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후회할까?
- 이로한은 시간을 확인했다. 딱 10시였다.
- 하린에게 전화해 도착했는지 물어보려던 찰나, 멀지 않은 곳에서 하린이 큰 나무 아래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색의 옷을 입은 그녀는 이슬비 속에서 특히나 야위어 보였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쓰러질 것 같았다.
- 이로한은 하린이 막 결혼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분명 활기차고 밝은 모습이었다. 지금처럼 생기가 사라지고 앙상한 모습이 아니었다.
- 그는 우산을 받쳐 들고 하린 쪽으로 똑바로 걸어갔다.
- 하린은 그가 가까이 올 때서야 비로소 그의 존재를 눈치챘다.
- 3년이 지났지만, 이로한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잘생기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전보다 성숙함과 능숙함이 더해져 있었다.
- 하린은 갑자기 넋이 나간 듯 멍해졌다. 지난 3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소진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이로한은 하린 앞에 서서, 냉랭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가 사과하기를 기다렸다.
- ‘이렇게 오랫동안 소란을 피웠으니 그만할 때도 됐잖아!’
- 하지만 하린은 뜻밖에도 그에게 말했다.
- “당신 시간 뺏어서 미안해. 이제 들어가자.”
- 이로한의 얼굴이 잠시 굳어지더니, 이내 냉정하고 무거운 표정으로 변했다.
- “후회하지 마.”
- 그는 차갑게 한마디를 남기고, 등을 돌려 구청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하린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다.
- ‘후회할까?’
- 잘 모르겠다. 단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지쳤다는 것뿐이었다.
- 사람이 결심을 굳히고 떠나려는 마음을 먹는 것은, 아마도 더 이상 희망을 느낄 수 없을 때일 것이다. 그녀의 마음에 쌓여왔던 실망감은 이제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다.
- 이혼 접수 창구에서.
- 직원이 두 사람에게 정말로 이혼을 결정한 것이 맞느냐고 물었을 때, 하린은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 “네.”
- 그녀의 단호한 눈빛에 이로한은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 서류 처리가 끝나고, 이혼 숙려 기간이 적용되어 한 달 뒤에 다시 한 번 와야 했다. 만약 한 달 후에 오지 않으면, 이번 이혼 신청은 자동으로 무효가 된다.
- 구청을 나서며.
- 하린은 이로한을 바라보며, 아주 평온하게 말했다.
- “다음 달에 봐. 몸조심하고.”
- 말을 마친 그녀는 곧바로 빗속으로 걸어가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
- 이로한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멀어져 가는 차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이 복잡했다.
- ‘해방된 건가.’
- 더 이상 그녀와 얽히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장애인 아내를 둔 사람으로 비웃음받을 일도 없어졌으니까.
- 그때 심진택의 전화가 걸려왔다.
- “로한 형, 다 처리했어?”
- “응.”
- “지금 냉각 기간 있다는 거 들었어. 절대 그 귀머거리한테 마음 약해지지 마. 분명히 뭔가 다른 수가 있을 거야.”
- 심진택이 말했다.
- 그래.
- 하린이 이로한을 10년 넘게 붙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놓아주겠다고? 누가 그걸 믿겠어?
- …
- 택시 안에서.
- 하린은 창문에 기대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운전사는 백미러로 그녀의 귀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 “손님, 손님!!”
- 몇 번을 불러도 하린은 대답이 없었다.
- 운전사는 급히 차를 멈췄다.
- 하린은 의아했다.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왜 멈춘 걸까?
- 그녀는 운전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움직이는 걸 보며 그제야 자신이 다시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뭐라고요? 안 들려요.”
- 운전사는 핸드폰으로 그녀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 하린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귀를 만져보았다. 손끝에서 따뜻한 피의 감촉이 전해졌지만, 이젠 익숙했다.
- “괜찮아요, 자주 이래요. 별일 아니에요.”
- 하린은 난청이 있었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 문제는 2년 전, 한 파티에서 이로한의 친구인 심진택이 그녀를 수영장에 밀어넣으면서 시작됐다.
- 하린은 수영을 할 줄 몰랐다. 그때 고막이 부어올라, 그녀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 병원으로 실려 간 뒤, 그때부터 이 병이 생긴 것이다.
- 한때는 다 나았던 것 같았는데, 최근 들어 이유도 모른 채 다시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 운전사는 걱정이 되어 그녀를 가까운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다.
