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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계명준

  • “사모님도 여자잖아요. 가끔은 서운한 게 있어도 말하기 어려웠을 수 있어요.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남자의 관심을 끌려고 할 수도 있죠. 사모님이 이혼 얘기를 꺼낸 거, 혹시 대표님이 달래주시길 바라고 그런 거 아닐까요?”
  • 주지훈은 바로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 “꿈 깨라고 해.”
  • ‘문서연, 주제를 알아야지. 어떻게 그런 비현실적인 생각을 할 수 있지?’
  • 임서준이 말했다.
  • “대표님, 저는 사모님이 돈만 밝히는 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버님께서 본사 앞에서 난동을 부릴 때 그러셨거든요. 대표님 돈은 자신과 상관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다가 아버님께 귀뺨까지 맞았어요.”
  • 주지훈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물었다.
  • “그 사람 맞았어?”
  • “네. 그것도 엄청 세게요. 얼굴에 손자국까지 났어요.”
  • 잠시 후, 주지훈이 입을 열었다.
  • “그 남자가 얼마를 원하는지 알아보고 돈 입금해 줘. 대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조건으로.”
  • 그리고 10분 뒤, 주지훈이 말했다.
  • “회사로 돌아가지.”
  • 그날 밤, 침실.
  • 주지훈은 눈에 띄는 곳에 걸린 파란색 체크무늬 셔츠를 보고 있자니 짜증이 치밀었다. 그는 이번에 출장 다녀와서도 문서연이 고집을 부린다면 이 옷과 함께 당장 그녀를 내쫓아야겠다고 다짐했다.
  • 성광 쥬얼리의 발표회도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왔다. 문서연은 한창 무대 뒤에서 모델들과 함께 액세서리를 점검하고 있었다.
  • 이때 임석훈이 들어오며 말했다.
  • “Ruan 씨, 오늘 밖에 많은 유명 디자이너와 셀럽들이 오셨어요. Ruan 씨의 작품은 오늘 무대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 될 거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Ruan 씨를 알게 될 거예요.”
  • 문서연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 “이게 다 성광 덕분이죠. 저는 그냥 평범한 디자이너일 뿐인걸요.”
  •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성광 쥬얼리라는 화려한 뒷배경이 없었다면 누가 무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보러 올까?
  • 마침 안으로 들어온 배수지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 “서연아, 너무 겸손할 거 없어. 우리 성광의 영광이 너의 영광이야. 안 그래요? 편집장님?”
  • 임석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죠. 상부상조하는 거죠.”
  • 임석훈이 자리를 비운 뒤, 배수지는 문서연의 팔목을 잡으며 작게 말했다.
  • “서연아, 꼭 말해야 할 게 있는데 너무 놀라지 마.”
  • “뭔데?”
  • “나 방금 전에 계명준 봤어.”
  •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문서연의 손에 들린 머리핀이 바닥에 떨어졌다.
  • 배수지는 다급히 그것을 주우며 말했다.
  • “사실 계명준 계속 너를 찾고 있었어. 이번에 성광이 사람들 이목을 끌려고 3년 전 공모전에서 수상하고 자취를 감춘 디자이너가 복귀했다고 크게 언론에 보도했거든. 아마 소문 듣고 찾아온 게 분명해.”
  • 문서연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지만 정작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 배수지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했다.
  • “괜찮아. 너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너도 이혼했고 새 삶을 시작할 권리는 있잖아?”
  • “아니… 이번 시리즈 관련 인터뷰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어.”
  • 첫사랑이라는 테마는 아름다우면서도 예민한 주제였다.
  • 예전에 잡지사와 회의할 때 그녀는 작품에 관해 인터뷰하는 건 괜찮으나 절대 그녀의 개인적인 질문은 받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 자칫하면 이번 일에 엮인 모두가 난처해질 수도 있었다. 그녀가 지금 이혼을 앞둔 건 그렇다 하더라도 계명준에게 사귀는 여자친구가 있다면 이번 인터뷰로 난감한 처지에 처할 수 있었다.
