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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다쳤네

  • 그녀의 뒤를 따르던 백윤혜가 몇 번이나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다.
  • “소영아, 나 이제 그만 갈래…”
  • 공찬이 정해준 통금 시간은 10시다. 조금만 지나면 그 시간이 될 것이고, 그녀는 그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 괜한 시비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 “조금만! 조금만 있다가!”
  • 지소영이 잔뜩 흥분해서 그녀를 붙잡았다. 이제 곧 저가 사인받을 차례였다!
  • 절대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 백윤혜도 더 이상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사인받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 사이에 끼어있다 보니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언젠지도 모르게 지소영이 이미 그녀의 손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지소영과 그녀의 사이에 몇 명이나 더 있었다.
  • 사인받을 생각이 없었던 백윤혜가 차라리 잘 됐다 싶어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려고 어떻게든 비집고 나가려 했다.
  • 하지만 그때, 누군가 팔꿈치로 그녀를 밀쳤다. 더군다나 그녀는 힐을 신고 있었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더니 그녀가 그대로 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다들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었다. 바닥에 부딪혀 까진 팔은 또 누군가에게 밟히고 말았다.
  • “아!”
  • 너무 아팠다.
  •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던 이곳은 더더욱 소란스러워졌다.
  • “여기 누가 넘어졌어요!”
  • 수도 없이 많은 다리들이 백윤혜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녀가 겨우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누군가 또 그녀를 밀쳤다. 그녀가 또다시 영락없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 사람들 사이에서 울러퍼진 목소리가 박형준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사인에 집중하던 그가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멈추더니, 소란스러운 그곳에 시선을 돌렸다.
  •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 사인받을 생각에 들떠있는 팬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신경 쓰지 마요. 형준 오빠! 일단 사인부터 해줘요. 저 되게 오랫동안 기다렸단 말이에요!”
  • 지소영이 마침 바로 다음 순서였다. 그녀가 간신히 흰 팔뚝을 쭉 내밀며 말했다.
  • “맞아요! 빨리 사인해줘요. 제 것도!”
  • 뒤에서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도 떠들기 시작했다.
  • 박형준의 눈썹 사이는 오히려 짙게 주름이 잡혔다. 의자에 앉아있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훤칠한 몸매는 유난히 돋보였다. 그가 펜을 내려놓고는 바로 옆에 서있던 매니저한테 귓속말로 얘기했다.
  • 매니저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 안 된다고 반박하려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박형준이 이미 손에 들고 있던 펜을 그의 손에 넘겨주고 곧은 자세로 무대 아래로 걸어내려갔다.
  • 콘서트가 끝난 뒤의 팬사인회는 팬들을 위한 사랑이 담긴 팬 서비스였다. 그러니 그는 그런 팬사인회에서 아무도 다치지 않길 바랐다.
  • 박형준이 움직이자 여자 팬들이 소리를 지르며 그를 쫓아갔다.
  • 이건 아니다 싶어 매니저가 보안팀에게 지시했다.
  • “뭐 하는 거야? 당장 쫓아가지 않고!”
  • 보안팀이 투입하자, 사람들로 붐비는 관객석에 아주 좁은 통로가 생겼다. 그 통로의 끝엔, 눈물을 머금고 바닥에 주저앉은 백윤혜가 있었다.
  •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뽀얀 팔뚝 위에 흉하게 남은 상처를 쳐다봤다.
  • 콘서트장의 이상한 분위기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이다.
  • “윤혜야!”
  • 몸을 돌린 지소영이 그녀를 한눈에 알아봤다. 바닥에 주저앉은 저 여자, 백윤혜잖아!
  • 그리고 그녀의 ‘윤혜야’라는 말 한마디에 박형준이 발걸음을 멈췄다.
  •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여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결 좋은 긴 생머리가 주먹만 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흐릿한 조명으로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 그녀였다.
  • 일초의 망설임 뒤, 그가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 “다쳤네.”
  • 시린 상처에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주옥같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백윤혜가 두 눈을 부릅 뜬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하늘색의 말간 눈동자와 마주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