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녀를 본 것은 주지훈이 서류를 깜빡했을 때 그녀가 서류를 가지고 회사에 찾아온 적 있었다. 그녀는 주지훈의 냉대에 약간 서글픈 표정을 지었지만 그 어떤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첫인상은 온화하고 이해심 많은 여자였다.
두 번째는 주씨 어르신의 생신 파티 때였다. 그날은 주지훈과 그녀의 2주년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그녀를 고깝게 생각하는 주씨 가문 사람들은 아무도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문서연은 마치 주씨 가문에서 돈 주고 고용한 아르바이트처럼 바쁘게 돌아쳤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수고했다 인사 한마디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 거슬린다고 투덜거리기까지 했다.
그 뒤로 그녀는 줄곧 구석진 곳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가족들의 비아냥거리는 소리에도 그녀는 반박 대신 고개를 떨구고 자리를 피했다.
강시현이 기억하는 주지훈의 아내는 만만하고 불합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반박 한마디 하지 않던 여린 여자였다.
그런데 오늘 기세등등하게 걸어 나오는 그녀를 보자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주지훈은 문서연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강시현이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나 들어오기 전에 임석훈 봤어.”
주지훈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게 누군데?”
“성광 쥬얼리의 편집장.”
“들어본 것 같기는 해.”
주씨 그룹은 성광과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 있었기에 편집장을 몇 번 만난 적 있었다.
강시현이 감탄하듯 말했다.
“임석훈이 그러는데 Ruan을 찾았대. 그리고 예상대로라면 그의 잡지사 전속 디자이너로 계약할 거래. Ruan 기억하지?”
“아니.”
그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강시현이 말했다.
“3년 전 네가 투자해 준 신인 디자이너 공모전 기억하지? 그때 대상 수상자가 Ruan이었어. 원래대로라면 주씨 그룹 지원을 받고 파리에 유학을 갈 기회였는데 어쩐 영문인지 기회를 포기하고 잠적했더라고. 나도 알아봤는데 그 사람 대회 주최 측을 찾아서 유학 자금을 현금으로 줄 수는 없냐고 요청했다면서? 그리고 담당자가 너한테 보고했는데 네가 거절했고. 그 뒤로 업계에서 사라져 버렸어. 꽤 센스 있는 디자이너였는데 아쉬웠지.”
주지훈은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강시현이 떠드는 소리를 전혀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어? 기억 안 나.”
한편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임석훈은 저녁 식사 때와 비교해서 문서연의 기분이 갑작스럽게 다운됐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기에 배수지에게 눈치를 보냈다.
배수지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자 임석훈이 말했다.
“문서연 씨, 작품 기대할게요. 앞으로 같이 잘해봐요.”
문서연은 그제야 울적한 기분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편집장님. 열심히 할게요.”
임석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나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어서 올라가서 쉬어요. 다음 주에 봐요.”
집으로 돌아오자 배수지가 입을 열었다.
“서연아, 아직도 그 몹쓸 놈들 때문에 힘들어?”
문서연은 약간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아니. 작품 구상하고 있었어.”
임석훈이 정한 컨셉은 첫사랑이었다. 배수지는 이는 디자이너와 계약하고 가장 처음으로 내놓을 시리즈이며 타겟층이 젊은 층이라고 했다. 이는 잡지사도 이번 작품에 큰 기대를 걸고 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문서연에게 첫사랑은 멀고도 생소한 단어였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그런 설렘은 주지훈과 3년을 같이 살면서 진작 무감각해졌다.
배수지가 말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너 계명준이랑 아직도 연락 안 해?”
문서연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3년 전 공모전에서 대상을 거머쥔 뒤, 그녀는 파리에 유학 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그 뒤로 계명준은 몇 번이고 그녀를 찾아와 이유를 물었다.
그러는 그의 눈빛에 비친 당혹감과 실망감을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없었기에 그의 모든 연락처를 삭제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대상을 거머쥔 그날 밤, 기쁨에 들떠 있을 때 갑자기 아버지에게서 사채를 2억이나 빌렸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날 밤 온몸을 엄습하던 추위가 그녀는 지금도 생생하다.
배수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지금도 너희 두 사람 그렇게 헤어진 거 안타깝게 생각해. 학교 다닐 때 다들 너희를 부러워했어. 너무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고 너희가 서로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눈에 보였으니까. 나는 너희가 파리로 가서 잘 살 줄 알았어. 그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어…. 운명은 가끔 보면 참 잔혹해.”
한참 침묵을 지키던 문서연이 입을 열었다.
“다 지나간 일이야.”
“그래. 슬픈 과거는 그만 얘기하자. 참, 서시윤에 관한 소문을 들었는데… 걔 잡지사 촬영 현장에 처음 간 날, 세트 조명이 뭔지도 몰랐다잖아. 그런 애가 어떻게….”
배수지는 문서연에게 이런저런 우스개를 하다가 그녀의 기분이 풀어지자 또 주지훈과 서시윤에 관한 욕설을 한바탕 늘어놓았다.
잠들려고 침대에 누운 문서연은 아까 화장실에서 서시윤이 했던 말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비록 그렇게 저속한 표현이 주지훈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평소 그녀를 대하던 그의 행동으로 보아 서시윤의 말이 마냥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문서연은 자신이 주지훈의 발목을 잡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서 3년 동안 완벽한 아내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무진장 노력했다. 그의 악의적인 비아냥이나 그의 가족들의 냉대에도 그녀는 불평 한번 한 적 없었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독을 묻힌 칼날 같은 현실이 자신을 향해 날아올 때 그녀도 숨이 막히는 아픔을 느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었다.
문서연은 이불 속에 머리를 묻고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3년 전, 문재균이 2억이나 되는 사채를 끌어다 썼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는 돈을 구하러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심지어 자존심을 굽히고 공모전 담당자를 찾아 유학비용을 현금으로 바꿔줄 수 없냐고 사정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그 담당자가 했던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Ruan 씨에게 죄송하지만 우리 대표님께서는 이번 기회를 꿈을 가진 재능 있는 디자이너에게 제공해 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상업적 이득을 취하려 공모전에 참여한 사람한테는 절대 줄 수 없다고요.”
그 말을 들은 문서연은 한참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울며 투자사 대표에게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누구는 꿈이 없어서 이런 부탁을 하겠냐고?!’
그리고 며칠이 지나 빚쟁이들은 연락 두절된 문재균을 찾아 그녀가 살고 있는 집까지 방문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말도 안 되는 선택을 강요했다.
그들은 문서연에게 동생의 손목으로 빚을 대신하거나 그들을 따라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선택지가 없었던 문서연은 문서율의 울부짖음을 뒤로 하고 묵묵히 그들을 따라나섰다.
그들은 그녀를 MS클럽에 팔아넘겼다. 그곳은 유흥을 좋아하는 재벌들이 모여 광란의 밤을 즐기는 장소였다.
그리고 업소 직원은 그녀의 술에 약을 탔다.
그곳에 가기 전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한 그녀였지만 기름진 얼굴의 40대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오던 순간, 갑자기 계명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같이 파리로 가자던 그와의 약속도 떠올랐다.
어디서 난 용기인지 그녀는 남자를 밀치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에서는 업소 직원들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눈앞에 훤칠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그의 옷깃을 잡으며 애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