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보상
- 일과 관련된 메시지 외에는, 하루가 다 지나도록 하린에게서 전화나 사과의 문자조차 오지 않았다.
- “한번 어디까지 버티는지 보자고.”
- 이로한은 핸드폰을 대충 옆에 던져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긴 다리로 부엌으로 걸어갔다.
- 냉장고 문을 열자, 그는 순간 얼어붙었다.
- 냉장고 안에는 몇 가지 음식과 함께 각종 한약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 그는 무심코 한 봉지를 집어 들었고,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하루 다섯 봉지, 불임 치료용.”
- 불임 치료라니…
- 이로한은 한약에서 나는 불쾌한 냄새를 맡았다.
- 하린에게서 풍기던 약초 냄새의 정체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 ‘웃기는군.’
- 그는 속으로 냉소했다.
- ‘우리 둘은 단 한 번도 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데, 약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임신할 리가 있나!’
- 그는 약 봉지를 냉장고에 다시 던져 넣었다.
- 하린이 이번에 화를 낸 이유를 알아낸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 그는 침실로 돌아가 몸을 뉘였다.
- ‘하린이 없으니, 이제 앞으로 언제든 내가 원할 때 집에 들어와도 되고, 굳이 그 여자를 피할 필요도 없겠군.’
- 이로한은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에 들었다.
- 오늘 이로한은 친구 심진택과 골프 약속이 있었다.
- 그래서 아침 일찍 옷을 갈아입으려고 드레스룸으로 향해 운동복을 골랐다.
- 옷을 다 입고 거실로 나온 그는 평소처럼 하린에게 오늘 집에 안 들어온다고 말하려고 했다.
- “오늘은…”
- 말을 막 꺼낸 순간, 이제는 더 이상 하린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 골프장.
- 오늘 이로한은 기분이 상쾌했다. 그가 입은 하얀색 운동복은 그의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을 한결 부드럽게 만들었다.
- 그는 곧은 자세로 골프장에 서 있었는데,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눈길을 끌었다.
- 그가 힘차게 클럽을 휘두르자, 공은 정확하게 홀 안으로 들어갔다.
- 친구 심진택이 옆에서 감탄하며 말했다.
- “로한 형, 오늘따라 너무 잘 치네. 혹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 아냐?”
- 하린과 이로한이 이혼하려 한다는 소식은 어제 이후로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다.
- 심진택이 모를 리가 없었다.
- 그는 그저 이로한의 입으로 직접 그 사실을 듣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야 오랫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원은별을 불러들일 수 있었으니까.
- 이로한은 물을 한 모금을 마시고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 “별일 아니야. 그냥 하린이랑 이혼하려고.”
- 그 말을 직접 듣고도 심진택은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 이로한의 친구로서, 그는 하린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린은 그야말로 착한 척하는 교활한 여자로, 이로한을 붙잡고 놓지 않는 천박한 사람이었다.
- 만약 이혼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했을 일이다. 그런데 왜 3년이 넘도록 이혼하지 않고 버텼을까?
- “그 귀머거리 여자가 동의했어?”
- 심진택이 물었다.
- 이로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 “이혼을 먼저 꺼낸 건 그 여자야.”
- 심진택은 비웃으며 말했다.
- “그건 분명히 밀고 당기는 수법이야.”
- “그런 여자는 내가 많이 봤지.”
- 그는 말을 마치고는 이로한을 향해 웃으며 덧붙였다.
- “로한 형, 오늘 내가 형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어.”
- 이로한이 의아해할 때, 심진택은 원은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잠시 후, 멀지 않은 곳에서 원은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화사한 컬러의 운동복을 입고, 세련된 차림으로 발랄하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두 사람 앞에 섰다.
- 심진택은 눈치를 보며 말했다.
- “그럼 둘이서 얘기 나눠. 나는 이만 빠질게, 방해되기 싫으니까.”
- 심진택이 떠난 후, 원은별은 이로한에게 함께 산책하자고 제안했다.
- 골프장을 벗어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다녔던 대학이 보였다.
- 원은별은 남자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린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그 대신 둘 사이의 과거를 언급했다.
- “로한, 이 길 기억나? 우리 예전에 사귈 때 자주 걸었잖아.”
- “그때 네가 내 손을 잡고 말했지. ‘우리는 이 길을 계속 함께 걸어가자’고.”
- 여기까지 말한 원은별은 걸음을 멈추고, 가느다란 손을 이로한에게 내밀었다.
