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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도와주세요

  • 그래서 그들은 거의 같이 외출하는 일이 없었다.
  • 강시현도 문서연을 본 것이 이번이 겨우 세 번째였다.
  • 처음 그녀를 본 것은 주지훈이 서류를 깜빡했을 때 그녀가 서류를 가지고 회사에 찾아온 적 있었다. 그녀는 주지훈의 냉대에 약간 서글픈 표정을 지었지만 그 어떤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첫인상은 온화하고 이해심 많은 여자였다.
  • 두 번째는 주씨 어르신의 생신 파티 때였다. 그날은 주지훈과 그녀의 2주년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그녀를 고깝게 생각하는 주씨 가문 사람들은 아무도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하지 않았다.
  • 그날 저녁, 문서연은 마치 주씨 가문에서 돈 주고 고용한 아르바이트처럼 바쁘게 돌아쳤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수고했다 인사 한마디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 거슬린다고 투덜거리기까지 했다.
  • 그 뒤로 그녀는 줄곧 구석진 곳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가족들의 비아냥거리는 소리에도 그녀는 반박 대신 고개를 떨구고 자리를 피했다.
  • 강시현이 기억하는 주지훈의 아내는 만만하고 불합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반박 한마디 하지 않던 여린 여자였다.
  • 그런데 오늘 기세등등하게 걸어 나오는 그녀를 보자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 주지훈은 문서연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 강시현이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 “나 들어오기 전에 임석훈 봤어.”
  • 주지훈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 “그게 누군데?”
  • “성광 쥬얼리의 편집장.”
  • “들어본 것 같기는 해.”
  • 주씨 그룹은 성광과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 있었기에 편집장을 몇 번 만난 적 있었다.
  • 강시현이 감탄하듯 말했다.
  • “임석훈이 그러는데 Ruan을 찾았대. 그리고 예상대로라면 그의 잡지사 전속 디자이너로 계약할 거래. Ruan 기억하지?”
  • “아니.”
  • 그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 강시현이 말했다.
  • “3년 전 네가 투자해 준 신인 디자이너 공모전 기억하지? 그때 대상 수상자가 Ruan이었어. 원래대로라면 주씨 그룹 지원을 받고 파리에 유학을 갈 기회였는데 어쩐 영문인지 기회를 포기하고 잠적했더라고. 나도 알아봤는데 그 사람 대회 주최 측을 찾아서 유학 자금을 현금으로 줄 수는 없냐고 요청했다면서? 그리고 담당자가 너한테 보고했는데 네가 거절했고. 그 뒤로 업계에서 사라져 버렸어. 꽤 센스 있는 디자이너였는데 아쉬웠지.”
  • 주지훈은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강시현이 떠드는 소리를 전혀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 “그런 일이 있었어? 기억 안 나.”
  • 한편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임석훈은 저녁 식사 때와 비교해서 문서연의 기분이 갑작스럽게 다운됐다는 것을 눈치챘다.
  • 하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기에 배수지에게 눈치를 보냈다.
  • 배수지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자 임석훈이 말했다.
  • “문서연 씨, 작품 기대할게요. 앞으로 같이 잘해봐요.”
  • 문서연은 그제야 울적한 기분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 “감사합니다, 편집장님. 열심히 할게요.”
  • 임석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그럼 나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어서 올라가서 쉬어요. 다음 주에 봐요.”
  • 집으로 돌아오자 배수지가 입을 열었다.
  • “서연아, 아직도 그 몹쓸 놈들 때문에 힘들어?”
  • 문서연은 약간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 “아니. 작품 구상하고 있었어.”
  • 임석훈이 정한 컨셉은 첫사랑이었다. 배수지는 이는 디자이너와 계약하고 가장 처음으로 내놓을 시리즈이며 타겟층이 젊은 층이라고 했다. 이는 잡지사도 이번 작품에 큰 기대를 걸고 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하지만 문서연에게 첫사랑은 멀고도 생소한 단어였다.
  •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그런 설렘은 주지훈과 3년을 같이 살면서 진작 무감각해졌다.
  • 배수지가 말했다.
  •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너 계명준이랑 아직도 연락 안 해?”
