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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진짜 이유

  • 문 밖에서 윤영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린, 일어났니? 네가 제일 좋아하는 만두를 만들었어. 얼른 일어나서 뜨거울 때 먹자.”
  • 그 말에 하린은 천천히 기억을 되찾았다.
  • 자신은 이 씨 가문을 떠나, 병원에 들렀고, 마지막으로 윤영숙을 보러 온 것이었다.
  • 하린은 머리를 두드리며 혼란스러웠다.
  • ‘왜 이렇게 기억이 흐려졌지?’
  • 일어나려고 하던 순간,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보고 숨이 멎을 듯 놀랐다. 꽃무늬 침대보 위에 커다란 핏자국이 번져 있었다.
  • 하린은 오른쪽 귀를 만져보았다. 축축하고 끈적거렸다.
  • 손바닥을 펼쳐보니, 온통 피투성이였다…
  • 심지어 보청기까지 피로 물들어 있었다…
  • 그녀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고, 황급히 휴지로 귀를 닦았다. 곧바로 침대보를 걷어내며 급하게 처리하기 시작했다.
  • 윤영숙은 하린이 내려오는 모습은 보지 못하고, 그녀가 침대보를 세탁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 “무슨 일이니?”
  • “생리 중이라, 실수로 침대에 묻었어요.”
  • 하린은 웃으며 설명했다.
  • 세탁을 마친 후, 하린은 윤영숙과 함께 아침을 먹으며 잠시나마 평온한 시간을 즐겼다.
  • 윤영숙의 목소리는 때로는 또렷하게 들렸고, 때로는 희미하게 울렸다.
  • 하린은 두려웠다.
  • ‘혹시 앞으로 이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 또한, 윤영숙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마음 아파할까 봐 걱정되었다.
  • 그곳에서 반나절을 보낸 뒤, 하린은 모아둔 돈 일부를 몰래 침대 머리맡에 두고, 윤영숙과 작별을 고했다.
  • 떠날 때.
  • 윤영숙은 하린을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하며, 아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했다.
  • 하린이 완전히 떠나고 나서야, 윤영숙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 돌아가는 길, 윤영숙은 하린의 앙상한 모습을 떠올리며 참지 못하고 이씨 그룹의 내선 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 대표 사무실의 비서는 그녀가 하린의 보모라는 것을 듣고, 이로한에게 보고했다.
  • 오늘은 하린이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 그리고 이로한이 하린과 관련된 전화를 받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 이로한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기분이 유난히 좋았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하린은 사흘도 버티지 못하고 돌아올 것 같았다.
  • 그때, 윤영숙의 나이 든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 “이 대표님, 저는 어릴 때부터 하린을 돌봐온 보모입니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린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 “그 아이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강하지 않아요. 하린이는 태어나자마자 난청이 있다는 이유로 하 사모님께 버림받아, 제가 돌보게 됐어요.”
  •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서야 하 씨 가문으로 돌아갔지만… 하 회장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린이를 하인처럼 대했죠. 하린이는 수없이 몰래 저에게 전화를 걸어 울며 말했어요. ‘아주머니, 저 하 씨 가문의 아가씨가 되고 싶지 않아요. 돌아가서 아주머니의 딸이 되고 싶어요…’라고.”
  • “대표님과 하 회장님은 하린이가 도주에서 가장 소중히 여긴 사람이에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발 그 아이를 잘 대해주세요. 하린이는 어릴 때부터 너무 비참한 삶을 살아왔어요.”
  • 이로한은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윤영숙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갑자기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 “뭐지? 어제는 돈으로 나를 모욕하더니, 이제 와서 동정이라도 사려는 건가?”
  • 이로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 “하린이 어떻게 살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 “모든 건 다 그 여자가 자초한 일이야!”
  •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전화를 거칠게 끊어버렸다.
  • 윤영숙은 늘 하린에게서 이로한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듣기만 했었다.
  • 그러나 이제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며, 하린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 하린은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에 앉아 있었다.
  •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하며 문자가 왔다. 화면을 열어보니 이로한에게서 온 것이었다.
  • “이혼하겠다며? 내일 오전 10시에 보자.”
  • 하린은 그 문자를 바라보며 잠시 멍하니 있었다. 잠시 후, 간단히 답장을 보냈다.
  • “응.”
  • 그저 ‘응’이라는 한 글자였다.
  • 그 답장은 이로한의 눈에 몹시 거슬렸다.
  • “좋아, 네가 얼마나 더 잘 버티나 보자.”
  • 이로한은 더 이상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사람들을 불러 술을 마시러 나갔다.
