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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약혼녀에도 속하지 않지!

  •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말을 내뱉고는 굳어버린 그녀의 표정을 말없이 지켜봤다. 그러고는 그녀의 얇은 손목을 풀어주고 굉장히 불쾌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흰색 손수건을 꺼내 양손을 슥슥 닦았다.
  • 제 손을 깔끔하게 닦아낸 뒤, 그 손수건을 전현진에게 툭 던져줬다. 그리고 긴 두 다리를 뻗어 그녀의 어깨를 스쳐 밖으로 걸어나갔다.
  • “먼저 갈게, 백비서.”
  • 현관 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야유의 목소리에 백윤혜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양손을 슬랙스 주머니에 넣고는 그가 우아한 자세로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아갔다. 시원시원한 웃음소리로 약간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 “곧 출근 시간이야. 지각하면 벌받아.”
  • 어리둥절한 얼굴로 전현진이 그녀를 바라보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결국 다시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공찬을 쫓아갔다.
  • 이 널찍한 별장 안엔, 힐끗힐끗 서로의 눈치를 보는 도우미들을 제외하면 백윤혜 혼자뿐이었다.
  • “내가 왜 할머니가 하라는 대로 가만히 있고 너를 여기서 지내게 내버려 뒀는지 알아?”
  • “공짜잖아. 남자라면 아무도 거절하지 않았을 거야.”
  • 조금 전 남자가 했던 말들이 귓가를 미친 듯이 맴돌았다. 온몸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던 그녀가 등 뒤의 난간을 붙잡았다.
  • 서늘한 기운이 살을 파고들어 뼛속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 이거였구나. 그의 진심이.
  • 잠자리 상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고, 결혼은 더더욱 생각도 없었구나.
  • 그랬구나…
  • “사모님, 괜찮으세요?”
  • 한 젊은 도우미가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 고개를 저으며 ‘괜찮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은 마치 뭐에 꽉 막힌 듯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바로 이때, 또 다른 도우미의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사모님은 무슨? 도련님께서 아직 아내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는데! 여사님께서 인정하셨으면 뭐해, 도련님께서 결혼식을 원하지 않으시는데. 약혼녀에도 속하지 않지!”
  • 낮게 깔린 목소리가 폭탄처럼 한적한 거실에 한방 터뜨렸다.
  • “그러니까요. 수많은 여자들 중 한 명뿐이겠죠.”
  • “그중에서도 가장 하찮은 존재일지 누가 알아요?”
  • 도련님의 ‘특별대우’를 떠올리다 보니, 도우미들도 담이 커지기 시작했다.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잔뜩 신이 나있었다.
  •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들에 백윤혜의 낯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마음속을 가득 채운 그 억울함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그녀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 어쩌면 공찬이 저에게 하는 복수가 아닐까?
  • 저에 대한 그의 원망과 미움, 아마 평생이 지나도 가라앉지 못할 것이다.
  • 백윤혜가 처음부터 환우 그룹에서 근무했던 건 아니었다. 할머니의 고집을 못 이기고 억지로 공찬의 신변에서 근무하게 되었던 것이다.
  • 그러니 조금 전 공찬이 그녀를 ‘백비서’라고 불렀던 것도 전혀 이상한 점이 없다.
  • 환우 그룹은 공 씨 가문의 심혈이 담긴 회사다. 세대로 물려받았고, 그러니 이번에 자연스럽게 공찬에게 차려졌던 것이다.
  • 7년이라는 긴 세월 끝에, 그가 환우 그룹을 하나의 제국으로 성장시켰다. 연예계 과반수의 여자 연예인은 전부 환우 그룹 소속인 만큼 연예계에 거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다.
  • 이를테면 얼마 전 남우주연상의 주인공과 스캔들이 난 민가인, 그리고 TR 온라인에서 맹활약 중인 몰리도 환우 그룹 소속이다.
  • “백비서님, 각 부문에 전달하셔야 할 서류입니다. 그리고 이건 보고서인데, 검사 마치시고 대표 사무실에 가져가셔서 사인받아오셔야 해요. 아주 중요한 보고서니까, 절대 잃어버리시면 안 돼요.”
  • 매끈한 다리라인을 가진 미아가 서류 한 움큼을 남겨놓고 바로 떠났다.
  • 백윤혜가 마우스에서 손가락을 떼고, 서류들을 펼쳐보았다. 이내 떠오르는 ‘대표 사무실’이라는 다섯 글자에 머리가 또다시 깨질 듯이 아팠다.
  • 회사에 공찬과 그녀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두 사람이 또 어떤 사이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공찬을 마주하자니 괜히 마음이 켕겼다.
  • 그것도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