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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나는 늘 당신이 행복하길 바랐어

  • 원은별은 인터뷰를 마친 후, 최은영을 찾아갔다.
  • 그곳에서 하린의 동생과 최은영이 하린을 600억과 맞바꾸기 위해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보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이로한이 한참 동안 아무 답이 없자, 원은별은 더 자극적으로 말을 덧붙였다.
  • “은영 엄마가 그러더라. 하린이 600억짜리 지참금을 요구했다고. 정말 그런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 “너희 아직 냉각기가 안 끝나서 결혼은 어렵지만, 우선 결혼식부터 하겠다고 하더라.”
  • 하린은 알지 못했다. 어머니와 남동생이 여전히 그녀의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녀가 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 최은영은 하린이 죽을 용기도, 죽을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 ‘어릴 적부터 그토록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한 번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던 아이니까, 이번에도 똑같을 거야.’
  • 동생 하민은 이미 임 대표에게서 600억의 지참금을 받아 새로운 회사 설립 준비에 들어갔다.
  • 그는 전혀 양심의 가책도, 하린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었다.
  • 그날, 하린은 최은영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 “임 대표가 날짜를 정했어. 딱 이번 달 15일이야.”
  • “이제 나흘 남았으니, 시집갈 준비 잘해둬. 이번에는 반드시 그 남자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 알겠지?”
  • 하린은 그 두 문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음속에서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켜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 ‘15일이라…’
  • 그날은 가족들이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이기도 했다.
  • 하지만 동시에, 이로한과 이혼하기로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 또한, 자신이 강제로 결혼하게 될 날이었고…
  • 그리고, 스스로 떠나기로 결심한 날이기도 했다.
  • 하린은 혹시 자신이 또 잊어버릴까 두려워, 이 모든 일을 노트에 기록해두었다.
  • 기록을 마친 후, 그녀는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 펜을 들었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결국, 그녀는 임영숙에게 남길 말과 연시온에게 남길 말을 적었다.
  • 유서를 다 쓴 후, 그녀는 그것을 베개 밑에 넣어두었다.
  • 3일 후.
  • 14일, 그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 휴대폰이 탁자 위에서 울려대고 있었다.
  • 최은영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그녀는 하린에게 내일 결혼식인데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집에 돌아와서 시집 갈 준비를 하라고 계속 재촉했다.
  • 하린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오늘 그녀는 새로 산 밝은 컬러의 원피스로 갈아입고, 세련된 화장을 했다.
  • 원래 외모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 말라서 창백해 보이는 게 문제였다.
  • 하린은 거울 속, 화려하고 세련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로한과 결혼하기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 하린은 택시를 타고 묘지로 향했다.
  • 비 내리는 가운데, 그녀는 우산을 들고 천천히 차에서 내려 아버지의 묘비 앞에 섰다. 그리고 하얀 데이지 한 다발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 “아빠…”
  •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불어오고, 빗방울이 우산 위로 떨어지는 소리만이 조용히 들려왔다.
  • “미안해요… 원래는 여기 오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더는 갈 곳이 없어서요.”
  • “인정할게요. 나 정말 겁이 많아요. 혼자 외롭게 가는 게 너무 무서워서… 그래서 이렇게 아빠한테 왔어요.”
  • “만약 아빠가 날 혼내고 싶다면… 그냥 혼내세요.”
  • 하린은 조용히 말을 마치고, 묘비 옆에 앉아 몸을 감싸 안았다.
  • 그녀는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최은영의 독설이 한 줄 한 줄 메시지로 날아들었다.
  • “하린! 네가 도망친다고 해서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 “네 동생은 이미 돈을 받았고, 임 대표는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어. 네가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니?”
  • “내일 얌전히 시집가는 게 낫지, 찾고 나서 끌려가게 되는 것보다.”
  • “현명하게 행동해.”
  • 하린은 그 메시지들을 말없이 읽어 내려갔다.
  • 그녀는 천천히 답장을 썼다.
  • “나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내일, 서쪽 교외로 나를 데리러 와요. 아빠 묘비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 최은영은 하린의 답장을 받고, 그녀가 결국 체념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이상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 하린은 잠시나마 찾아온 고요를 누렸다.
  • 그녀는 그 자리에 앉아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았다.
  • 밤이 깊어지자, 하린은 어릴 때 아버지가 직접 조각해 준 작은 나무 인형을 꺼내들었다. 그녀는 그것을 소중히 품에 안고, 몸으로 칠흑 같은 밤과 쏟아지는 비를 막아냈다.