  • 배수지가 머리를 탁 치며 말했다.
  • “그러네. 이따가 언론사랑 얘기 좀 해봐야겠어. 절대 사적인 질문은 받지 않기로. 내가 있으니까 넌 걱정하지 마!”
  • 그 뒤로 문서연은 좀처럼 무대 준비에 집중할 수 없었다.
  • 임석훈이 얘기했던 대로 발표회 현장에는 많은 셀럽들이 참석했다.
  • 거기에는 강시현과 벨기에 출장에서 돌아온 주지훈도 포함되어 있었다.
  • 임석훈은 주지훈을 본 순간, 그가 왜 이런 자리에 참석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 강시현이 웃으며 해명했다.
  • “임 편집장님, 이번 시리즈 테마가 첫사랑이잖아요. 소문을 듣자니 아주 아름답다고 들어서요. 우리 주 대표가 사모님께 선물하고 싶다고 해서 들른 거예요.”
  • 임석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표회에서 전시한 작품은 팔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상계 거물인 주씨 그룹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 발표회가 끝나고 주지훈이 꼭 사고 싶다면 디자이너와 의논해 볼 수도 있었다.
  • “그럼 두 분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발표회가 곧 시작될 거예요.”
  • 강시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어서 가서 볼일 보세요.”
  • 임석훈이 떠난 뒤, 강시현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 “너 네 와이프 싫어했잖아. 이 시리즈 테마가 첫사랑인데 선물했다가 괜한 오해라도 하면 어떡해?”
  • 주지훈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 “오해했으면 그 여자가 주제넘은 거지. 난 그냥 지나가다가 괜찮아서 산 것뿐이야.”
  • 강시현은 할 말을 잃었다.
  • ‘말이라도 못하면….’
  • 그는 공항에 내린 후, 집에 돌아가 쉴 틈도 없이 발표회 현장에 달려왔다. 그게 어떻게 지나가다가 눈에 띄어서 산 것이 된단 말인가.
  • 강시현이 뭔가 말하려는데 문밖에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 “쟤 주예은 아니야? 언제 귀국했대?”
  • 주지훈이 그쪽을 힐끗 보고는 대꾸했다.
  • “몰라.”
  • 주지훈의 심드렁한 태도와 달리, 강시현은 부쩍 호기심이 동했다. 평소 까칠하고 예의 없던 주예은이 한 남자의 팔에 매달려 애교를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잠시 후, 그들을 발견한 주예은은 남자를 이끌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 “오빠, 시현 오빠, 두 분이 어떻게 여기 있어요?”
  • 주지훈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 “일이 있어서.”
  • 강시현은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 “예은이 오랜만이다?”
  • “시현 오빠도 오랜만이네요.”
  • 주예은은 남자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 “참, 소개할게요. 이쪽은 계명준 오빠. 해외 유학할 때 알게 된 사이예요.”
  • 계명준은 슬며시 손을 빼며 강시현에게 악수를 청했다.
  • “계명준입니다.”
  • 강시현도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아, 우리 만난 적 있어요. 어르신 생신 파티에서 만났었죠. 3년 전에 해외 유학갔다던데 이제 귀국하신 거예요?”
  • 계명준은 고개를 끄덕인 뒤, 주지훈에게 인사를 건넸다.
  • “주 대표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 주지훈도 예의상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 주예은이 웃으며 그들 대화에 끼어들었다.
  • “다 아는 사이였네요. 명준 오빠는….”
  • 주예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장을 밝히던 전등이 꺼졌다.
  • 이어서 사회자가 무대에 올랐다.
  • “바쁜 시간을 내어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발표회를 시작하겠습니다.”
  • 주예은은 주지훈과 강시현의 앞에 자리가 있는 것을 보고 계명준의 손을 끌었다.
  • “명준 오빠, 우리 저기 가서 앉아요.”
  • 하지만 사람을 찾으러 온 계명준은 그녀와 계속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 “난 다른 일이 있어. 네가 가서 앉아.”
  • 말을 마친 그는 주예은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