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꺼져
- 주변이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 그녀는 또다시 집으로 가는 길을 잊어버린 것이다.
- 핸드폰을 꺼내 길을 찾으려 했지만,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자신이 사는 곳의 이름을 겨우 떠올렸다.
- 연시온은 계속해서 그녀를 뒤따르고 있었다. 방금 이로한이 떠난 후 하린이 혼자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걱정이 들었다.
- “하린.”
- 하린은 본능적으로 이로한이 돌아온 줄 알았다.
- 눈빛에 잠시 기대감이 스쳤지만, 돌아서자마자 그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 연시온이 그녀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 “정말 날 기억 못 해?”
- 하린은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가 누구인지 떠올릴 수 없었다.
- “뚱이, 기억 안 나?”
- 연시온이 힌트를 주자, 하린은 그제야 기억해냈다. 어릴 적 임영숙을 따라 시골에서 지낼 때 알게 된 친구, 뚱이.
- 그때 연시온은 아주 뚱뚱했고, 키도 그녀보다 작았다. 하지만 지금 그는 190cm가 넘는 큰 키에, 얼굴도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 “생각났어. 너 정말 많이 변했구나, 내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 타향에서 옛 지인을 만나는 것은 기쁜 일이라 할 수 있지만, 여자가 억지로 지어 보인 옅은 미소를 보며, 연시온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 “가자,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 연시온은 하린을 집에 데려다주다가, 그녀가 머무는 곳이 낡고 허름한 여관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 이 씨 가문 같은 대단한 집안에서, 아무리 이혼을 한다 해도 그녀가 이런 처지에 놓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하린은 다소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 “민망하네. 여기 사는 걸 영숙 아주머니께 절대 말하지 마. 걱정하실까 봐…”
- 연시온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 시간이 너무 늦었다.
- 그는 더 이상 여기 머물러 있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하며, 내일 다시 보러 오겠다고 말한 후 자리를 떠났다.
- 연시온이 여관을 나설 때, 그는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무광택 검은색 캐딜락을 눈치채지 못했다.
- 하린에게는 사실 어디에 사느냐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 연시온이 떠난 후, 그녀는 술을 마셔서인지 위가 몹시 불편했고, 머리도 어지러웠다.
- 그때 머릿속에서 이로한의 말이 계속 울려 퍼졌다.
- “귀신같이 화장을 하고서는!”
- “너 같은 여자를 어느 남자가 좋아하겠어?”
- 그녀는 얼굴에 한 화장과 입술에 발린 립스틱을 세게 문질러 닦아냈다. 그 과정에서 창백했던 얼굴은 붉게 부어올랐다.
- 그녀는 자신이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한동안 관련 정보를 검색했었다.
- 우울증은 뇌 손상을 초래할 수 있으며, 기억력 저하뿐만 아니라 인지 기능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사람은 자꾸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생각을 점점 더 부풀리게 된다…
- “쿵! 쿵!!”
-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 하린은 연시온이 다시 돌아온 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러 갔다.
- 문이 막 열리자마자, 이로한이 하린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그녀의 가녀린 손목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 “하린! 너 정말 대단하군!”
- 이로한은 문을 쾅 닫으며 그녀를 거칠게 소파 쪽으로 이끌었다.
- “벌써 다음 상대를 정해뒀던 거야? 그러니 그렇게 쉽게 나를 포기할 수 있었던 거였군!”
- 그는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
- 남자의 말은 마치 날카로운 칼처럼 가슴을 후벼팠다.
- 하린은 그가 연시온을 보고 오해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 이해할 수 없었다.
- ‘왜 넌 첫사랑을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데?’
- 하린은 분노를 터뜨리는 이로한을 똑바로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 “우리 둘 다 별반 다를 게 없잖아요.”
- 하 씨 가문은 사기 결혼을 했고, 이로한은 그녀를 무심하게 3년 동안 방치한 채,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 ‘누가 더 고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이로한은 오늘도 술을 좀 마셨는지, 온몸에 술 냄새가 풍겼다.
- 그는 하린의 턱을 거칠게 잡아채며, 눈가가 붉어지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 “그놈은 누구야?”
- “언제부터 알고 지낸 거지?”
- 하린은 이런 이로한의 모습을 처음 봤고 문득 웃음이 터져 나왔다.
- “당신, 질투하는 거예요?”
- 이로한의 눈동자가 순간 날카로워졌지만, 곧 냉소를 지었다.
