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하린이 결혼 준비 중이래
- 하지만 하린은 증명해 보였다. 청각이 약해도 피아노를 치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걸. 그녀는 정상인과 다르지 않았다.
- 그 기사들은 마치 빛처럼 연시온을 지탱해 주었고, 그는 그 빛을 붙잡고 천천히 일어설 수 있었다.
- 연시온이 그녀의 빛나는 순간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하린 스스로도 그 기억을 거의 잊고 있었다.
- 연시온이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을 때, 하린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 “고마워.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거의 잊고 있었거든.”
- 연시온은 그 후에도 하린과 함께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루 종일 그와 함께했지만, 그는 하린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세심하게 배려한 것이다.
- 그날 밤, 집에 혼자 있게 된 하린은 달력을 보았다. 5월 15일, 이로한과 이혼하기로 한 날이 이제 열흘 남짓 남아 있었다.
- 하린은 최은영과의 약속이 떠올라, 어느 아침 묘지를 찾았다.
- 먼저 그녀는 아버지의 묘비 앞에 섰다. 묘비 위의 사진 속, 자상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버지를 보며 하린은 목이 메어왔다.
- “아빠, 보고 싶어요.”
- 부드러운 바람이 하린의 뺨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 “아빠, 내가 아빠를 찾아가면 분명 화내시겠죠?”
- 하린은 손을 뻗어 묘비 위에 떨어진 낙엽들을 하나씩 치우기 시작했다.
- “나도 알아요, 내가 강해져야 한다는 걸… 하지만… 죄송해요.”
- 그녀는 묘비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하린은 발걸음을 돌렸다.
- 묘지를 나선 그녀는 곧장 가서 유골함을 하나 구입했다. 그 후, 사진관으로 향해 직원의 이상한 시선을 받으며 흑백 사진을 한 장 찍었다.
-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하린은 차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 임영숙이었다.
- “린, 요즘 어떻게 지내니?”
- 하린은 임영숙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 “잘 지내요.”
- 임영숙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이내 하린을 나무랐다.
- “왜 또 돈을 남겨두고 갔어? 그 돈, 내가 안 썼어. 그대로 저축해 놨으니까, 나중에 네가 뭐라도 해보려고 할 때 쓰면 돼…”
- 이 몇 년 동안, 하린은 종종 몰래 임영숙에게 돈을 건넸다.
- 하지만 임영숙은 시골에서 사는 사람이라 돈을 쓸 일이 거의 없었고, 하린이 준 돈은 모두 저축해 둔 상태였다.
-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임영숙의 다정한 잔소리를 듣는 동안, 하린의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여 두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 “아주머니, 어릴 적처럼 저를 데리러 와 주실 수 있나요?”
- 임영숙은 의아해했다.
- 하린은 다시 말했다.
- “15일에, 아주머니가 저를 우리가 살던 집으로 데려가 주세요.”
- 임영숙은 왜 꼭 15일이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조용히 대답했다.
- “그래, 15일에 내가 널 데리러 갈게.”
- 최근 병원에서는 하린에게 재검진을 받으라는 문자를 다시 보냈지만, 그녀는 정중히 거절했다.
- 어차피 떠나기로 했는데, 더는 돈을 치료에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 하린은 자신의 통장을 확인했다. 아직 2천만 원 정도 남아 있었다. 자신이 떠난 후, 이 돈을 임영숙에게 남겨 그녀의 노후를 위해 써주길 바랐다.
- 최근 들어 도주에는 비가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 연시온은 자주 하린을 찾아왔다. 그는 종종 그녀가 베란다에 홀로 앉아 멍하니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 또한, 하린의 청력이 더 나빠졌다는 것도 눈치챘다. 많은 경우, 연시온이 문을 두드려도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가끔 대화를 나눌 때도, 하린은 그의 입 모양을 주의 깊게 쳐다봐야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 “린, 이틀 뒤에 강변에서 불꽃놀이가 있대. 같이 가볼래?”
- 하린은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 “그래, 가자.”
- 도주에는 매주 토요일마다 강변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전통이 있는데, 굉장히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 사람들은 연인이 도주에서 함께 불꽃놀이를 보면 절대 헤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믿곤 했다.
- 결혼 후, 하린도 한 번 이로한에게 불꽃놀이를 보러 가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로한은 냉담하게 거절했다.
- 도주에 사는 사람들은 외지인들에 비해 불꽃놀이를 볼 기회가 많았지만, 하린과 이로한은 단 한 번도 함께 보지 않았다.
