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어린 집착
산딸기 롤
Last update: 2025-04-30
제1화 사기 결혼
- 청명, 빗줄기는 끊임없이 쏟아졌다.
- 병원 입구.
- 하린은 바람에 날아갈 듯한 가녀린 몸으로 병원에서 받아든 임신 검진 결과지를 꼭 쥐고 있었다. 그 위에는 임신하지 않았다는 결과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 “결혼한 지 3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임신을 못 했다고?”
- “도대체 넌 왜 이렇게 쓸모없는 거니? 이러다 정말 임신 못 하면 이 씨 가문에서 쫓겨날 거야. 그땐 우리 하 씨 가문은 어쩌라고?”
- 하린의 어머니, 최은영은 하이힐을 신은 채 화려하게 차려입고는 하린을 손가락질하며 실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 하린은 텅 빈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가슴에 얹힌 말들이 모두 막혀 버렸고, 결국 한마디로 응축되었다.
- “죄송해요.”
- “엄마는 죄송하다는 말이 듣고 싶은 게 아니야. 네가 이로한에게 아이를 낳아줘야 한다고! 내 말 이해해?”
- 하린은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결혼한 지 3년, 남편 이로한은 한 번도 그녀를 건드린 적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아이가 생길 수 있단 말인가?
- 최은영은 하린의 연약하고 무력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강인한 성격과는 전혀 닮지 않은 딸을 보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차가운 말을 남겼다.
- “네가 정말로 안 되겠다면, 로한이 바깥에서 여자를 찾게 도와줘라. 그럼 로한도 너한테 고마워할 거야.”
- 하린은 멍하니 최은영이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친어머니가, 남편에게 다른 여자를 찾아주라고 말하다니.
- 차가운 바람이 스치며 하린의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하린의 머릿속엔 최은영이 떠나며 남긴 마지막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귀에는 갑작스런 이명이 울려 퍼졌다.
- 하린은 자신의 상태가 다시 악화되었음을 직감했다.
- 그때, 휴대폰에서 문자가 도착했다. 이로한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리고 메시지 내용은 3년 내내 변함없는 딱 한마디였다.
- “오늘 밤, 안 들어가.”
-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이로한은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물론, 하린을 건드린 적도 없었다.
- 하린은 아직도 3년 전, 신혼 첫날 밤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 “너희 하 씨 가문이 감히 사기 결혼을 했으니, 넌 이제 평생 혼자 외로이 늙어갈 각오나 해.”
- 평생 혼자 외로이 늙어간다라…
- 3년 전, 하 씨 가문과 이 씨 가문은 사업적 이익을 위해 결혼을 약속했다. 양측 모두 이미 이득을 나누기로 합의된 상황이었다.
- 하지만 결혼식 당일, 하 씨 가문은 돌연 태도를 바꿔 모든 자산을, 심지어 이로한이 하린에게 준 2천억이 넘는 돈까지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버렸다.
- 이 생각이 떠오르자, 하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늘 그랬듯이 이로한에게 간단하게 ‘알겠어’라고 답장을 보냈다.
-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임신 확인서는 어느새 구겨져 있었다.
- 집에 도착한 하린은 그 종이를 무심히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 매달 이맘때면 하린은 유독 피로가 몰려왔다.
- 저녁을 준비할 힘조차 없어 소파에 기대 잠시 쉬고 있었다. 반쯤 잠들고 반쯤 깨어 있는 상태였다.
- 그녀의 귀에는 항상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때문에 이로한이 그녀를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난청이 있었고, 그런 신체적 결함은 재벌가에서는 장애로 여겨졌다.
- 그런 그녀에게 이로한이 아이를 허락할 리가 없었다.
- 벽에 걸린 유럽풍의 커다란 시계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 새벽 다섯 시.
- 한 시간 후면 이로한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 하린은 자신이 소파에서 밤을 지새웠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 하린은 서둘러 일어나 이로한의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단 1분 1초라도 늦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 이로한은 일에 있어서나 시간에 있어서나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 한 번은 하린이 아버지의 장례식에 다녀오느라 아침 식사 준비를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 이후로 그는 한 달간 그녀에게 단 한 통의 문자도 보내지 않았고, 말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 정확히 6시, 이로한이 집으로 들어섰다.
- 이탈리아제 맞춤 정장을 입은 그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단정했다. 키는 크고 날렵한 체격에, 억제된 기품을 지닌 이로한은 수려한 이목구비 속에서도 남성적인 매력을 잃지 않았다.
- 하지만 하린의 눈에 비친 그는 차갑고, 멀게만 느껴졌다.
- 이로한은 하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곧바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 “앞으로는 아침 준비할 필요 없어.”
