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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이혼

  • 지금 돌아보면, 아버지는 이로한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미리 눈치챘던 것 같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녀의 행복을 위해 이 씨 가문과 계약을 맺었고, 그녀가 원하던 대로 이로한과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 그러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날 줄은.
  • 만약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 어머니와 동생도 그 계약을 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 하린은 재산 양도와 관련된 모든 서류를 장 변호사에게 맡기고,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거리에서 원은별의 홍보 포스터들을 보게 되었다.
  • 포스터 속의 원은별은 너무나도 눈부셨다. 밝고, 긍정적이며, 아름다웠다.
  • 하린은 그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이제 놓아줄 때가 왔다는 것을. 이로한을 자유롭게 보내주고, 자신 역시 자유로워져야 할 때였다.
  • 비스타 하우스로 돌아온 하린은 천천히 자신의 짐을 챙겼다.
  • 결혼한 지 3년이 넘었지만, 그녀의 물건은 고작 하나의 여행 가방에 다 담길 만큼 적었다.
  • 사실 하린은 이미 지난해에 장 변호사에게 이혼 서류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해 두었었다.
  • 이로한 앞에서 그녀는 항상 지나치게 위축되고, 자신을 깎아내리며, 감정에만 치우쳐 왔다.
  • 그래서 일찍부터 그들의 관계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직감했고, 떠날 준비도 미리 해 두었다.
  • 밤이 되었지만, 이로한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 하린은 오랜 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오늘 밤 시간 있어? 할 말이 있어.”
  • 메시지는 한참 동안 답장이 없었다.
  • 하린의 눈빛은 어두워졌다.
  • ‘이제는 답장조차 할 마음이 없나 보네.’
  • 어쩔 수 없이, 그가 아침에 돌아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 한편, 이 씨 그룹 대표실에서는 이로한이 하린의 메시지를 흘끗 보기만 하고,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았다.
  • 친구 심진택은 소파에 앉아 그 광경을 보더니, 참지 못하고 물었다.
  • “하린이 보낸 거야?”
  • 이로한은 대답 대신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 심진택은 조금의 배려도 없이 냉소를 띠며 말했다.
  • “그 귀머거리 여자, 아직도 자기가 이 사모라고 착각하고 있나 보네. 이젠 형이 어디 있는지도 체크하는 건가?”
  • “로한 형, 정말 그 여자랑 계속 이렇게 시간을 끌면서 버티려는 건 아니지? 지금 하 씨 가문은 이미 끝났어. 하린의 동생 하민은 완전 멍청이라 회사를 경영할 능력도 없고, 머지않아 하 씨 가문은 무너질 거라고.”
  • “그리고 하린의 어머니는 그야말로 밑빠진 독이잖아!”
  • 이로한은 그 말을 들으면서도 얼굴에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 “나도 알아.”
  • “그런데 왜 아직도 이혼을 안 해? 은별은 여전히 형을 기다리고 있어!”
  • 심진택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의 마음속에서, 순수하고 열심히 사는 원은별이 교활해 보이는 하린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 ‘이혼’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이로한은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 심진택은 이로한이 침묵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 “설마 하린에게 감정이 생긴 건 아니지?”
  • 감정? 이로한은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 웃음 속에는 조롱이 가득 묻어있었다.
  • “그 여자가 그럴 자격이 있어?”
  • 이로한은 조용히 한 건의 인수 계약서를 심진택에게 건넸다.
  • 심진택은 문서를 확인하자마자, 이로한이 정말 잔인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는 그저 이로한과 하린의 이혼만을 원했을 뿐인데, 이로한은 하 씨 그룹까지 통째로 손에 넣으려 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 그 순간, 심진택은 의외로 하린이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다.
  •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고, 하린이 이로한에게 끝없이 헌신하며 무조건적으로 잘해왔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 그러나 이로한은 정말로 냉정했고, 하린을 조금도 좋아할 가능성이 없었다. 그는 철저하게 무정한 사람이었다.
  • 이로한이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지만, 새벽 12시가 되자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 하린은 잠들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외투와 서류 가방을 받아 들었다. 이 모든 행동은 마치 평범한 부부의 일상처럼 보였다.
  • 그러나 그 순간의 고요함을 이로한의 차가운 목소리가 깨트렸다.
  • “앞으로 나한테 함부로 문자 보내지 마.”
  • 그의 입장에서는 하린이 일을 하지도 않고 매일 집에만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 하린은 외투를 걸던 손이 순간적으로 떨렸지만, 조용히 대답했다.
  • “알았어. 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 이로한은 그녀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곧장 서재로 향했다.
