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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가족

  • 평소에는 보청기를 끼지 않아도 작은 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었다.
  • 하린은 손을 더듬어가며 일어나,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약을 집어들고 입에 넣었다. 약은 쓰고 떫었다.
  • 어제 3년 동안 살았던 비스타 하우스를 떠난 뒤, 그녀는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 하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현관문 너머로 어머니와 동생 하민의 대화가 들려왔다.
  • “내가 왜 그때 쓸모없는 딸을 낳아서… 3년이나 지났는데 이로한이 그 애를 거들떠보지도 않잖아!”
  • “지금까지 완전한 여자로 인정받지도 못했으면서, 감히 이혼할 생각을 하고 있어?”
  • 최은영의 분노에 찬 말들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하린의 가슴을 깊숙이 찔러댔다.
  • 하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눈에 ‘완전한 여자’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 남편의 사랑을 받는 것일까? 아니면 자녀를 낳는 것일까?
  • 동생 하민의 말은 더욱 상처가 되었다.
  • “누나는 우리 하 씨 가문의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밖에서 들었는데, 이로한의 첫사랑이 돌아왔대. 이혼하지 않더라도 누나는 쫓겨날 거야.”
  • “그렇게 될 바에야, 우리도 차라리 미래를 준비하는 게 낫겠지. 요즘 임 대표 부인이 죽었다며? 누나는 청력이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 80대 노인하고는 딱 어울리지 않겠어?”
  • 들었던 말들을 떠올리며, 하린의 눈은 공허했다.
  • 그녀는 최대한 그 말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 핸드폰을 집어 들었더니, 읽지 않은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 본능적으로 이로한이 보낸 것이라 생각했지만, 확인해보니 발신인은 장 변호사였다.
  • 장명철은 이런 문자를 보내왔다.
  • “린, 내가 재산 양도 계약서를 이로한에게 넘겼어. 그런데 이로한의 반응이 좋지 않더군. 앞으로는 너 자신을 더 생각해야 해.”
  • 하린은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도 그럴게요.”
  • 문자를 보내고 나서, 하린은 잠시 멍해졌다.
  •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이 가진 재산을 이로한에게 돌려주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 단지 이로한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싶지 않았을 뿐…
  •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혼 전 약속했던 만큼의 재산은 준비하지 못했다. 아마도 평생, 그녀는 ‘사기 결혼’이라는 죄명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하린은 배가 고프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 다만, 주변이 너무나도 고요했다.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 ‘난 보청기도 끼고 약도 먹었는데, 왜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까?’
  • 혹시 이로한이 이혼 일정에 대해 전화라도 하면, 자신이 듣지 못할까 봐 불안했다.
  • 그녀는 택시를 타고 근처 병원으로 갔다.
  • 의사는 기본적인 검사를 진행했는데, 하린의 귓속에서 마른 핏자국이 발견되었다.
  • 그날, 의사는 그녀에게 회복 치료를 해주었고, 하린의 청력이 겨우 돌아오기 시작했다.
  • “어떻게 된 겁니까? 이 병을 앓은 지 얼마나 됐어요?”
  • 하린은 솔직히 대답했다.
  • “저는 태어날 때부터 난청이 있었어요.”
  • 의사는 눈앞에 있는, 이제 막 20대 초반에 들어선 젊은 여자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병을 앓고 있다고는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그녀는 건강해 보였기 때문이다.
  • 의사는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 “아가씨, 솔직히 말할게요. 이 병이 더 악화되면, 정말로 청력을 잃을 수도 있어요.”
  • “나중에는 보청기를 껴도 소용없을 겁니다.”
  • 하린의 눈빛에 남아 있던 희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목에 마치 솜뭉치가 걸린 듯, 위아래로 삼킬 수도 없었다.
  •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의사는 다시 문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 “혼자 왔어요? 가족이나 친구들은 없나요?”
  • 가족?
  • 하린은 자신을 끊임없이 무시하는 최은영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을 나이 든 남자와 결혼시키려는 동생 하민,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전히 처음처럼 자신을 싫어하는 남편 이로한까지 생각났다.
  • 마지막으로 그녀의 기억은 아버지가 떠나시던 순간의 애틋한 표정에서 멈췄다.
