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제 와서 이 옷을 찾아달라고 한다니 어이가 없었다.
  • ‘이런 식으로 나한테 복수하려는 건가?’
  • 문서연은 조용히 옷을 들고 옷방을 나갔다. 셔츠를 침대에 내려놓은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는데 주지훈은 한창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마치 그녀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듯했다.
  • 문서연은 이혼 얘기를 꺼낼 작정이었으나 타이밍이 맞지 않아 바로 걸음을 돌렸다.
  • 그녀가 침실을 나서던 순간, 주지훈은 드디어 고개를 들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빨리 돌아갈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
  • “그럼 그렇게 하고 나중에 다시 연락하지.”
  • 문서연이 아래층 거실을 지나는데 그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 주지훈은 계단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 “옷은 찾았어?”
  • “침대에 놓아두었어요.”
  • “다른 것들은?”
  • 문서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 “다른 거 뭐요?”
  • 주지훈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 “출장 일정이 일주일이야. 한 벌로 일주일을 버티라는 얘기야?”
  • 문서연은 할 말을 잃었다.
  • 예전에 이 집에 살 때는 그가 출장 가기 전날이면 필요한 것들은 전부 그녀가 준비했다.
  • 3년을 조심스럽게 아내 역할을 수행했지만 칭찬 한번 듣지 못하고 이상한 버릇만 생기게 했다는 생각에 문서연은 씁쓸했다.
  •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 “주 대표님, 아니 주지훈 씨,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출장 준비는 내 책임이 아니죠. 가정부를 찾든가 아니면 미래의 와이프한테 부탁해요. 이런 쓸데없는 일로 나 부르지 말고요. 부탁할게요.”
  • 주지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 그녀의 앞에 섰다.
  • “나도 얘기할 게 있는데 아직 이혼서류 접수하지 않았으니까 당신은 여전히 내 아내야. 그러니까 아내로서의 책임은 해야지.”
  •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 “같은 말 두 번 반복하고 싶지 않아.”
  • 문서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휴대폰을 꺼냈다.
  • “좋아요. 이런 일까지 혼자 하기 싫다면 서시윤에게 연락하죠. 아마 좋아서 당장 뛰어올걸요?”
  • 하지만 그녀가 미처 통화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그가 핸드폰을 빼앗았다.
  • 주지훈은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 “문서연, 요즘 내가 너무 오냐오냐했었나?”
  • 문서연은 한참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 “주 대표님, 말씀은 가려서 하시죠. 난 그런 대우 받은 적 없거든요.”
  • 주지훈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 “도대체 언제까지 밀당할 거야? 문서연, 자꾸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 필요한 게 있으면 직접 얘기하라고.”
  • 문서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 “저번에 나한테 그러셨잖아요. 내가 주씨 그룹을 손에 넣으려 한다고요. 정말 그렇다면 주실 건가요?”
  • “꿈 깨.”
  • “그럼 이혼해요.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 주지훈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 “이혼 빼고 나한테 더 할 말은 없어?”
  • 문서연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항상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왜 이혼해 준다는데 이제 와서 뜸을 들이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