- “네가 자격이나 되나?”
- 하린은 목이 메었다.
- 이로한은 갑자기 몸을 가까이 밀착시키며, 그녀의 귀 옆에서 거칠게 다시 물었다.
- “그 자식이 이미 널 건드렸어? 응?”
- 결혼한 지 3년, 이 씨 가문의 규율 때문에 하린은 직장을 포기하고, 가끔 친구들이 불러도 항상 거절했다.
- 그런데 지금 이로한은 그녀를 의심하고 있었다.
- 그 순간, 하린은 갑자기 마음이 한결 편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 그녀는 되물었다.
- 이로한은 화가 완전히 폭발한 듯, 뜨거운 손이 그녀의 몸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 하린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은 듯,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믿기지 않았다.
- 그녀는 거부하고, 저항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 마지막 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로한은 마치 정신이 돌아온 듯 차분해졌다.
- 밖에서는 아침 해가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 이로한은 여위어 버린 하린을 바라보다가, 침대 시트 위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붉은 자국을 보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 “철썩!”
- 하린은 손을 들어 그의 잘생긴 얼굴을 서슴없이 후려쳤다.
- 이 한 번의 따귀로, 그녀는 과거에 가졌던 사랑에 대한 모든 환상을 산산이 깨뜨렸다.
- 하린의 귀는 고막이 터질 듯 울렸고, 이로한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의 말을 끊고 단호하게 외쳤다.
- “꺼져!”
- 이로한은 어떻게 방을 나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 머릿속엔 온통 지난밤의 기억들만 떠올랐다.
- 차에 올라타자마자 그는 비서 허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 “하린이 아는 남자들 좀 조사해봐.”
- 허민혁은 순간 당황했다.
- 하린은 결혼하고 나서 이 대표님만 보고 살았는데, 다른 남자를 알 리가 있겠는가?
- …
- 여관방 안.
- 이로한이 떠난 후, 하린은 자신의 몸을 몇 번이고 씻어냈다.
- 이제 이혼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부부로서의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우습고, 동시에 비참했다.
- 아침 9시쯤, 연시온이 아침 식사를 가져왔지만, 하린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 “어젯밤에 너무 급히 가서 말하는 걸 잊었어. 우리 집에 딱 하나 비어 있는 집이 있는데, 네가 거기서 지내도 돼.”
- “여자 혼자 여관에 있는 건 위험하잖아.”
- 하지만 하린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 사람의 호의는 가장 갚기 어려운 빚이다. 그녀는 남에게 빚지고 싶지 않았다.
- 연시온은 하린이 거절할 줄 알고 있었다.
- “어차피 빈집인데, 네가 가서 살아. 내가 너한테 월세를 안 받을 것도 아니잖아.”
- “하지만, 난 기껏해야 한 달밖에 못 있어.”
- “한 달이면 한 달이지. 아무도 안 사는 것보다 낫잖아.”
- 연시온은 그녀가 왜 한 달만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지 알지 못했고, 앞으로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다.
- 그는 차로 하린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 하린의 짐은 단출했다. 단 하나의 작은 여행 가방뿐, 그 외엔 다른 짐이 없었다.
- 차에 올라탄 후, 연시온과 하린은 어릴 적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연시온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털어놓았다.
- “고등학교 졸업 후 해외로 나갔어. 성인이 되고 나서는 외국에서 일하며 공부도 했지. 스무 살 때는 창업해서 내 회사를 세웠고, 지금은 그래도 꽤 성공한 편이야.”
- 하린은 연시온의 화려한 이력을 들으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 ‘난 졸업 후 바로 이로한과 결혼해 가정주부로 살고 있는데…’
- 그녀는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연시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 “정말 대단하구나.”
- “너도 할 수 있어. 네가 마을을 떠난 후에도 나는 계속 너를 주목하고 있었어. 네가 TV에 나오는 걸 봤거든. 청소년 피아노 대회에서 1등도 했고… 그리고 노래도 불렀지? 너 그거 알아? 그때 너는 나의 롤모델이었어…”
- 연시온은 하린에게 다 말하지 않았다.
- 그가 혼자 외국에서 공부를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삶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많은 잘못된 길로 빠졌고, 자포자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 그러다 우연히 국내에서 하린의 신문 기사를 보게 되었다. 청각 장애를 타고난 사람에게는 음악이라는 길이 처음부터 닫혀 있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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