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유언장

• 핸드폰이 하린의 손에서 떨어졌다.
• 빗물이 핸드폰을 적셨고, 점차 화면은 새까맣게 변해갔다.
• 하린은 아버지의 묘비에 기대어, 품 안의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차가운 빗줄기를 맞으며, 그녀는 마치 아버지가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본 것만 같았다.
• ——깊은 정을 가진 사람은 이상주의자이고, 무정한 사람은 현실주의자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결국엔 후회를 남긴다.
• …
• 비스타 하우스.
• 이로한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불안감이 밀려왔다.
• 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차가운 안내 음성이 핸드폰 속에서 흘러나왔다.
• “연결이 되지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
• 이로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집어 들고 몸에 걸쳤다. 곧바로 나가려던 그는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 ‘하린은 분명 나를 애타게 만들려고 이러는 거야! 어차피 곧 이혼하는데, 하린이 뭘 하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 다시 침실로 돌아왔지만, 왠지 모르게 잠이 오질 않았다.
• 하린이 했던 그 말들이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 “만약… 엄마랑 동생이 저지른 일을 내가 알았더라면, 나는 절대… 절대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 “만약 당신이… 원은별을 계속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 “그리고 만약, 아빠가 내 결혼식 날 교통사고를 당할 줄 알았다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 이로한은 다시 일어나 무의식적으로 하린의 방문 앞에 섰다.
• 하린이 이곳을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 그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방 안은 캄캄했고, 그 어둠이 유난히 답답하게 느껴졌다.
• 불을 켜자, 하린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의 개인 물건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이로한은 침대 옆에 앉아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작은 수첩 하나가 있었다.
• 수첩에는 단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 “진정으로 떠나기로 선택한 사람이 가장 고통스러운 법이야. 그 사람은 이미 수없이 많은 갈등을 겪은 끝에야 비로소 결심을 내린 거니까.”
• 이로한은 고운 글씨를 보며 냉소를 지었다.
• “고통?”
• “너와 함께한 이 몇 년 동안, 난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 같아?”
• 그는 수첩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 그러나 방을 나갈 때, 수첩은 다시 가지런히 침대 옆 서랍에 놓여 있었다.
• 방을 나선 뒤, 그는 다시는 잠들지 못했다.
• …
• 한편.
• 연시온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지난 이틀간 하린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 마찬가지로, 새벽 네 시가 조금 넘었을 때, 그는 임영숙의 전화를 받았다.
• “시온아, 네가 하린 좀 보러 가줄 수 있겠니? 방금 이상한 꿈을 꿨거든.”
• 연시온은 몸을 일으켰다.
• “어떤 꿈이요?”
• “린이가 무슨 일이 난 것 같았어.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날 찾아왔거든. 그러면서 나보고 자기를 집에 데려가는 걸 잊지 말라고 했어.”
• 임영숙은 말하는 도중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 “나는 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두려워. 전화를 걸어도 받질 않아.”
• “며칠 전에는, 린이 나보고 15일에 데리러 오라고 했어.”
• “뭔가 이상해…”
• 연시온은 그 말을 듣고, 최근 하린의 모습을 떠올리며 급히 옷을 입기 시작했다.
•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지금 바로 찾아볼게요.”
• 두 집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 10분 후, 연시온은 서둘러 그곳에 도착해 문을 밀어 열었다. 방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 하린이 지내는 침실의 문은 닫혀 있지도 않았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 그녀가 없었다.
• ‘이 시간에 대체 어디로 간 걸까?’
• 베개 옆에는 두 개의 봉투가 놓여 있었다. 연시온이 그것을 집어 열어보니, 놀랍게도 그 안에는 두 개의 유언장이 들어 있었다.
• 하나는 연시온에게 남긴 것이었다.
• “연시온, 방세는 이미 네 카드로 송금했어. 그동안 나 돌봐줘서 고마워.”
• “그거 알아? 도주에 온 이후로 난 친구가 하나도 없었어. 우리가 다시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너무 별로라서 친구 하나 못 사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
• “다행히 너를 다시 만났어. 네 덕분에 내가 그렇게 별로인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 정말 고마워… 그러니까 절대 슬퍼하지 마. 난 그저 아빠를 만나러 가는 거야. 아빠가 나를 돌봐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