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고백
- “로한 오빠, 이 몇 년 동안 많이 힘들었지?”
- “오빠가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거 나도 알아. 오늘 밤 우리 만나자. 보고 싶어.”
-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하린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 곧바로 택시를 잡아 이로한의 회사로 향했다.
- 택시 안에서 하린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쉼 없이 내리는 비는 마치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 이로한은 하린이 그의 회사에 오는 것을 싫어했기에, 하린은 매번 뒷문에 있는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그를 찾아가곤 했다.
- 회사에 도착해 뒷문으로 들어가자, 이로한의 비서 허민혁은 하린을 보며 그저 차갑게 이름을 부를 뿐이었다.
- “하린 씨.”
- 이로한의 곁에서는 아무도 하린을 ‘이 사모님’으로 여기지 않았다.
- 그녀는 마치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어둠 속에 숨겨져 있었다.
- 이로한은 하린이 핸드폰을 건네주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 그녀는 늘 그랬다. 점심 한 끼, 중요한 서류, 놓고 간 옷이나 우산까지, 자신이 잊고 간 것은 무엇이든 직접 가져다주곤 했다.
- “내가 말했잖아.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 하린은 순간 멍해졌다.
- “미안해, 깜빡했어.”
- ‘언제부터 이렇게 기억력이 나빠졌지?’
- 아마도 원은별의 문자를 보고 너무 놀라서 그랬을 것이다.
- ‘이로한이 갑자기 내 곁에서 사라질까 봐… 너무 두려웠어.’
- 떠나기 전, 하린은 문 앞에서 이로한을 돌아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질문을 던졌다.
- “로한, 넌 아직도 원은별을 좋아해?”
- 이로한은 요즘 하린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 자꾸 무언가를 깜빡거리고, 의미 없는 질문들만 던지곤 했다.
-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내 아내가 될 수 있겠어?’
- 그는 짜증스러운 듯 대답했다.
- “너무 한가하면, 일이라도 찾아서 해.”
- 결국 하린은 끝내 대답을 얻지 못했다.
- 하린은 예전에도 일을 구하려 했었다. 그러나 이 씨 가문의 어른들은 그녀가 밖에서 얼굴을 드러내면 이 씨 가문에 누를 끼칠 거라며 이를 반대했다.
- 이로한의 어머니, 고윤아는 그때 하린에게 대놓고 물었다.
- “넌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우리 로한이 청각에 문제가 있는 장애인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걸 알리고 싶은 거니?”
- 장애인 아내…
- 집에 돌아온 하린은 자신을 바쁘게 만들기 위해 애썼다. 이미 집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지만, 그래도 손을 놓지 않았다.
- 이렇게 해야만 그녀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 오늘 오후, 이로한에게서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 보통 이런 경우라면, 그가 화가 났거나 너무 바쁘다는 뜻이다…
- 밤은 깊어만 간다.
- 하린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휴대폰이 급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 하린은 뒤늦게 벨 소리를 들어 서둘러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 낯선 번호였다.
- 전화를 받자마자, 그 끝에서 들려온 것은 달콤하면서도 하린을 매 순간 불안하게 만드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 ——원은별.
- “린이야? 로한이 술에 취했어, 네가 데리러 와줄 수 있어?”
- …
- 임페리얼 프리미엄 클럽.
- 이로한은 상석에 앉아, 마음이 온통 다른 데 가 있는 듯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원은별은 부잣집 자제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은별에게 노래를 부르라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 “은별아, 너 이번에 우리 이 대표님 다시 잡으려고 돌아왔다며?”
- “어서 노래 불러서 우리 이 대표님께 고백해봐.”
- 원은별은 달콤하고 예쁜 외모에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성격을 가졌다. 게다가 이로한의 첫사랑이었기에, 이 상류 사회의 부잣집 자제들은 은근히 둘의 재결합을 부추기고 있었다.
- 원은별은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노래 한 곡을 택했다. 그녀가 고른 곡은 “밤바람이 마음속에 불어와”였다.
- “…밤바람이 나를 그대 마음에…”
-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감미로웠고, 노래가 시작되자 모두들 입을 다물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 하린이 도착해 문 앞에 섰을 때, 원은별의 노래가 막 끝나고 있었다.
