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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한 달의 시간을 주세요

  • 하린은 오른쪽 귀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그녀는 그 자리에서 굳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 최은영은 이렇게 나약하고 무능한 딸을 바라보며, 스스로가 비참하게 느껴졌다.
  •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고, 하린의 앞에 내밀었다.
  • “잘 보렴.”
  • “엄마가 너를 위해 준비한 길이야.”
  • 하린은 서류를 받아들고, 그 위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혼전 계약서’라는 다섯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 서류를 펼쳤다.
  • “…하린 양은 자발적으로 임지용 씨의 아내가 되어, 임지용 씨를 평생 돌보고 떠나지 않는다…”
  • “…임지용 씨는 하린 양의 친정, 즉 하 씨 가문의 미래를 보장하고, 하 씨 가문에 300억 원을 제공한다…”
  • 임지용, 도주의 늙은 기업가, 현재 나이 일흔여덟.
  • 하린의 머릿속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 최은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임 대표가 그러더구나. 네가 이혼한 건 상관하지 않겠대. 그저 네가 임 대표와 결혼하기만 하면, 하 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워줄 거라 했어.”
  • 최은영은 간절한 눈빛으로 하린을 바라보며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착한 딸, 너 엄마랑 네 동생을 실망시키진 않을 거지, 그렇지?”
  • 하린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 그녀는 손에 쥔 계약서를 더욱 꽉 움켜쥐었다.
  • “나랑 이로한은 아직 완전히 이혼한 게 아니에요.”
  • 최은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 “임 대표가 그랬어. 일단 결혼식부터 올리고, 그다음에 서류 정리하면 된다고.”
  • “어차피 이로한도 너를 사랑하지 않잖니. 엄마는 네 선택을 존중해. 네가 이혼하겠다고 하면 허락할게.”
  • 하린과 이로한의 결혼 생활이 회복될 수 경지에 이르렀다는 걸 알게 된 최은영은 아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아직 젊은 딸을 마지막으로 최대한 활용해보려는 속셈이었다.
  • 하린은 그 말을 들으며, 목구멍에 솜덩어리가 가득 찬 것처럼 답답함을 느꼈다.
  •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 “저… 정말 엄마의 친딸인가요?”
  • 최은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 그동안 애써 유지해온 온화한 표정은 사라지고, 그녀는 하린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 “너를 낳지 않았다면, 내가 몸매가 망가졌을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용가 자리에서 떨어졌겠니? 정말 넌 나를 이렇게 실망시키는구나!”
  • 어릴 때부터 하린은 늘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다른 사람들의 엄마는 아무 조건 없이 자식을 사랑하는데, 자신의 엄마는 단 한 번도 사랑을 베풀지 않는지.
  •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 하지만 이제 한 가지는 분명히 깨달았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바라지 않기로.
  • 하린은 계약서를 정리해 넣으며 말했다.
  • “저는 그럴 수 없어요.”
  • 최은영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녀는 즉시 분노했다.
  • “네가 무슨 자격으로 거절해? 네 목숨도 내가 준 거야!”
  • “내가 하라면 넌 하란 말이야!”
  • 하린은 그 말을 듣고, 똑바로 최은영을 바라보았다.
  • “그럼 제 목숨을 돌려드리면, 이제 빚진 건 없는 거겠죠?”
  • 최은영은 다시 한번 멍해졌다.
  • “너, 지금 뭐라고 했니?”
  • 하린은 핏기 없는 입술을 살짝 열었다.
  • “제가 목숨을 돌려드리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제 어머니가 아니겠죠? 저는 더 이상 생명의 은혜를 갚을 필요도 없을 거고요.”
  • 최은영은 전혀 믿지 않는다는 듯 차갑게 비웃었다.
  • “좋아.”
  • “네가 목숨을 내놓기만 하면, 내가 너에게 강요하지 않겠어!”
  • “하지만, 네가 과연 그럴 용기가 있을까?”
  • 하린은 마치 결심을 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 “한 달의 시간을 주세요.”
  • 최은영은 하린이 미쳤다고 느꼈다. 그녀는 계약서를 하린 앞에 다시 밀어넣었다.
  • “죽을 용기가 없으면, 그 위에 서명이나 해.”
  • 말을 마치고, 그녀는 하이힐을 신은 채 밖으로 나갔다.
  • 아들 하민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대화를 모두 들은 상태였다.
  • 그는 최은영에게 물었다.
  • “엄마, 쟤 진짜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거 아니겠지?”
