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8화 할머니

  • 냉소를 터뜨리더니 공찬이 다시 곧게 허리를 폈다.
  • 그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시동을 걸고 엑셀을 밟아 빠른 속도로 도로를 달렸다.
  • 관성의 법칙으로 백윤혜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그녀가 황급히 손잡이를 붙잡았고, 손바닥이 손잡이와 마찰해 쓰라렸지만 마음속의 상처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 반 시간 뒤, 그들은 산 중턱에 위치해 있는 3층짜리 별장에 도착했다.
  • 공 씨 가문의 저택은 조선왕조 때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집이다. 그러다 작년에 공찬이 거액을 들이부어 밖으로부터 안까지 깡그리 갈아엎었고 현재는 한국 전통식 별장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 별장을 통하는 오솔길이 하나 있었다. 꽃과 풀들로 생기발랄했고 백윤혜가 공찬의 뒤에서 자갈 오솔길을 따라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 두 사람이 문 앞에 도착하기도 전이었는데 도우미들이 밖에 서서 그들을 마중하고 있었다.
  • “도련님, 아가씨. 드디어 오셨군요. 여사님께서 한참 기다리셨습니다!”
  • 백윤혜가 15살 되는 해에 공 씨 가문에 들어왔다. 공 씨 가문과 혈연관계는 없지만 여사님이 직접 정한 공 씨 가문의 수양딸이었다. 여사님의 애착으로 하마터면 공윤혜가 될 뻔하기도 했었다.
  • 구세대 도우미들에게 백윤혜는 공 씨 가문의 아가씨나 다름없었다.
  • 그리고 어쩌면 얼마 뒤, 백윤혜가 공 씨 가문의 사모님이 될지도 모른다.
  • “허 씨 아주머니! 너무 보고 싶었어요!”
  • 연세가 있는 도우미를 보자, 백윤혜가 쏜살같이 뛰어가 그녀를 부둥켜안고는 그리움을 토해냈다.
  • “어이구, 나도 너무 보고 싶었어요! 아가씨께서 본가에서 나가고 도련님과 함께 지내기 시작해서부터 늘 아가씨가 그리웠어요.”
  • 허 씨 아주머니가 부드러운 손길로 백윤혜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 곧게 허리를 펴고 슈트 재킷을 팔에 올려둔 공찬에게 시선을 돌렸다.
  • 웃는 것 같기도, 웃지 않는 것 같기도 하는 표정으로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있는 그의 모습이 그저 차갑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 가식에도 순위가 있다면, 그 누구도 감히 백윤혜와 비교를 할 수 없을 것이다.
  • 다행히도, 그는 이미 이 여자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더 이상 그 순수한 얼굴에 속을 일은 없었다.
  • “하지만 제 생각에, 도련님께서 분명 아가씨한테 푸대접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 허 씨 아주머니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며 공찬과 백윤혜를 번갈아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그렇죠?”
  • 백윤혜의 입가에 번졌던 미소가 굳어져 버렸다.
  • 바로 이때, 공찬이 곧장 그녀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장난스러운 투로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 “허 씨 아주머니,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얘 얼굴 통통한 것 좀 봐요. 제가 푸대접했겠어요?”
  • 공찬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 “푸대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주 ‘특별하게’… 대했는걸요.”
  • ‘특별하게’라는 네 글자엔 힘이 들어갔다.
  • ‘통통하다’는 말에 넋을 놓고 있던 백윤혜가 공찬이 그다음으로 했던 말에 수치스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 아주머니는 두 사람의 미세한 얼굴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풀어보려 그녀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 “다행이네! 다행이군! 저는 하루빨리 작은 도련님을 보고 싶어요!”
  • “…”
  • 백윤혜의 낯빛이 또다시 창백해졌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옆에 서있는 훤칠한 남자를 올려다봤다.
  • 그녀 역시 아이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공찬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 그 말을 들은 공찬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조금 전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조금씩 차가워졌다.
  • “노력… 해볼게요!”
  • 그때, 별장 안으로부터 기쁨에 찬 늙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윤혜야, 윤혜 온 거니? 왜 이제야 온 거야? 할머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이리 와! 우리 윤혜 얼굴 좀 보자!”
  • 별장에 들어서자마자 백윤혜가 거실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공 씨 가문의 할머니를 보게 되었다. 자수 문양의 한복 차림을 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엔 주름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피부가 맑고 투명하기까지 했다.
  •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