- …
- 토요일이 되자, 두 사람은 약속대로 저녁 8시에 불꽃놀이를 보러 갔다.
- “펑—!”
- 찬란한 불꽃이 하늘에 터지며, 눈부신 순간이 금세 사라져갔다.
- 하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눈가에 맑은 눈물이 고였다.
- “연시온, 고마워. 오늘 정말 행복했어.”
- 연시온은 옆에서 하린의 앙상하고 연약한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연시온은 그녀가 진정으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 “응, 마침 올해는 나도 도주에 머무를 거니까, 앞으로 매주 같이 와서 불꽃놀이를 볼 수 있을 거야.”
- 하린은 연시온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그녀는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 30분 후, 모든 불꽃놀이가 끝났다.
- 연시온이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하린은 거절했다. 그녀는 혼자서 강변을 따라 걸어가고 싶었다.
- 오늘따라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 사람들 사이로 하린은 순간 이로한을 본 것 같았다.
- 그러나 가까이 다가온 사람의 낯선 얼굴을 보자, 하린은 자신이 또다시 사람을 잘못 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이로한과 헤어진 이후, 하린은 가끔 길에서 이로한과 닮은 사람을 볼 때마다 이로한으로 착각하곤 했다.
- 하린은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건너편의 큰 전광판에서 한창 연예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인터뷰의 주인공은 원은별이었다.
- 기자가 물었다.
- “은별 씨, 이번에 돌아와서 첫사랑을 다시 잡겠다고 하셨는데, 그 소원을 이루셨나요?”
- 카메라 앞에서 원은별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 “오늘 밤 8시에 그 사람과 함께 도주의 불꽃놀이를 봤어요.”
- 이것은 분명 그녀의 연애를 공식적으로 알리는 말이었다.
- 하린이 횡단보도를 건너던 그 순간, 전광판에서는 적절한 타이밍에 원은별을 위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 곡은 바로 “일생의 사랑”이었다.
- 일생의 사랑…
- 하린은 일생 동안 이로한만을 사랑해왔다.
- 어떻게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 하린은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아마도 십여 년 전 어느 오후, 혼자서 하 씨 가문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하얀 셔츠를 입은 이로한의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 또는, 학창 시절 그녀가 괴롭힘을 당했을 때, 마치 구세주처럼 나타나 그녀를 도와준 이로한의 모습 때문일지도 모른다.
- 아니면, 어릴 적 이 씨 가문의 부모님과 그녀의 아버지가 이로한과의 혼인을 농담처럼 이야기하며, 커서 꼭 이로한에게 시집을 가게 될 거라고 했던 그 순간 때문일지도…
- 너무나 많은 이유가 있었다. 이제 와서 하린조차도 자신이 왜 이로한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 …
- 한편, 이로한은 그 뉴스를 보지 못했다.
- 일을 마치고 그는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하지만 하린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고,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로한은 곧 휴대폰을 꺼서 옆에 던져 두었다.
- 그때 비서 허민혁이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 “이 대표님, 확인됐습니다. 그 남자는 연시온이라고 합니다. 하린의 소꿉친구인 것 같습니다.”
- 이로한의 기억 속에서도, 과거의 미디어 보도에서도 하린의 소꿉친구는 늘 자신이었다.
- 그러나 비서는 하린이 연시온을 시골에 있을 때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 그 말인즉, 하린은 이로한을 만나기 전에 연시온을 먼저 알게 됐다는 뜻이었다.
- 이로한은 그때 만났던, 매력적이지만 어딘가 위험해 보였던 남자, 긴 눈매가 인상적인 연시온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 “이 대표님, 심 도련님이 아직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 이로한은 그 말을 듣고 단호하게 지시했다.
- “걔한테 전해, 오늘은 일이 있어서 못 만난다고.”
- 비서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 최근 이로한은 퇴근 후 항상 심진택을 비롯한 부잣집 자제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오늘은 어째서 계획을 바꾼 것일까?
- 이로한은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를 몰고 바로 하린이 머물고 있는 여관으로 향했다.
- 하지만 도착하자, 하린이 며칠 전에 이미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갑자기 짜증이 밀려온 이로한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연락처를 몇 번이고 열어보았다.
- 하린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원은별이었다.
- “무슨 일이야?”
- “로한, 나 은영 엄마한테 들었는데, 하린이 결혼 준비 중이래.”
- 이로한의 검은 눈동자가 순간 좁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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