- 그리고 안에서는 사람들이 이로한을 부추기고 있었다. 특히 그의 절친, 심진택의 목소리가 유난히 컸다.
- “로한아, 넌 은별이를 3년이나 기다렸잖아. 이제 은별이가 돌아왔으니까, 너도 뭔가 말해야지.”
- “여자애가 먼저 고백까지 했는데, 넌 어쩔 거냐고.”
- 하린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서 손바닥을 꽉 움켜쥐었다.
- 마침 그때, 한 남자가 화장실에 가려다 문을 열었고, 문밖에 서 있는 하린을 보고 멈춰 섰다.
- “하린 씨.”
- 그 말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순간, 룸 안은 기묘한 정적에 휩싸였다.
- 하린은 첫눈에 상석에 앉아 있는 이로한을 알아봤다. 그의 눈빛은 맑고 또렷했으며, 전혀 취한 기색이 없었다.
- 그녀는 자신이 원은별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이로한은 하린을 보자 검은 눈동자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 그리고 방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 특히 조금 전 이로한에게 원은별의 고백을 받아들이라고 제안했던 심진택까지도 모두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이 자리에, 하린은 오지 말았어야 했다.
- “린, 오해하지 마. 심진택이 장난친 거야. 나랑 로한이는 지금 그냥 친구일 뿐이야.”
-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원은별이었다.
- 하린이 대답할 틈도 없이, 이로한은 짜증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굳이 얘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
-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곧장 하린 앞에 섰다.
- “여기 왜 온 거야?”
- “당신이 술에 취한 줄 알고, 데리러 왔어.”
- 하린은 솔직하게 답했다.
- 이로한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 “오늘 내가 한 말, 한 마디도 기억하지 못했나 보네.”
-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오직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물었다.
- “너는 지난 3년 동안, 모두가 내가 3년 전에 속았던 일을 잊었다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여기 와서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려는 거야?”
- 하린은 순간 멍해졌다. 이로한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 “괜히 존재감을 찾으려고 하지 마. 네가 이러면 이럴수록, 난 너를 더 혐오하게 될 뿐이야.”
- 그 말을 남기고, 그는 하린을 뒤로한 채 돌아서서 떠났다.
- 그의 커다란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린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오늘은 아마도 이로한이 그녀에게 가장 많은 말을 한 날일 것이다.
-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상처를 준 날이기도 했다.
- 룸 안에 있던 부잣집 자제들은 버려진 하린을 보며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 심진택은 더욱 거리낌 없이, 일부러 슬픈 척하는 원은별을 바라보며 말했다.
- “은별아, 너 참 착하구나. 그런 걸 굳이 설명할 필요가 뭐가 있어?”
- “하린이 결혼 사기를 치지만 않았어도, 로한 형이 너랑 결혼했을 거야. 너도 그럼 외국까지 나가서 그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 하린은 귀 안이 윙윙거렸지만, 모든 말이 똑똑히 들렸다.
-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이로한이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아무런 배경도 없는 원은별과는 결코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 그리고 원은별 또한 그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기에, 과감히 이별을 선택하고 먼 나라로 떠났던 것이었다.
- 그런데 결국, 왜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이 되어버린 걸까?
- 하린은 비스타 하우스로 돌아왔다.
- 여느 때처럼 집안은 어둡고 적막했다.
- 그녀가 집을 나설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 이로한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 하린은 우산을 든 채, 문 앞에 서서 온몸이 어둠에 휩싸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 그녀는 문득 언제나 혼자뿐인 이 집에 들어가기 싫어졌다. 정자에 앉아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쓸쓸하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 앞에 한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 원은별이었다!
- 정성껏 꾸민 모습에, 하이힐을 신은 그녀는 하린의 옆에 앉았다.
- “오늘 밤 정말 춥지? 이렇게 늦은 밤에 로한을 찾아가서 비웃음을 당한 기분은 어때?”
- 하린은 그 말을 듣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 원은별은 그런 하린을 신경 쓰지 않고, 혼자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 “너 그거 알아? 처음엔 너를 정말 부러워했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널 아끼는 아버지가 계시잖아. 평생 걱정 없이 살 거라고 생각했어.”
- “하지만 지금은 네가 너무 안타까워. 10년 넘게 이로한을 몰래 좋아했지만, 걔는 너에게 사랑을 단 한 번도 베풀지 않았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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