- 하린은 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혼자 진료를 받으러 갔다.
- 이번 진료를 보는 의사는 그녀의 주치의였다.
- “장 선생님, 요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아졌어요. 가끔은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리곤 해요.”
- 하린이 말했다.
- 오늘 아침에도, 그녀는 호텔에서 깨어난 뒤 한참 동안 오늘 이로한과 이혼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
- 그래서 아침 일찍부터 구청으로 향해 그를 기다렸다.
- 잊어버릴까 두려워, 틈틈이 그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곤 했다.
- 의사는 최근 하린의 진단 보고서를 보며,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 “하린 씨, 제가 추천드리고 싶은 건, 심리적인 부분에 대해 추가 검사를 받아보는 겁니다.”
- ‘심리적인 문제…’
- 하린은 의사의 말대로 심리 검사를 받았다.
- 그리고 결국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것도 중증 우울증이었다. 중증 우울증 환자들은 기억력이 약간 감퇴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 하린은 모텔로 돌아가기 전, 노트와 펜을 하나 샀다. 최근에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볼 수 있도록 침대 옆에 뒀다.
- 잠자리에 들기 전, 하린은 핸드폰을 열어 우울증을 치료할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한 문장.
- ——희망하건대,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스스로를 치유하길. 이 세상 어딘가에 당신을 구원할 사람이 있다고 기대하지 마라.
- 하린은 조용히 그 문장을 읽고 나서 핸드폰을 닫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 이로한과의 이혼 소식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 그날 밤, 최은영은 하린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하린은 전혀 듣지 못했다.
- 다음 날 아침, 하린이 잠에서 깨어나 보니 최은영이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
- “너 지금 어디야?”
- “네가 뭔데? 이혼을 해도 이로한이 너를 버려야지!”
- “너는 재앙이야! 결혼할 때는 네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더니, 이제 이혼한다고 하 씨 가문을 망하게 하려는 거야?”
- 하린은 이런 메시지에 이미 익숙했다.
- 그녀는 조용히 답장을 썼다.
- “엄마, 이제 우리 스스로 자립해야 해요. 남에게 너무 의지하지 말아요.”
- 곧이어 최은영의 답장이 날아왔다.
- “넌 정말 배은망덕한 년이야! 내가 널 낳지 말았어야 했어!”
- 하린은 더 이상 답장하지 않고,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았다.
- 그녀는 생각했다. 한 달 후 이로한과 이혼을 마무리하면 도주를 떠나 새 삶을 시작하리라고.
- …
- 그 후 며칠 동안 하린의 몸은 점점 더 나빠졌다.
- 자주 청각을 잃었고, 어떤 때는 청력이 돌아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억력도 마찬가지로 점점 쇠퇴하고 있었다.
- 어제는 외출해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을 잊어버리기까지 했다.
- 다행히 핸드폰을 가지고 있어서, 내비게이션 덕분에 길을 찾을 수 있었다.
- 귀는 고칠 수 없지만, 우울증은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그녀는 가능한 한 자신을 즐겁게 만들고 바쁘게 지내려고 했다.
- 그래서 인터넷에서 자원봉사에 지원했다. 독거노인과 고아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 그들이 도움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하린은 마치 자신이 살아갈 의미를 다시 찾은 듯했다.
- 며칠 후, 어느 날 아침.
- 하린은 평소처럼 깨어나 침대 옆에 두었던 기록 노트를 확인한 뒤, 고아원에 갈 준비를 했다.
- 하지만 핸드폰을 들어보니, 읽지 않은 메시지가 여러 개 와 있는 걸 알게 되었다.
- 최은영에게서 온 메시지도 있었고, 동생 하민에게서 온 메시지도 있었다. 마지막은 원은별이었다.
- 하린은 하나씩 메시지를 열어보았다.
- 최은영: “네가 원하는 대로 됐다. 이제 하 씨 가문은 망했어.”
- 하민: “열심히 도망쳐봐라. 이렇게 잔인하고 비겁한 누나는 본 적 없어.”
- 원은별: “하린, 슬픔을 잘 이겨내. 사실 하 씨 그룹은 로한이 이끌어야 더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 원은별: “하 씨 가문이 나를 지원해준 걸 생각해서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도울 수 있으면 돕겠어.”
- 하린은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대화창을 나간 뒤, 핫 뉴스 알림이 화면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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