  • 문서연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 3년 전 공모전에서 대상을 거머쥔 뒤, 그녀는 파리에 유학 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 그 뒤로 계명준은 몇 번이고 그녀를 찾아와 이유를 물었다.
  • 그러는 그의 눈빛에 비친 당혹감과 실망감을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없었기에 그의 모든 연락처를 삭제했다.
  •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 자신이 대상을 거머쥔 그날 밤, 기쁨에 들떠 있을 때 갑자기 아버지에게서 사채를 2억이나 빌렸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
  • 그날 밤 온몸을 엄습하던 추위가 그녀는 지금도 생생하다.
  • 배수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 “나는 지금도 너희 두 사람 그렇게 헤어진 거 안타깝게 생각해. 학교 다닐 때 다들 너희를 부러워했어. 너무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고 너희가 서로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눈에 보였으니까. 나는 너희가 파리로 가서 잘 살 줄 알았어. 그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어…. 운명은 가끔 보면 참 잔혹해.”
  • 한참 침묵을 지키던 문서연이 입을 열었다.
  • “다 지나간 일이야.”
  • “그래. 슬픈 과거는 그만 얘기하자. 참, 서시윤에 관한 소문을 들었는데… 걔 잡지사 촬영 현장에 처음 간 날, 세트 조명이 뭔지도 몰랐다잖아. 그런 애가 어떻게….”
  • 배수지는 문서연에게 이런저런 우스개를 하다가 그녀의 기분이 풀어지자 또 주지훈과 서시윤에 관한 욕설을 한바탕 늘어놓았다.
  • 잠들려고 침대에 누운 문서연은 아까 화장실에서 서시윤이 했던 말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 비록 그렇게 저속한 표현이 주지훈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평소 그녀를 대하던 그의 행동으로 보아 서시윤의 말이 마냥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 문서연은 자신이 주지훈의 발목을 잡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서 3년 동안 완벽한 아내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무진장 노력했다. 그의 악의적인 비아냥이나 그의 가족들의 냉대에도 그녀는 불평 한번 한 적 없었다.
  • 그가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 하지만 독을 묻힌 칼날 같은 현실이 자신을 향해 날아올 때 그녀도 숨이 막히는 아픔을 느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었다.
  • 문서연은 이불 속에 머리를 묻고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 3년 전, 문재균이 2억이나 되는 사채를 끌어다 썼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는 돈을 구하러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심지어 자존심을 굽히고 공모전 담당자를 찾아 유학비용을 현금으로 바꿔줄 수 없냐고 사정하기까지 했다.
  • 그녀는 그 담당자가 했던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 “Ruan 씨에게 죄송하지만 우리 대표님께서는 이번 기회를 꿈을 가진 재능 있는 디자이너에게 제공해 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상업적 이득을 취하려 공모전에 참여한 사람한테는 절대 줄 수 없다고요.”
  • 그 말을 들은 문서연은 한참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울며 투자사 대표에게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 ‘누구는 꿈이 없어서 이런 부탁을 하겠냐고?!’
  • 그리고 며칠이 지나 빚쟁이들은 연락 두절된 문재균을 찾아 그녀가 살고 있는 집까지 방문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말도 안 되는 선택을 강요했다.
  • 그들은 문서연에게 동생의 손목으로 빚을 대신하거나 그들을 따라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 선택지가 없었던 문서연은 문서율의 울부짖음을 뒤로 하고 묵묵히 그들을 따라나섰다.
  • 그들은 그녀를 MS클럽에 팔아넘겼다. 그곳은 유흥을 좋아하는 재벌들이 모여 광란의 밤을 즐기는 장소였다.
  • 그리고 업소 직원은 그녀의 술에 약을 탔다.
  • 그곳에 가기 전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한 그녀였지만 기름진 얼굴의 40대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오던 순간, 갑자기 계명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같이 파리로 가자던 그와의 약속도 떠올랐다.
  • 어디서 난 용기인지 그녀는 남자를 밀치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 뒤에서는 업소 직원들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눈앞에 훤칠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그의 옷깃을 잡으며 애원했다.
  • “저 좀… 도와주세요…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