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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의 탐험기

카사노바의 탐험기

만두나와라뚝딱

Last update: 2021-11-04

제1화 무인도에 추락하다

  • “저기요, 그쪽도 두바이로 가시나 봐요?”
  • 좌석에 앉자마자 옆 좌석에 앉은 여인이 호기심 어린 말투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
  • “네, 맞아요!”
  • 나는 대충 대답하고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여인은 눈이 번쩍 뜨이는 미인은 아니었다. 외까풀에 작은 코, 하지만 크고 매력적인 눈, 옅은 보조개, 친근한 인상을 주는 여인이었다.
  • 순간 나는 처음 본 이 여인에게 호감이 갔다. 매력적인 볼륨감을 자랑하는 그녀의 가슴 때문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른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명품들 때문이었다. 샤넬 봄 신상으로 추정되는 저 코트는 아마 ‘블랙핑크 제니 코트’로 많이 알려진 그 코트가 맞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이런 것들을 한눈에 알아봤냐고? 그건 내가 예전에 어떤 직업에 종사했는지 알아보면 답이 나온다….
  • 탐색하는 듯한 나의 눈빛에 여자가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쑥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 “저기, 그쪽도 두바이로 놀러 가요?”
  • 놀러 간다라… 내가 전 재산을 들여 그곳에 가려는 건 놀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지금 두바이로 길거리 구걸을 하러 떠나는 중이다!
  • 나는 담담히 미소 지으며 답했다.
  • “아니요. 국제융자 관련 초반 고찰 작업을 하러 갑니다!”
  • 여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미소 하나로 지금 그녀는 나의 이 거창한 답변에 대해서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살면서 자주 들었던 답변이라 그럴 것이다. 이 여자는 귀한 집안의 따님이 분명했다.
  • “그쪽은 무슨 일 해요?”
  • 그 옆에 있던 세속에 찌든 얼굴을 한 여자가 내 대단한 발언을 듣고 두 눈을 빛내며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 나는 옆 좌석의 여인을 힐끗 바라보고는 자랑스럽게 답했다.
  • “예전에는 대기업 보안 고문을 맡았었는데 회사의 발전 방향이 나랑은 잘 맞지 않아서 사직하고, 지금은 IT업계에서 발전하고…”
  • “경비직이랑 피시방 직원을 이렇게까지 위대하게 설명하는 너도 참 대단하다!”
  • 순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나는, 분노의 눈길로 불쑥 나타난 긴 다리의 스튜어디스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 “여혜미, 나 민원 넣을 거야!”
  • 김태희를 닮은 외모의 이 스튜어디스는 놀랍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반박했다.
  • “너 티켓값도 내가 다 내줬는데, 지금 나를 상대로 민원을 넣겠다고? 너 양심은 밥 말아 먹었냐?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정도가 있지….”
  • 말을 마친 그녀는 내가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한번 흘기더니 자리를 떠나버렸다. 잘록한 허리를 요염하게 흔들며 걸어가는 뒷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저 얄미운 여자의 섹시한 애플힙을 사정없이 때려 주고 싶었다.
  • 여혜미라고 부르는 저 여자는 내 사촌 누나였다. 사촌이라고 하지만 혈연관계가 아니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 집안은 소문난 대가족이라 삼대를 다 파헤쳐도 여혜미와 내 조상 간에는 접점이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끼리 워낙 사이가 좋으셔서 나랑 여혜미는 기저귀 차던 시절부터 함께 자랐다.
  • 우리는 어려서부터 눈만 마주치면 치고받으면서 컸고, 아까 그녀가 했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 나는 군대를 복역하고 유명한 유흥업소에서 경비로 일하다가 해고당하고, 나중에 PC방 직원으로 일했는데 그것도 얼마 못 버티고 해고당했다. 쫄쫄 굶을 처지에 처했을 때, 인터넷 뉴스를 봤는데 두바이 길거리에서 돈을 구걸하면 하루에 수천 달러씩이나 번다는 것이다.
  • 그 뉴스 하나가 내 마음을 움직였고, 마침 두바이 항공편에서 스튜어디스로 일하는 여혜미에게 도움을 청했다. 내가 더는 나라 발전에 피해 주지 않게 되었다고 판단한 그녀는, 전적으로 찬성이라며 티켓까지 끊어 주었다. 나는 그렇게 두바이행 항공편에 성공적으로 올라탔다.
  • 여혜미가 떠나자 두 여인이 이상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게 무슨 망신인가!
  • 어색한 분위기에 내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데, 창밖에서 짙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제길, 이게 무슨 상황이지….