  • 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집에 돌아와도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에서 보냈다. 두 사람은 같은 집에 살고 있었지만, 하린은 늘 혼자였다.
  • 이로한의 머릿속에는 아마도, 하린처럼 청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의 세계는 조용하기만 하리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 혹은 그가 애초에 하린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 그래서 서재로 들어가자마자 평소와 다름없이 사업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가 지금 논의하는 주제가 하 씨 그룹을 인수하는 계획임에도, 이로한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 하린은 여느 때처럼 이로한에게 속을 따뜻하게 해줄 국 한 그릇을 가져다주었다. 이로한이 직원들에게 자신만만하게 지시를 내리는 소리를 듣자, 하린은 마음이 복잡했다.
  • 그녀는 자신의 동생이 무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하 씨 그룹이 언젠가는 무너질 날이 올 거라는 사실도 받아들였지만, 그 타격을 준 사람이 바로 자신의 남편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 “로한.”
  • 하린의 목소리가 이로한의 말을 끊었다.
  • 이로한은 순간 당황한 듯했다. 마음이 켕겨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급히 전화를 끊고 노트북도 덮었다.
  • 하린은 그의 이러한 행동을 못 본 척하며 조용히 걸어 들어가, 그의 책상 위에 따뜻한 국을 놓아두었다.
  • “로한, 국 다 마시고 일찍 쉬어. 몸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린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니 이로한은 긴장됐던 마음이 약간 누그러졌다.
  • ‘분명 듣지 못했을 거야. 만약 들었다면 분명히 나와 싸우려고 했을 텐데.’
  •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로한은 하린이 방을 떠나려 할 때 그녀를 불러 세웠다.
  • “너,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뭔데?”
  • 하린은 그 말을 듣고, 너무나 익숙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 “그냥 오늘 오전에 시간 좀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어. 같이 가서 이혼 서류 처리할 수 있을까 해서.”
  • 하린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차분했고, 마치 아무 일도 아닌 듯 담담하게 들렸다.
  • 이혼이 그저 평범한, 아무렇지 않은 사소한 일처럼 보였다.
  • 이로한의 깊은 눈동자가 순간 흔들리며, 그 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가득했다.
  • “뭐라고?”
  • 결혼한 지 3년이 되도록, 아무리 이로한이 지나치게 행동해도 하린은 한 번도 이혼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 사실 이로한은 잘 알고 있었다. 하린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 어릴 때 두 집이 이웃으로 살았을 때부터, 그는 이 소녀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린이 자신을 10년 넘게 좋아해왔다는 사실을 그는 늘 알고 있었다.
  • 그래서 말인데, 방금 그녀가 뭐라고 했지?
  • 하린의 원래 공허했던 눈동자는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도 맑고 투명했다.
  • “이로한 씨, 그동안 당신을 붙잡고 있어서 미안해요.”
  • “우리 이혼해요.”
  • 옆에 늘어져 있던 이로한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꽉 쥐어졌다.
  • 회사에서 심진택이 그에게 이혼을 먼저 제안하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그때 이로한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하린이 먼저 이혼을 말하다니.
  • ‘대체 무슨 자격으로?’
  • “너 방금 다 들은 거지? 하 씨 가문은 본래 기울어가는 집안이야. 내가 손에 넣든, 다른 사람이 손에 넣든 뭐가 다르겠어?”
  • “넌 뭘 원하길래 이혼 얘기를 꺼내는 거야? 아이 때문이야, 아니면 돈 때문이야? 아니면 내가 하 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는 거야?”
  • 이로한은 차갑게 되물었다.
  • “잊지 마, 난 너를 사랑한 적 없어. 너의 협박 따위, 나한테 통하지 않아!”
  • 그는 본능적으로 하린이 이혼을 빌미로 자신을 협박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하린이 감히 자신을 떠날 리 없다고 확신했다.
  • ‘하 씨 가문은 이혼을 감당할 수 없어!’
  • ‘그리고 하린은, 더더욱 이혼을 원하지 않을 거야!’
  • 하린의 눈에 비친 이로한이 문득 낯설어졌다. 그녀는 순간 목이 메었고, 갑작스럽게 귀가 울리기 시작했다. 보청기를 끼고 있어도 이로한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 하린은 방금 그가 던진 질문에 제멋대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 이로한이 무슨 이상한 점을 눈치챌까 두려워, 하린은 서둘러 서재를 나섰다.
  • 이로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불쾌함에 사로잡혔다. 평소 다른 사람들 때문에 감정을 억누르는 성격이 아니었던 그는 그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앞에 있던 책상을 거칠게 엎어버렸다.
  • 하린이 정성스럽게 끓여놓은 국이 바닥에 쏟아져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