  • “아빠는 떠나기 싫어… 아빠가 떠나면, 우리 린은 어떻게 살까…”
  • 하린은 그제야 깨달았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온몸에 온갖 의료 장비가 꽂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차마 떠나지 못했던 이유를.
  • ‘아버지가 떠나면, 이제 나에겐 가족이 없다는 걸 아셨기 때문이었구나…’
  • 하린은 목구멍에 차오르는 쓰라림을 꾹 참으며, 마침내 의사에게 말했다.
  • “돌아가셨어요.”
  • 병원을 나설 때, 밖에는 다시 부슬부슬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 도주는, 올해 비가 유난히 더 자주 내리는 것 같다.
  • 병원 입구에는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삼삼오오 짝을 지은 행인들 속에, 오직 하린만이 홀로였다.
  • 그녀는 빗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앞으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린은 시외로 가는 버스표를 샀다. 그리고 자신을 오래도록 돌봐주었던 보모, 윤영숙 아주머니가 사는 시골로 향했다.
  •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아홉 시였다.
  • 하린은 낡은 벽돌집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그동안 이로한을 돌보느라 바빴던 하린은 윤영숙을 만날 때마다 늘 서둘렀었다.
  • 문을 두드릴까 말까 망설이는 그 순간, 문이 안쪽에서 열리며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 윤영숙은 하린을 보자, 자애로운 얼굴이 순식간에 놀라움과 기쁨으로 가득 차올랐다.
  • “린…”
  • 자애로운 윤영숙의 미소를 보며, 하린의 코끝이 찡해졌다. 그녀는 손을 뻗어 윤영숙을 끌어안았다.
  • “아주머니…”
  • 윤영숙은 몸이 좋지 않아 결혼도, 자신의 아이도 가지지 못했다.
  • 하린에게 있어 그녀는 친어머니보다 더 가까운 존재였다.
  • 윤영숙은 하린의 고통과 슬픔을 느낀 듯,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말했다.
  • “우리 린, 무슨 일 있니?”
  • 하린은 평소에 약한 모습을 잘 보이지 않았다.
  • 그녀가 이렇게 약해 보였던 마지막 순간은 하 회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 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아주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 윤영숙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린이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 “나도 네가 많이 보고 싶었단다.”
  • 윤영숙은 하린이 온몸이 빗물에 젖은 것을 보고, 그녀를 집 안으로 끌어들이며 따뜻한 물로 목욕부터 하라고 권했다.
  • 그날 밤, 하린은 윤영숙의 품에 안겨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 윤영숙은 하린을 안고서, 그녀가 얼마나 깡마른 상태인지 그제야 깨달았다. 몸에 살이 하나도 없는 듯, 앙상한 뼈가 그대로 느껴졌다.
  • 그녀의 손이 하린의 앙상한 등 위에 머물렀고, 자신도 모르게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윤영숙은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 “린, 로한이가 너한테 잘해주니?”
  • 윤영숙은 조심스레 물었다.
  • 이로한의 이름을 듣자 하린의 목이 아파왔다. 본능적으로 윤영숙을 또 한 번 속이려 했다. 로한이 잘해준다고,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윤영숙이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 이미 떠나기로 결심한 이상, 더 이상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 “로한이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왔어요. 이제 로한을 놓아주려고 해요. 이혼할 생각이에요.”
  • 윤영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 하린이 로한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 윤영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린은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나직이 물었다.
  • “아주머니, 저도 아주머니처럼 될 수 있을까요?”
  • 결혼하지 않고.
  • 평생을 외롭게.
  • 이로한이 말한 대로, 외로이 늙어가면서.
  • ‘사랑받을 수 있는 선택이 있다면, 누가 평생 외로움을 선택할까…?’
  • 윤영숙은 하린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미어졌다.
  • “이 바보 같은 아이야, 그런 말 하지 마.”
  • “네 인생은 아직 길어. 로한이와 헤어진다고 해도, 널 사랑해주고 아껴줄 사람은 반드시 나타날 거야.”
  • 하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소음이 윤영숙의 위로의 말을 덮어버렸다.
  • 일방적인 사랑을 십여 년이나 해왔던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고된 일인지.
  • 이제 이런 자신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려, 이불을 적셨다.
  • 다음 날.
  • 하린은 흐릿한 정신으로 눈을 떴다. 자신이 어떻게 여기 있게 되었는지 의아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