- 하린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
- 본능에서 나온 건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한 말은 어쩐지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한 비굴함이 묻어 있었다.
- “내가 뭘 잘못했어?”
- 이로한은 고개를 들고, 3년 내내 변함없이 무미건조한 하린의 얼굴을 마주했다. 얇은 입술이 가볍게 열렸다.
- “내가 원하는 건 아내지, 가정부가 아니야.”
- 3년 동안, 하린은 줄곧 흐린 회색 계열의 옷만 입었고, 문자에 답할 때도 늘 똑같이 ‘알겠어’라는 말만 했다.
- 솔직히 말하자면, 상업적 결혼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하 씨 가문의 기만이 아니었다면 이로한은 절대 이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 하린은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너무 부족한 사람이었다.
- ‘내가 원하는 건 아내지, 가정부가 아니야!’
- 그 말이 귓가에 다시 맴도는 듯, 하린의 귀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 그녀는 목이 메어 말을 잇기 어려웠지만, 결국 이로한이 가장 싫어하는 그 말을 또다시 내뱉고 말았다.
- “알겠어.”
- 이로한은 갑자기 마음이 유난히 답답해졌다. 그가 가장 좋아하던 아침 식사조차 밍밍하고 맛없게 느껴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짜증스럽게 의자를 밀치고 나가려 했다.
- 하지만 그 순간, 하린이 어디서 났는지 모를 용기로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 “로한, 당신… 좋아하는 사람 있어?”
- 뜻밖의 질문에 이로한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달라졌다.
- “그게 무슨 소리야?”
- 하린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로한은 단지 결혼한 지 3년 된 남편이 아니었다. 하린이 12년 동안 쫓아다니고, 사랑했던 남자였다.
- 하지만 지금은…
- 하린은 목구멍에 차오르는 서러움을 억누르며, 어머니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로한, 만약 당신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함께해도 돼…”
-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로한이 차갑게 말을 끊었다.
- “정신 나갔군.”
- …
- 결국 인생이란 계속해서 무언가를 내려놓는 과정일 뿐이다.
- 이로한이 떠난 후, 하린은 홀로 베란다에 앉아 창밖의 쓸쓸한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12년을 사랑하며 그를 동경해왔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이로한을 이해하지 못했다.
- 빗소리는 때로는 또렷하게, 때로는 흐릿하게 들려왔다.
- 한 달 전,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 “하린 씨의 청신경과 중추 신경에 병변이 발생해서 현재 청력이 다시 악화되고 있습니다.”
- “치료할 방법은 없는 건가요?”
-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 “오랜 시간 지속된 신경성 난청은 약물 치료를 해도 뚜렷한 효과가 없습니다. 제 권유는 계속 보청기를 착용하면서 청각 재활을 진행하는 겁니다.”
- 하린은 의사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치료할 방법은 없다는 뜻이었다.
- 하린은 조용히 보청기를 떼어냈다.
- 그 순간, 그녀의 세상은 완벽한 정적에 휩싸였다. 이토록 고요한 세상이 익숙하지 않아서, 하린은 거실로 가서 TV를 켰다.
- 볼륨을 최대로 올렸지만, 간신히 들리는 미약한 소리만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
- 우연의 일치인지, TV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팝스타 원은별의 귀국 인터뷰가 방영되고 있었다.
- 하린은 손에 쥔 리모컨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원은별이 이로한의 첫사랑이었기 때문이다.
- 오랜 세월이 지나도, 원은별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한없이 여유로웠다. 과거, 하 씨 가문의 지원을 받기 위해 찾아왔던 그 수줍고 자존감 낮던 신데렐라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 원은별은 기자들이 귀국 이유를 묻자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대답했다.
- “이번에 돌아온 이유요? 제 첫사랑을 되찾기 위해서예요.”
- 리모컨이 손에서 떨어져 바닥에 부딪혔다.
- 하린의 마음도 덩달아 무겁게 가라앉았다.
- 창밖의 빗소리는 점점 더 거세졌다.
- 인정해야만 했다. 하린은 두려웠다. 원은별이 이로한을 빼앗아 갈까 봐.
- 그 시절, 그녀는 하 씨 가문의 귀한 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배경도 없던 원은별에게 밀렸다.
- 이제 원은별은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팝스타가 되어 자신감 넘치고 밝은 사람으로 변했으니, 더더욱 비교할 수 없게 되었다.
- 하린은 마음이 어지럽게 뒤엉킨 채로 급하게 TV를 껐다. 그러고는 손도 대지 않은 아침 식사를 치우기 위해 부엌으로 갔다.
-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이로한이 핸드폰을 두고 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하린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고, 실수로 화면을 켰을 때 미처 읽지 않은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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