  • 순간 당황한 나는 곧장 일어서서 창밖을 가리키며 크게 비명을 질렀다.
  • “연기… 연기.…”
  •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행기는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신속히 추락하는 느낌이 들면서 좌석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 눈앞이 번쩍하더니 출입문 한쪽이 뜯겨 나가고, 강풍이 들이닥쳤다. 출입문 가까이에 앉았던 승객들은 강한 기류에 의해 비명과 함께 밖으로 쓸려나갔다.
  • “악…세상에…”
  • “Shit…”
  • 승객들의 비명으로 비행기 내부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뜯겨 나간 문틈으로 유리 조각들과 금속 파편들이 날려 들어왔다. 아까 얘기를 나누었던 세속에 찌든 여자는 내 눈앞에서 날아온 금속 파편에 가슴이 찔렸다….
  • 비행기는 점점 흔들림이 심해졌고 나는 어지러움에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몸이 앞으로 꺾이더니 나는 앞 좌석에 머리를 부딪치며 의식을 잃었다.
  • 극심한 통증과 함께 정신을 차리고 보니, 품 안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안겨 있었다. 눈을 뜨고 얼굴을 확인하자 아까 비행기에서 내 옆 좌석에 앉았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산낙지 모양으로 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꼭 감은 두 눈, 이미 번져버린 화장,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 내가 움직이자 여자가 무의식적으로 나를 더 꽉 껴안더니 마치 고양이처럼 내 품을 파고들었다. 여자의 탐스러운 가슴이 내 가슴에 닿자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이때 다행히 주변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내 주의를 분산시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녀와 나는 부드러운 모래사장에 쓰러져 있었고, 주변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 비행기 잔해들, 누워서 움직임이 없는 사람들, 파도가 밀려오자 일부 잔해들과 시체들이 파도를 따라 바다로 쓸려 나갔고, 동시에 새로운 잔해들과 사람들이 밀려오는 기괴한 광경을 반복하고 있었다.
  • 이곳은…어디지? 무인도인가…
  • 나는 기를 쓰고 기억을 더듬었다. 비행기가 추락하던 순간이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올랐다.
  • 제길! 내가 수천 미터 고공에서 추락하고도 살아남은 생존자라니!
  • 순간 벅찬 감동이 몰려왔고, 나는 여자의 얼굴에 쪽하고 키스했다.
  • 그 순간, 여자가 눈을 떴고 멍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그 여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악! 변태!”
  • 하지만 돌아온 건 파도 소리와, 내 쓸쓸한 웃음소리뿐이었다.
  • “그만 소리 질러요. 그렇게 소리 질러서 경찰이라도 불러온다면, 감옥에 간다고 해도 나는 웃으면서 갈 거예요!”
  • 여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시체들을 보자 머리칼을 잡아 뜯으며 더 크게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 나는 힘껏 몸을 날려 그녀를 땅바닥에 밀치고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 여자는 계속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질 쳤고, 우리의 몸이 서로 부딪치면서 내 몸에서 불량 신호가 전해졌다.
  • 그녀도 내 반응을 눈치챘는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두 눈을 휘둥그레 떴고,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 “첫째, 우리는 지금 이 무인도에 갇혔고, 마실 물조차 보장할 수 없어요. 목이 다 마를 때까지 비명을 질러도 마실 물이 없다는 말씀이에요. 둘째,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미지수예요. 그쪽 비명이 야생 늑대나 호랑이를 불러온다면 우린 아주 처참한 모습으로 죽을 거예요. 그러니까, 소리 좀 지르지 마세요! 알겠나요? 알아들었으면 놓아드릴게요.”
  •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나를 바라보던 여인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그녀를 놓아주었다.
  • 뭘 이렇게 말을 잘 듣는담?
  • 나는 그녀를 부축해 일으키고는 물었다.
  • “이름이 뭐예요?”
  • 그녀는 또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끼며 대답했다.
  • “티나요!”
  • “네, 나는 여택이라고 해요. 지금부터 티나 씨는 내가 보호할 거예요! 내 말만 잘 들으면 아무도 티나 씨를 괴롭히지 못할 거예요!”
  • “하지만, 섬에 다른 사람이 있어요?”
  • 티나의 한마디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참 귀엽고 백치미가 넘치는 여자였다!
  • 얘는 농담도 못 알아듣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