- “로한, 지금도 다시 내 손을 잡고 함께 걸어줄 수 있을까?”
- 그러나 그녀의 손이 이로한의 손에 닿으려는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피했다.
- 원은별은 순간 멈칫하며,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 이로한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 “과거의 일은, 전부 기억나지 않아.”
- 공부를 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일을 하는 것…
- 이로한에게는 그저 인생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그에게는 일을 완수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 심지어 첫사랑마저도 그랬다.
- 원은별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 “너, 아직도 나한테 화난 거야?”
- “그때는 정말 어쩔 수 없었어. 나는 전혀 너를 떠나고 싶지 않았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데, 정말 많이 사랑했단 말이야…”
- “이 몇 년 동안 내가 어떻게 혼자 버텼는지 너는 알기나 해?”
-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들 덕분이야. 그 기억들을 붙잡고, 나 스스로 더 나아지고 싶었어. 더 뛰어나게 변해서 돌아오려고 했어. 그래서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 그 말을 들으며 이로한은 잘생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 “나, 이미 결혼했어.”
- “알아. 하지만 그 여자가 너랑 이혼하려고 하잖아.”
- 원은별은 곧바로 받아쳤고, 이어서 말했다.
- “나는 그 여자에게 고마워할 거야. 널 다시 내게 돌려주니까.”
- 눈물이 그녀의 두 눈에서 한 방울씩 떨어졌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이로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너 그거 알아? 나 하린이 너무 미워. 정말, 너무 미워. 그 여자만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렇게 오래 떨어지지 않았을 거야.”
- 인간은 본래 망각의 동물일지도 모른다.
- 원은별은 자신이 먼저 이로한과 헤어진 뒤에야 하린이 이로한과 약혼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 하린, 하린…
- 이로한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그녀의 차분하고 온화한 모습이 떠올랐다.
- 그는 과거를 떠올렸다.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하린은 눈물을 머금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 “로한 오빠, 나 좀 안아줄 수 있어?”
- 하지만 그때, 하린의 동생 하민은 두 사람의 혼인을 위해 설정된 모든 조건을 깨뜨렸고, 이로한이 하 씨 가문에 준 돈과 하 씨 가문이 그에게 줘야 할 모든 것을 자신이 차지해버렸다.
- 그래서 이로한은 하린 앞에서 아무 말 없이 걸어 나갔다. 위로의 말조차 하지 않은 채.
- 슬픔에 찬 그녀의 모습이 도저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이로한은 무의식적으로 원은별을 밀어냈다.
- 원은별은 그에게 밀려났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 그때 심진택이 급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그녀는 눈물을 재빨리 닦아냈다.
- 심진택은 이곳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아무 말 없이 손에 든 서류를 이로한에게 건넸다.
- “로한 형, 이거 봐.”
- 이로한은 서류를 받아 들고 펼쳐 보았다. 그것은 놀랍게도 재산 양도 계약서였다.
- 심진택은 곧 말을 이었다.
- “이건 하린 측 변호사가 보낸 거야. 3년간의 결혼 생활에 대한 보상이라더라.”
- 보상이라니?!
- 심진택은 하린이 이로한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줄 알고 서둘러 온 것이었다.
- 그러나 이로한이 서류를 열어보자, 그 안에는 놀랍게도 하린이 자신의 재산을 그에게 넘긴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 이로한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가득했다.
- 그러나 마지막에 200억 원의 자산이 양도된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 ‘하린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 “고작 200억으로 하 씨 가문을 그냥 놓아달라는 건가? 그 돈으로 용서해달라는 거야?”
- 이로한은 심진택과 원은별 앞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비웃었다.
- 심진택은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이로한과 함께 비웃음을 터뜨렸다.
- “그 귀머거리가 계속해서 순진한 척하더니, 뒤로는 200억 원의 자산을 숨겨놓았네.”
- “걔 동생이랑 그 밑빠진 독 같은 엄마도 알고 있었을까?”
- 한편, 원은별은 이로한과 심진택이 하린을 비웃는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 원래는 이로한이 하린을 좋아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결국 그들은 3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으니까.
-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3년은커녕 평생을 함께 한다고 해도 이로한 같은 훌륭한 남자는 하린처럼 무미건조한 여자를 절대 눈여겨볼 리가 없었다.
- 하린은 자신과 경쟁할 자격조차 없는 존재였다.
- …
- 다른 한편, 어두운 모텔 방 안.
- 하린은 몽롱한 상태로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가 무척 아팠고, 주위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 그녀는 자신의 병세가 악화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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