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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사랑이 뭔지

  • “너는 아마 지금까지도 사랑이 뭔지 느껴보지 못했겠지? 그거 알아? 로한은 나랑 만나고 있을 때, 직접 내게 요리를 해주기도 했어. 내가 아프면 가장 먼저 달려와 주기도 했고. 로한이 내게 했던 가장 따뜻한 말이 뭔지 알아?”
  • “은별아, 나는 네가 영원히 행복했으면 좋겠어…”
  • “린, 로한이 너한테 사랑한다고 말한 적 있어? 예전에 로한은 나한테 자주 말했거든. 그런데 난 늘 유치하다고 생각했어…”
  • 하린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지난 3년 동안 이로한과 함께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 그는 단 한 번도 부엌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 그녀가 아팠을 때도, 한 마디의 걱정조차 건네지 않았었다.
  • 그리고 사랑?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 하린은 고요한 눈빛으로 은별을 바라보았다.
  • “이제 말 다 했니?”
  • 원은별은 잠시 멍해졌다.
  • 하린이 너무나도 평온해서일까,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마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해서일까.
  • 하린이 떠난 후에도, 원은별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왜일까, 그 순간 원은별은 마치 다시 과거로 돌아간 듯했다. 하 씨 가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고아의 모습으로.
  • 하 씨 가문의 아가씨 뒤에서, 자신은 영원히 조롱당하는 광대에 불과했다.
  • 하린이 원은별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없었을까?
  • 그녀가 12년간 쫓아다녔던 남자, 자신이 사랑했던 그 남자가, 한때는 아이처럼 다른 사람을 뜨겁게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 그걸 알게 된 순간 하린의 마음도 무너졌다.
  • 귀에서 다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린은 조용히 손을 들어 보청기를 뺐다. 그제야 보청기에 붉은 피가 묻어 있는 걸 발견했다.
  • 익숙하게 보청기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그것을 옆에 내려놓았다.
  • 잠이 오지 않았다.
  • 하린은 핸드폰을 켜고 메신저 앱을 열었다.
  • 그런데 알림창에 그녀를 태그한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 확인해보니, 전부 원은별이 그녀만 볼 수 있게 올린 사진들이었다.
  • 첫 번째 사진은 대학 시절 원은별과 이로한의 다정한 투샷이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데, 이로한의 눈매가 너무나도 부드러웠다.
  • 두 번째 사진은 두 사람의 대화 기록이었다. 이로한은 다정하게 “별아, 생일 축하해. 내가 널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줄게.”라고 말했다.
  • 세 번째 사진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해변을 함께 걷는 뒷모습이었다.
  •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사진… 셀 수 없이 많은 사진들이 하린의 가슴을 짓눌렀다.
  •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 하린은 더 이상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서둘러 핸드폰을 껐다.
  • 그 순간,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이제는 포기해야 할 때라는 것을.
  • 그날, 하린은 자신의 비밀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 ——나는 원래 어둠을 견딜 수 있었다. 단, 빛을 보지 않았다는 전제하에서.
  • 다음 날, 그녀는 여느 때처럼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 그러나 시계가 여섯 시를 넘기고도 이로한이 돌아오지 않자, 그제야 하린은 그가 더 이상 아침을 먹으러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을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 이로한이 이제 완전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하린은 혼자 소파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잠시 졸았다.
  • “아침 준비하지 말라고 했잖아.”
  • 불만 섞인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 하린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이로한이 짜증스럽게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사과했다.
  • “미안해, 내가 깜빡했어.”
  • 또다시 깜빡했고, 또다시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 이로한은 돌아서서 하린을 바라보았는데, 그 시선은 유난히 차가웠다.
  •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연한 회색의 수수한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돈이 없어서 그녀를 학대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 “어떻게 돌아오는 건 안 잊었냐? 내가 너랑 결혼했다는 건 왜 안 잊었어? 왜 너 자신은 안 잊었는데?”
  • “놓기 싫어서지? 이 씨 가문의 돈을 놓기 싫은 거야! 내가 벌어오는 돈, 그게 아까운 거겠지!”
  • 그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하린의 가슴을 찔렀다.
  • 하린은 눈을 떨구었다.
  • “로한, 난 한 번도 당신의 돈을 바란 적 없어.”
  • 그녀가 진정으로 바라왔던 것은 이로한이라는 사람뿐이었다.