  • 최은영의 얼굴에는 한 치의 감정도 없이 냉랭했다.
  • “쟤가 정말 죽는다면, 내가 존경해주겠어! 어차피 어릴 때부터 보모 손에 컸잖아. 나랑은 정이 없으니, 딸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어.”
  • 그들은 멀리 가지 않았고, 그 말은 분명하게 하린의 귀에 들려왔다.
  • 하린은 아픈 귀를 두드리며, 가끔은 정말로 귀머거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 그녀는 혼자 벽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 하린은 문득 자신의 인생이 너무나도 실패한 것 같았다. 마치 한 번도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 억눌린 감정이 극에 달하자, 그녀는 그것을 풀어낼 곳이 필요했다.
  • 그날 밤, 하린은 술집에 갔다.
  • 그녀는 구석에 앉아 술을 마시며, 흥겹게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눈매가 매력적인, 잘생긴 남자가 혼자 있는 하린을 눈여겨보고 다가왔다.
  • “너, 하린 맞지?!”
  • 하린은 그를 바라보며,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얼떨결에 질문을 던졌다.
  •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요?”
  • 그 남자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 “뭐라고?”
  • 하린은 술을 마시며 대답했다.
  • “의사 선생님이 그러더군요. 내가 병에 걸렸대요. 그래서 행복해져야 한다는데… 난 도무지 행복할 수가 없어요…”
  • 이 말을 들은 연시온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 ‘하린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게다가, 무슨 병이길래 행복해져야 한다는 거지?’
  • “아가씨, 행복해지고 싶으면 이런 데 오면 안 되죠.”
  •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
  • 그는 다정하게 말했다.
  • 하린은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당신 정말 좋은 사람이네요.”
  • 연시온은 하린의 쓴웃음을 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가 너무나도 슬퍼 보였다.
  • 한편, 이로한도 그곳에 있었다.
  • 지난번 하린과 이혼 절차를 마친 이후, 그는 매일 밤 자신을 방치한 채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 늦은 밤, 일행이 막 떠나려던 그때.
  • 원은별이 구석에 앉아 있는 익숙한 모습을 눈치채고 깜짝 놀랐다.
  • “저기, 하린 아가씨 아니야?”
  • 이로한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하린 앞에 앉아 그녀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이로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남자까지 끌어들이다니.
  • 이로한은 그동안 하린을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그녀도 그저 그런 여자일 뿐이었다.
  • ‘예전에 평생 나만 사랑하겠다고 말한 그 사람은 누구였지?’
  • “로한, 가서 물어볼까?”
  • 원은별이 물었다.
  • “그럴 필요 없어.”
  • 이로한은 냉정하게 대답하고는 빠르게 그곳을 떠났다.
  • 한편, 하린은 연시온의 배웅을 거절하며 말했다.
  •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괜히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 연시온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녀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뒤따라갔다.
  • 이로한은 차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셔츠의 위쪽 단추 두 개를 풀었지만, 여전히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차가 도로 중간쯤을 달릴 때, 그는 갑자기 운전사에게 다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 그때 마침, 돌아가는 하린과 마주쳤다.
  • 이로한은 차를 멈추게 하고 빠르게 내려 하린에게 다가갔다.
  • “하린.”
  •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하린은 취기가 반쯤 가시며 정신이 들었다.
  •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로한을 바라보며,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로한…”
  • 그렇게 부르고는 곧바로 말을 고쳤다.
  • “이 대표님.”
  • 이로한은 가까이 다가와서야 오늘 하린이 연하게 화장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둘이 결혼한 이후로 하린은 한 번도 화장을 하지 않았었다.
  • 그는 자신이 예전에 ‘여자가 화장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걸 잊고 있었다.
  • “지금 네 모습이 어떤지 알기나 해?”
  • 이로한의 얇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 하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 이로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귀신같이 화장을 하고서는!”
  • “너 같은 여자를 어느 남자가 좋아하겠어?”
  • 하린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쉰 상태였다.
  • “저도 알아요. 아무도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 “저도 이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바라지 않아요…”
  • 이로한은 갑작스럽게 마음이 답답해졌다.
  • “다른 일이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
  • 하린은 앞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 이로한은 원래 그 남자가 누구인지 물어보려고 했었다.
  •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려던 말은 금세 삼켜버렸다.
  • 어차피 두 사람은 곧 이혼할 텐데, 굳이 물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 하린은 홀로 길을 걷다가, 중간쯤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