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상복을 입은 정희민은 사람들 사이에 조용히 서서 정국영의 생전 친구들의 조문을 받고 있다.
“정희민 씨, 뭐라고 위로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희민은 눈물을 닦고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한 달 전, 정산그룹은 파산했고 정국영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때 잘나가던 정 씨 가문은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세상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지만 정희민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정 씨 가문의 딸일 뿐만 아니라 업계를 주름잡고 있는 하진그룹 대표 박시욱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장례식은 정오까지 열렸지만 사람들은 박시욱의 모습을 볼 수 없었는데, 장례식이 거의 끝날 무렵 벤틀리 한 대가 천천히 묘지로 들어왔다.
운전기사가 뒷문을 열었고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반듯한 양복을 입은 박시욱이 차에서 내렸다. 준수하고 각진 얼굴에는 차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정희민은 결혼한 지 2년 만에 박시욱을 처음 보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자신의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박시욱을 만나다니!
그리고 모든 조문객들은 분향을 하고 헌화를 하기에 바빴지만 박시욱은 빈손으로 왔다.
“시욱 씨.”
사람들이 더욱 놀란 것은 빨간 치마를 입은 아름다운 여자가 차에서 내린 뒤 자연스럽게 박시욱의 팔짱을 꼈다는 것이다.
“저도 들어가야 해요?”
박시욱은 그녀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자신의 팔에서 내려놓았다.
“여기서 기다려.”
“알겠어요.”
여자는 빙그레 웃으며 발끝을 세우고 그의 얼굴에 입맞춤을 했다.
정희민은 이 장면을 보고 뺨을 맞은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곳은 그녀의 아버지의 장례식장이다. 하지만 이 여자는 빨간 치마를 입고 왔을 뿐만 아니라 모든 조문객들 앞에서 그녀의 남편에게 키스를 하고 있다.
정희민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어 손을 꽉 쥐었다.
박시욱은 이미 계단을 올라와 그녀 앞에 다가왔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에 눈을 맞췄다. 187이나 되는 그의 큰 몸집이 소리 없이 그녀를 압박했다.
“왜? 2년 동안 못 봤더니 벙어리가 된 거야?”
“왜 온 거야?”
정희민은 그가 좋은 마음으로 온 게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왔냐고?”
박시욱은 창밖의 눈보라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당연히 우리 장인어른한테 절 올려야지.”
그는 정희민을 내려다보았다.
긴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온 정희민은 2년 전보다 더 아름다워졌다. 만약 그녀가 박시욱의 원수의 딸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두 사람은 애초에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박시욱은 정국영에게 복수하기 위해 정희민과 결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두 나가세요.”
박시욱이 말을 꺼내자 조문객들은 감히 하진그룹과 같은 재벌에 맞설 용기가 없어 모두 조용히 떠났다.
마지막 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자 정희민은 손목이 탈골되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그녀는 박시욱의 힘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
한 시간 후 박시욱은 양복을 정리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장례식장을 떠났다.
문밖에서 기다리던 여자는 그의 손을 잡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욱 씨, 어때요? 일은 다 해결된 거예요?”
“응.”
박시욱은 담담하게 대답했고 그녀의 손을 잡고 계단 아래로 내려가며 몇 마디를 흘렸다.
“모든 게 끝났어.”
온유아는 그의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차렸지만 감히 물어보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다만 정말 모든 것이 끝났기를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