  • 그러나 이로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엔 조롱이 가득했다.
  • “그럼 네 어머니가 오늘 아침 내 회사로 와서, 너에게 아이 하나 만들어 달라고 애걸한 건 뭐냐?”
  • 하린은 순간 얼어붙었다.
  • 이로한의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한 그녀는 그가 어젯밤 일로 화를 내는 게 아니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 이로한은 더 이상 말을 길게 할 생각도 없었다.
  • “하린, 네가 이 씨 가문에서 계속 잘 지내고 싶으면, 하 씨 가문이 무너지지 않게 하고 싶으면, 네 어머니가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해.”
  • 그는 간단하게 말만 남기고, 서둘러 서재로 가서 필요한 물건을 챙긴 뒤 옷을 갈아입고 집을 떠났다.
  • 하린이 최은영을 찾기도 전에, 최은영이 먼저 찾아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그녀의 태도는 부드러웠다. 하린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 “린, 네가 로한에게 부탁해. 아이 하나만 갖자고 말이야. 설령 의학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 의학적인 방법?
  • 하린은 멍하니 최은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원은별이 엄마한테 다 말했어. 이 3년 동안 로한이 너를 한 번도 건드린 적 없다고.”
  • 그 말은 하린의 마음을 짓누르는 마지막 한 방울이었다.
  • 이 세상에 타인의 고통을 진정으로 공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각자의 이익만이 있을 뿐이었다.
  • 하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로한이 이런 일을 원은별에게 털어놓았을까?
  • 아마 그는 정말로 원은별을 사랑하고 있는 거겠지…
  •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녀는 오히려 마음이 개운해졌다.
  • “엄마, 이제 그만하세요.”
  • 최은영은 순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하린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 “뭐라고 했니?”
  • “저… 이제 지쳤어요. 이로한이랑… 이혼하고 싶어요.”
  • “팍!”
  •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은영의 손이 하린의 얼굴을 세차게 후려쳤다.
  •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는 하린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혼을 말해? 이 씨 가문에서 벗어나면, 넌 건강도 온전치 못한 데다가 재혼인데 대체 누구한테 시집을 갈 수 있을 거 같아?!”
  • “어떻게 내 딸이 이 모양이니! 넌 나랑 하나도 닮지 않았어! 차라리 널 데려오지 말 걸 그랬어!”
  • 하린은 마치 감각을 잃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 어릴 적부터, 최은영은 그녀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 최은영은 유명한 무용가였다.
  • 그러나 하린은 태어날 때부터 청력이 약했다. 그 사실은 평생토록 최은영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 그래서 그녀는 매정하게도 하린을 보모에게 완전히 맡겨 버렸다. 공부할 나이가 되어서야 하 씨 가문으로 하린을 다시 데려왔다.
  • 어릴 적, 하린은 선생님께 어떤 어머니도 자신의 아이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 그래서 하린은 어머니에게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 비록 난청이 있었지만, 그녀는 무용, 음악, 서화, 언어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 하지만 지금에서야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최은영의 마음속 완벽한 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 마치 최은영이 늘 말하던 것처럼, 그녀는 ‘온전치 못한 사람’이었다.
  • 온전치 못한 것은 단지 몸뿐만이 아니었다. 가족 간의 정, 사랑… 모든 것이 그랬다.
  • 최은영이 떠난 뒤, 하린은 거울 앞에 서서 얼굴에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을 파운데이션으로 가렸다. 그런 다음, 홀로 차를 타고 변호사 사무소로 향했다.
  • 사무실 안에서, 하 회장이 생전에 신뢰하던 법무 담당자 장명철은 하린이 건넨 위임장을 받아 들여 차분히 살펴본 뒤,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정말로 하 회장님께서 몰래 남겨주신 유산을 전부 이로한에게 넘기려는 거야? 너도 알다시피, 그 사람에게는 이 돈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아.”
  •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아요. 하지만 이건 내가 그 사람에게 진 빚이에요. 반드시 갚아야 해요.”
  • 3년 전, 하 회장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 생전에 그는 세 개의 유언장을 미리 준비해 두었고, 하린이 최은영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장 변호사에게 마지막 유언장을 하린에게만 비밀로 전하도록 했다.
  • 그 마지막 유언장에는 하린이 결혼 후 3년이 지나, 행복하지 않거나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을 때 그 유산을 사용할 수 있도록 명시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