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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내 목숨으로 갚을게

  •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 그녀는 명진당에서처럼 고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우리 아빠는 이미 죽었어! 우리도 이미 이혼을 했다고! 박시욱, 언제까지 끈질기게 매달릴 생각이야?”
  • “그때 정국영이 우리 부모님의 목숨을 앗아갔어.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해도 두 사람 목숨이랑은 비교도 못 하지.”
  • 박시욱의 낮은 목소리는 그녀에게 형을 선고하는 것 같았다.
  • 박시욱이 턱을 조이는 손에 힘을 주니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지만 정희민은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이 순간 정희민은 박시욱의 원망 가득한 눈빛에서 문득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 ‘한 사람 목숨은 두 사람 목숨과 비교를 못 한다…’
  • 그녀는 그에게 목숨을 빚진 것이다.
  • “그럼 내 목숨으로 갚을게, 됐지?”
  •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창백한 입술을 오므렸다. 박시욱도 그녀의 고집스러운 모습에 마음이 아파져 자신도 모르게 얼굴빛이 변했다.
  • 어쩌면 정희민의 머릿속에 뜨거운 피가 솟구쳐서인지, 아니면 극도로 궁지에 몰려서인지 순간 자신감을 잃었다.
  • 그녀는 박시욱의 어깨를 스쳐지날 때 마주 오는 승합차를 발견하지 못했다. 박시욱은 몸을 움찔했지만 그가 돌아봤을 때는 이미 반 박자 늦었고 ‘펑’하는 소리와 함께 차와 사람이 부딪히는 큰 소리만 들렸다.
  • 차는 갑자기 속도를 줄였고 귀에 거슬리는 브레이크 소리를 냈다. 황급히 차에서 내린 운전자가 마주한 것은 피를 잔뜩 흘리고 있는 한 여자였다.
  • “사, 사람 죽어요! 얼른!”
  • 운전자가 비명을 지르며 급히 휴대폰을 꺼내 119에 전화를 걸었다.
  • 박시욱은 그를 밀치고 두 걸음 앞으로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피를 흘리고 있는 정희민을 끌어안았다. 그에게서 싸늘한 기운이 흘렀다. 그는 정희민의 강인함이 자신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 “당장 병원으로 가요.”
  • 정희민은 혼미한 가운데 곁에서 은은한 담배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 박시욱은 낮은 목소리로 운전기사에게 명령한 후 그녀의 뺨을 툭툭 쳤다.
  • “정희민, 일어나, 잠들지 마.”
  • 하지만 그녀는 정말 피곤하고 졸렸다. 눈을 감으면 정국영이 빛을 거슬러 그녀에게 손을 뻗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희민아, 아빠는 네가 보고 싶어. 아빠 곁으로 오렴…”
  • 정희민은 결국 눈을 감았다.
  • 박시욱의 옷을 꽉 쥐었던 피 묻은 그녀의 손가락은 그의 몸에서 흘러내렸고, 박시욱은 표정을 일그리며 고개를 들어 차가운 목소리로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 “더 빨리 운전하세요.”
  • 정희민은 병원에서 8시간의 수술을 마친 후 천천히 깨어났지만 이상하게 온몸이 아파졌다. 그녀는 통증을 참으며 일어나 손등에 있는 주삿바늘을 뽑으려고 했지만 곧바로 병실에 약을 갈아 끼우기 위해 들어온 어린 간호사에 의해 제지당했다.
  • “환자분,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방금 교통사고를 당하셨고 유산도 하셔서 몸이 많이 약해졌을 거예요. 그러니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 정희민은 동작을 멈추고 창백한 얼굴로 잘못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유산이요?”
  • “네, 모르셨어요? 임신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다만 지금 아이는…”
  • 간호사는 안타까워하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 “환자분,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몸조리 잘 하세요. 아이는 또 찾아올 거예요.”
  • 어린 간호사는 그녀를 위해 약을 갈아주고 조마조마한 마음을 부여잡고 병실을 떠났다.
  • 병실에는 정희민 혼자만 남아있었고 그녀는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 ‘아이… 내 아이…’
  • 그녀는 손을 들어 아랫배를 어루만졌고 결국 눈물을 뚝뚝 흘렸다. 뜻밖에도 그녀에게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는 장례식 날 박시욱이 남긴 아이였다.
  • 이 모든 것이 그녀와 박시욱은 정말 악연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까?
  • 울고 싶으면서도 웃고 싶기도 했던 그녀는 한참 후에야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녀의 눈길에 옆 탁자에 있는 반쪽 하트 모양의 펜던트가 들어왔다.
  • 정희민은 교통사고 후 박시욱이 그녀를 안고 있을 때 그에게서 떼어낸 것을 기억했다.
  • 참지 못하고 그 펜던트를 들고 이리저리 살핀 그녀의 낯빛이 점점 변했다. 이것은 수년 전 그녀가 박시욱을 구한 후 잃어버렸던 펜던트다! 그리고 그녀가 잃어버린 지 오래된 펜던트를 박시욱은 줄곧 몸에 달고 다녔던 것이다. 이건 도대체 무슨 뜻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