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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일 하나 해줘

  • 저녁 8시,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던 온유아는 무의식중에 말을 건넸다.
  • “시욱 씨, 오늘 정희민이랑 그 여자 남자친구 봤어요.”
  • 박시욱은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차갑게 바라보았다.
  • “남자친구?”
  • 온유아도 갑작스러운 싸늘한 표정에 놀라지 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네, 제가 확인해 봤는데 육성우라고 해요. 가족 기업의 재벌 2세죠. 사실 이건 별거 아니지만 마음에 들진 않아요. 정 씨 가문이 시욱 씨를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는데 정희민은 왜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는 거죠?”
  • 그녀는 박시욱의 눈빛을 못 본 척 과장해서 말했다.
  • “육성우라는 사람은 그 여자한테 정말 잘해주더라고요. 정희민이 추울까 봐 옷도 입혀주고요.”
  • 그녀가 계속 말을 할수록 박시욱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 “그리고 둘이 같이 살고 있다고 해요.”
  • “쨍그랑!”
  • 테이블에 식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에게서 찬 기운이 퍼졌다.
  • 온유아는 뒤늦게 그의 표정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 “시욱 씨, 제가 말을 잘못 꺼낸 것 같아요.”
  • 어쨌든 이건 한 남자의 존엄성에 관한 것이다. 전처가 이혼 후 바로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는 것은 박시욱을 망신시키는 격이었다.
  • “아니야.”
  • 박시욱은 자신의 반응이 너무 과격했다고 느낀 후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되찾았고, 냅킨을 들어 입을 두 번 닦았다.
  • “난 다 먹었으니 천천히 먹어.”
  • “네.”
  • 온유아는 웃음을 보인 후 고개를 숙여 식사를 했고 그녀의 눈 밑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 연예계에서 곤두박질치던 그녀는 한때 아름다움을 뽐내던 정희민이 부러웠다. 이건 그녀가 한평생 추구할 수 없던 것이었다. 하지만 정희민은 지금 초라한 상태가 되었다. 온유아는 정희민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게 아니꼬웠다.
  • 식사를 마친 박시욱은 곧바로 레스토랑을 나섰고 이미 발렛 기사가 그의 차를 몰고 왔고 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차를 돌아 운전석에 앉았다.
  • 온유아가 차에 오르려 하자 박시욱은 안전벨트를 매던 손을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녀에게 말했다.
  • “이따가 민 비서가 데리러 올 거야.”
  • 온유아는 조금 속상해져 동작을 멈췄다.
  • “시욱 씨, 한밤중에 저를 혼자 여기 두는 거예요?”
  • “착하지, 말 들어.”
  • 박시욱은 참을성 있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 온유아는 감히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어 순순히 차에서 내렸다. 그녀가 내린 지 1초 만에 문이 닫히고 차는 빠르게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 박시욱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온유아는 검은 차가 떠나는 것을 주시하며 어슴푸레한 밤빛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 그녀는 정희민을 골탕 먹이기 위해 갖가지 생각을 하며 불안해했지만, 또한 박시욱 때문에 한 가닥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 박시욱이 차를 어찌나 빠르게 몰았는지 창문으로 휙휙 부는 바람이 그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 “정희민이 육성우라는 남자랑 같이 살고 있어요.”
  • ‘같이 살고 있다니… 아빠가 죽고 집이 망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겠다는 건가. 정희민, 내가 너를 과소평가한 거야?’
  • 그는 핸들을 잡은 손을 조금씩 움켜쥐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은 채 전화를 걸었다.
  • “일 좀 하나 해줘.”
  • ……
  • 면접에는 떨어졌지만 정희민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괜찮은 회사가 있는지 찾아봤다.
  • 3일 후,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그녀는 회사에서 면접을 요청하는 전화라고 생각하고 받았는데 뜻밖에도 중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안녕하세요, 정희민 씨인가요? 한번 뵙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