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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말만 그렇게 하는 거지 속은 따뜻한 녀석이거든!

  • 무릎 옆에 떨어진 백윤혜의 손가락이 너무 힘을 준 탓으로 하얗게 물들었다. 그 말을 들은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그녀는 그렇게 쉽게 넘어갈 공찬이 아닐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쉽게 이 결혼을 동의할 공찬도 아니었다.
  • 여사님이 홧김에 공찬을 흘겨보았다.
  • “이 자식이, 그게 무슨 소리야! 좋은 남편이 될 자신이 없다니! 너, 똑똑히 들어. 윤혜랑 결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 어디서 유세야!”
  • 여사님이 다시 고개를 돌려 백윤혜에게 자상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 “얘 헛소리하는 거니까 아예 신경도 쓰지 마! 이 녀석은 내가 제일 잘 알아. 말만 그렇게 하는 거지 속은 따뜻한 녀석이거든!”
  • 마치 국가 일급비밀이라도 알아낸 듯이 여사님이 백윤혜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 “조금만 더 노력해서 공 씨 가문의 아이를 갖도록 해. 그때 되면 아주 찍소리도 못할 거야!”
  • 하지만 여사님과 꽤나 가까운 곳에 앉아있었기에 공찬 역시 그 말들을 다 듣고 있었다.
  • 백윤혜가 머쓱한 얼굴로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 “할머니, 저랑 찬이 결혼은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정말요.”
  • 그녀가 또다시 공찬의 눈치를 살폈다. 공찬은 근력운동으로 튼튼해진 긴 다리를 꼬고 아주 편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앉았다. 잘 닦은 구두는 유난히 반짝반짝 빛이 났다.
  • 여유로운 그의 모습이 마치 그들이 뭐라고 얘기하던 상관하지 않으려는 것만 같았다.
  • 설사 여사님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도, 못 들은 척했겠지?
  • “할머니, 사실은…”
  • 백윤혜가 무슨 말을 하려 입을 열었지만 절반도 채 내뱉지 못했다.
  • “할머니!”
  • 불을 붙이고 입에 문지 한참도 되지 않은 담배를 땅에 버려 구두로 불을 껐다. 공찬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시선이 백윤혜를 스쳐지나 여사님에게 떨어졌다.
  • “이제 이런 얘기 그만하셔. 밥 없어요? 배고파요!”
  • 이 주제는 이것으로 끝이 났다.
  • 백윤혜가 하려던 말은 목구멍에 막혀버렸고 눈만 크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뜬끔없는 밥 타령에 여사님이 어이없었지만 얼굴엔 자애로운 미소가 어려있었다.
  • “이 녀석아! 윤혜랑 같이 오라고 해놓고서 너희들 굶어서 보내기라도 할까 봐? 밥은 이미 준비된 지 오래됐지! 가자, 가! 밥 먹으러 갑시다.”
  • 그녀가 백윤혜에게 말했다.
  • “우리 강아지, 이리 와. 날 부축해!”
  • 넋을 잃고 있던 백윤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네.”
  • 그녀가 여사님을 부축했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은 순간, 여사님이 눈썹 사이를 세게 찌푸리더니 가슴 아픈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 “손이 왜 이렇게 차?”
  • 공찬 역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 표정이 굳어짐과 동시에 백윤혜가 어정쩡하게 손을 거두었다.
  • “아… 아마 오늘 날씨가 추워서 그런 가봐요. 겉옷을 챙긴다는 게 까먹었거든요.”
  • “아이고, 어쩜! 조심해야지. 혹시라도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 조금 이따 허 씨 아주머니더러 겉옷 하나 챙겨오라고 할게. 몸이 차면 여자한테 안 좋아. 특히 임신엔 더더욱!”
  • 여사님이 계속해서 잔소리를 쏟아부었다. 말하면서 그녀가 지팡이를 짚고 긴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 길게 늘어놓은 잔소리들 중 정작 기억에 남았던 구절은 고작 몇 마디도 되지 않았다.
  • 살얼음같이 차가워진 공찬의 눈빛을 그녀가 보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 마치 하나의 물건을 흔상하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를 샅샅이 훑어봤다.
  • 그에겐 눈빛 하나로 사람을 혹사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입가에 머금은 냉소 역시 그녀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게 했다.
  • 언제부터 그녀와 공찬이 이런 사이가 되어버린 걸까?
  • 식사를 다 하고 나니 반 시간이 흘렀다.
  • 식사가 끝난 뒤, 백윤혜가 여사님을 모시고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꽃꽂이도 습득했다. 공찬의 차에 다시 탔을 때, 이미 오후 네시가 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