  • 클럽에 도착하자 원은별도 이미 와 있었다.
  • “오늘 취할 때까지 마시는 거다.”
  • 친구 심진택은 이로한 옆에 앉아 하린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그 귀머거리 오늘은 어때?”
  • 이로한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 “앞으로 그 얘기는 꺼내지 마. 내일 당장 이혼 절차를 밟을 거니까.”
  • 원은별은 그 말을 듣고 이로한에게 술을 한 잔 따랐다.
  • “로한, 너의 새 출발을 축하해.”
  • 다른 사람들도 따라 술을 권하기 시작했다.
  • 오늘 임페리얼 프리미엄 클럽은 무척이나 시끌벅적했다. 모든 술은 심진택이 전부 예약한 상태였다. 그는 밖에서 원은별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로한 형이 여전히 널 좋아하는 게 느껴져. 꼭 행복해야 해.”
  • 원은별은 고개를 끄덕였다.
  • “진택, 정말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나랑 그 사람은 아마 만날 기회조차 없었을 거야.”
  • 이건 사실이었다.
  • 처음 원은별이 이로한을 알게 된 건 하 씨 가문의 후원을 받으면서였다. 하 씨 가문에 감사 인사를 하러 갔을 때, 그 자리에 이로한도 있었다.
  • 그리고 4년 전 병원에서, 이로한의 어머니 고윤아와 심진택이 같은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었다.
  • 하린은 운이 좋았다. 마침 사고 현장을 목격하게 되어 심진택과 고윤아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원은별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하린 대신 그 공을 가로챌 방법을 찾아냈다.
  • 이것이 바로 심진택이 원은별에게 그렇게 잘해줬던 이유였다. 처음에는 생명의 은인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은 점차 우정, 심지어는 사랑으로 변해갔다.
  • 또한 이로한이 수많은 여자를 제쳐두고 원은별을 여자친구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 이 일에 대해 원은별 본인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하린조차도 몰랐다.
  • 하린은 줄곧 이로한이 원은별을 선택한 이유가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심진택이 원은별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녀의 처세술 때문이라고만 여겼다. 심진택이 원은별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가 생명의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 “나한테 이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 있어? 우리 친구 아니야?”
  • 심진택은 그녀를 바라보며, 눈빛 속에 숨길 수 없는 감정이 담겨있었다.
  • 원은별은 그의 감정을 모르는 척했다.
  • 오늘, 이로한은 술을 꽤 많이 마셨다.
  • 원은별은 그를 집에 데려다주려 했다.
  • ‘집…’
  • 이로한은 밤이면 호텔에서 머물거나, 회사에서 자거나, 혹은 그의 개인 별장에서 지내곤 했다.
  • 하지만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린이 비스타 하우스가 바로 그들의 진짜 집이라고 말했던 것을.
  • “아니야, 불편할 거야.”
  • 내일이면 이혼할 것이다.
  • 하린은, 아마도 돌아올 것이다.
  • 거절당하자, 원은별은 조금 속이 상했다.
  • “왜? 너희 어차피 이혼할 거잖아. 뭐가 그렇게 불편해?”
  • “혹시 그 여자가 우리 관계를 알까 봐 무서운 거야?”
  • 우리 관계?
  • 이로한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 “네가 너무 과민 반응하는 거야.”
  • 차에 올라타면서도 그는 배려심을 잃지 않고, 원은별을 집으로 돌려보낼 차를 준비해 두었다.
  • 돌아가는 길 내내, 핸드폰을 수시로 들여다보며 하린에게서 메시지가 왔는지 확인했지만, 끝내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 집 앞에 도착해, 칠흑 같은 비스타 하우스를 바라보았다.
  • 이로한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켰지만, 하린은 보이지 않았다.
  •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 집 안은 그녀가 떠나기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 이로한이 세탁기 옆에 놓아둔 옷은 여전히 가지런히 그 자리에 있었다. 예전과는 달리, 깨끗이 세탁된 채 걸려있지 않았다.
  • 그는 짜증을 내며 다가가, 옷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 술기운이 점점 밀려와, 이로한은 소파에 앉아 불편한 상태로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잠이 들자마자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 꿈속에서, 하린은 온몸이 피범벅이었지만, 여전히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 “로한, 나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
  • 이로한은 깜짝 놀라 깨어났을 때, 창밖으로는 희미한 새벽빛이 막 떠오르고 있었다.
  • 그는 이마를 눌러가며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일어나 세면대로 향했다. 씻고 나서, 몸에 딱 맞는 정장을 걸친 그는 시간을 맞춰 구청으로 향했다.
  • 구청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