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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하루라도 빨리 결혼해야겠어

  • “아이고, 우리 강아지. 얼른 와서 할머니 옆에 앉아!”
  • 여사님이 제 곁에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리고 옆으로 살짝 움직여 백윤혜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 “왜 이렇게 말랐어? !”
  •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할머니가 화난 척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리고 이제 금방 집안으로 들어선 공찬에게 날이 선 눈빛을 보이며 물었다.
  • “똑바로 말해. 너 이 녀석 또 우리 윤혜 괴롭힌 거지!”
  • 누가 들었으면 백윤혜가 친손녀인 줄 알겠네.
  • 공찬이 느긋하게 거실로 걸어가 빨간 입술을 씩 올렸다.
  • “할머니, 편애가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당장 내일 유전자 검사라도 받는 건 어때요? 공가에서 ‘주어온’ 사람이 혹시 나는 아닌지 확인이나 해보게.”
  • 무심하게 툭 던진 말 같아 보였지만 백윤혜에게는 가시같이 들렸다.
  • 공가에서 주어온 사람이 공찬일 리가. 그건 그녀일 텐데…
  • 살을 파고들어 느껴지는 서늘함에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여사님이 빠르게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냈다.
  • “이 자식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 여사님이 또다시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는 말했다.
  • “윤혜야, 할머니한테 말해 봐. 공찬이 이 자식이 너 괴롭힌 거냐? 너한테 소홀했던 거면 당장 할머니한테 얘기해. 할머니는 언제나 네 편이야!”
  • 공찬이 지켜보는 앞에서 백윤혜가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 만약 그에게 불리한 말들을 내뱉는다면 별장으로 돌아가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를 괴롭힐 게 뻔하니까.
  • “아니에요, 할머니.”
  •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 공찬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억지로 삼킨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설마 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 할머니한테 이쁨 받는 점을 이용해 공 씨 가문의 사모님 자리를 욕심 내다니. 하…
  • 백윤혜, 정말 치밀한 여자였어.
  • 그리고 마치 남일 보듯 여유로운 공찬의 모습에 여사님은 화가 났다.
  • 저의 손주 녀석은 빠지는 구석이 없는데, 바람기가 있어서 탈이었다.
  • TV에 나오는 연예계 뉴스는 거의 매일 시청하는 그녀였다. 볼 때마다 공찬의 스캔들로 시끌벅적했고 스캔들의 여자 주인공은 거의 매일 바뀌듯싶었다.
  •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결을 봐야 한다.
  • “괜찮다, 윤혜야! 이미 허 씨 아주머니더러 석 달 뒤로 길일양신을 택하라고 했고, 너랑 녀석은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해야겠어!”
  • 그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거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여사님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혼자만의 기쁨에 젖어있었다.
  • 정말이지, 바늘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 그뿐만 아니라, 공찬에게서 느껴지는 싸늘함은 더더욱 섬뜩했다.
  • 옆에 가만히 서있던 허 씨 아주머니가 적절한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
  • “맞아요! 여사님께서 특별히 용하기로 소문난 분한테서 날짜를 받아왔는걸요!”
  • 여사님이 바로 이 얘기를 꺼낼 거라곤 백윤혜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 그녀가 곁눈질로 공찬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의 눈빛은 이미 잔뜩 어두워져있었다.
  • 하지만 그때, 그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
  • “아. 그래요?”
  • 그가 백윤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화난 기색이라곤 전혀 없는 얼굴로 되새기듯 다시 한 번 네 글자를 반복했다.
  • “길. 일. 양. 신.”
  •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그가 적당한 속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좋네요. 할머니께서 마음 쓰셨네요.”
  • 공찬이 이 결혼을 받아들인 건가 싶어 백윤혜가 숨을 돌렸다. 하지만 ‘좋네요’라는 말을 다 하자마자 그가 긴 다리를 뻗어 발걸음을 움직이더니 아주 편한 자세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 그가 백윤혜를 힐끗 쳐다봤다. 애써 침착하려 하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재밌어 굉장히 고민하는 얼굴로 할머니께 말씀드렸다.
  • “근데 할머니도 내가 어떤 놈인지 잘 알잖아요. 처신도 똑바로 못하는데, 할머니 보물을 나한테 넘기고도 마음이 놓여요? 난 좋은 남편이 될 자신 없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