  •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멀리서 자정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 드디어 15일이 찾아왔다.
  • 하린은 고개를 들어 끝없이 펼쳐진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목구멍이 쓰라리게 아파왔다.
  • 새벽 3시.
  • 하린은 떨리는 손으로 가방에서 약을 꺼냈다.
  • 그 시각, 비스타 하우스.
  • 이로한은 집으로 돌아와 거실 소파에 앉았다. 불을 켜지 않고 어둠 속에 몸을 맡긴 채, 그는 지친 얼굴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잠깐 눈을 붙였다.
  • 하지만 곧바로 악몽에 놀라 깨어났다.
  • ‘이상해!’
  • 이번에도 하린과 관련된 악몽이었다.
  • 꿈속에서 하린이 죽어 있는 장면을 봤다. 너무나도 생생하게…
  • 핸드폰을 들어보니 아직 새벽 4시였다.
  • 이로한은 오늘이 냉각 기간이 끝나는 날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둘은 이날 이혼을 하기로 약속했었다.
  • 그는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하린에게 문자를 보냈다.
  • “잊지 마. 오늘 이혼하는 날이야.”
  • 하린은 그 문자를 받았을 때, 이미 의식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힘겹게 이로한에게 답장을 보냈다.
  • “미안해… 나, 아마 오늘 못 갈 것 같아.”
  • “하지만 걱정 마. 우리는 분명 이혼할 수 있을 거야…”
  • 그녀가 죽으면, 결혼은 자연히 무효가 될 테니까.
  • 이로한은 하린의 음성 메시지를 듣고, 마음속으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 ‘그럴 줄 알았어. 하린이 죽을 리가 없지.’
  • 그녀는 죽음을 선택하지도 않을 것이고, 자신과 이혼하는 것도 원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이로한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 그동안, 이로한에게서 전화가 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 그는 언제나 말이 짧고 간결했다. 대부분 문자로 대화를 했으며, 하린에게 직접 전화를 건 적은 거의 없었다.
  • 하린은 전화를 받았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곧바로 들려온 것은 이로한의 냉정한 목소리였다.
  • “하린,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어. 처음에 네가 이혼하자고 했던 거, 기억하지?”
  •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야? 내가 돈을 안 줘서 그런 거야?”
  • “다시 결혼할 생각이면 600억으로는 부족하겠지?”
  • 하린의 목구멍이 순간 막혔다.
  • 갑자기 그녀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으니, 하린은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은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남은 힘을 짜내어 전화기에 대고 힘겹게 말했다.
  • “로한… 나, 당신과 결혼한 건… 돈 때문이 아니었어.”
  • “이혼하고 싶어 하는 것도… 돈 때문이 아니야…”
  •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어… 그때 엄마랑 동생이 계약을 어긴 일, 나는 정말… 몰랐어.”
  • “지금도 600억 때문에… 누구와 결혼할 생각은 없어…”
  • 그녀의 말은 끊어질 듯 이어졌다.
  • 이로한은 그녀 쪽에서 거센 바람소리와 빗소리가 함께 들리는 것을 느꼈다.
  • “너 지금 어디야?”
  • 하린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저 핸드폰을 꽉 붙들고, 계속해서 설명하려고 애썼다.
  • “만약… 엄마랑 동생이 저지른 일을 내가 알았더라면, 나는 절대… 절대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 “만약 당신이… 원은별을 계속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 “그리고 만약, 아빠가 내 결혼식 날 교통사고를 당할 줄 알았다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 이로한은 하린의 말 속에서 그동안 쌓여온 깊은 불만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리고 그녀가 자신과 결혼한 것을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도 느꼈다.
  • 갑자기 그의 목구멍이 마치 솜뭉치로 막힌 듯 답답해졌다. 위로도 아래로도 삼킬 수 없는 기분이었다.
  • “무슨 자격으로 후회하는 거야? 처음에 울면서 결혼하자고 한 게 너 아니었어?”
  • 이로한의 낮고 깊은 목소리에는 뜻밖에도 약간의 쉰 기운이 섞여 있었다.
  • 반면, 하린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서 이로한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 “하린! 지금 어디에 있어?”
  •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하린의 마지막 한마디가 전해졌다.
  • “사실… 나는 늘 당신이 행복하길 바랐어.”
  • “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