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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따뜻한 여인의 향기

  • 나는 불에 데는 듯한 고통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눈꺼풀은 연 덩이를 달아맨 것처럼 무거웠고 귀에서는 윙윙 소리가 났다. 맞아서 부어오른 눈을 겨우 뜨고 앞을 보니 시커멓게 짙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 “남자는 죽이면 안 돼!”
  • 박준의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 “이 녀석은 야외 생존 방법을 알고 있기에 살려두면 쓸모가 있어!”
  • “저 여인은…”
  • “여인은 갖고 놀아도 되고 음식으로 해도 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 몸에 난 상처가 바닷물과 접촉하자 참기 어려운 통증이 몰려왔다. 나는 그냥 죽은 척할 수 없어 저도 모르게 신음을 냈고 몸은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켰다.
  • 박준은 한 발로 내 가슴을 딛고 나를 내려다보며 손에는 내가 가져온 도끼를 쳐들고 있었다.
  • 나는 입을 벌렸으나 입안에 풀을 바른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 “너 줄곧 자기를 대단하게 생각했지! 하지만 지금은 죽은 개처럼 내 발 밑에 깔려 있잖아. 결국 내가 가장 대단한 사람이야!”
  • 그의 표정은 득의양양했다. 도끼가 점점 아래로 내려오더니 차갑고 예리한 도끼날이 내 목에 닿았다.
  • “이 무인도에서 내가 유일한 왕이야!”
  • 박준은 이를 악물며 나한테 말했다. 그의 흉악한 얼굴을 보며 나는 인류 문명사회와 멀리 떨어진 우리는 지금 무인도에서 원시사회로 돌아갔고 인류의 뼛속에 오래도록 숨어 있으면서 지금까지 소멸하지 않은 야만성이 박준의 몸에서 싹트고 미친 듯이 자라고 있음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 애초에 박준은 모든 사람을 집결시키고 스스로 리더가 되려는 욕심뿐이었다. 사실 그의 이 생각은 내 생각과 비슷했다. 누구도 자기의 운명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기 싫어하니까.
  • 여러 사람의 믿음은 사실 일종 무거운 심리 부담이다. 리더로서 박준은 먹을 것이 다 떨어지게 되자 성격이 이처럼 비뚤어지게 된 것이었다.
  • 여인을 유린하고 죽은 사람의 고기를 먹고! 일단 이런 일이 시작되면 죄악의 영혼은 마치 악의 꽃에 비료를 준 것처럼 침몰을 멈출 수 없게 된다!
  • 지금의 박준은 사실상 정신 상태가 극에 달할 정도로 취약하고 실성할 정도로 신경질적이었다. 만약 지금 그의 말을 거절한다면 그는 주저 없이 나를 죽일 것이고 심윤아도 지옥과 같은 끔찍한 나락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 나는 신음을 하며 손으로 힘주어 땅을 짚고 고통스레 말했다.
  • “너를 따를게!”
  • 박준은 한참이나 나를 응시하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넌 너무 사나워. 시름을 놓기 위해서는 너를 병신으로 만들어야겠어. 그러지 않으면 어느 날엔가 내가 쓰러져서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 말을 마치고 그는 도끼를 쳐들어 내 넓적다리를 내리찍었다.
  • 거의 동시에 나는 손으로 모래 한 움큼을 쥐어 그의 얼굴에 뿌리며 필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렸다.
  • 아무런 방비도 없던 박준은 황급히 모래가 들어간 눈을 손으로 비볐다. 나는 온몸의 힘들 다해 벌떡 일어나며 박준을 덮쳐 땅에 쓰러뜨렸다.
  • 박준은 상황이 상서롭지 못하자 나를 찍으려고 도끼를 마구 휘둘러댔다. 이미 체력이 얼마 남지 않은 나는 반드시 빨리 끝내야 했으므로 박준이 휘두르는 도끼를 피하지 않았다.
  • 갑자기 등에 통증이 몰려드는 것을 보면 도끼에 찍혀 살갗이 떨어져 나간 듯했다. 극심한 통증은 오히려 내 정신을 더욱 분발시켰다. 나는 박준의 코를 향해 호되게 주먹을 날렸다.
  • 코는 인체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비명을 지르는 박준의 얼굴에 콧물,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 나는 이를 사리물고 한주먹, 또 한주먹 연속 내리쳤고 박준은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결국, 나처럼 참고 견디는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아보지 못한 박준은 이내 저항을 포기했다.
  • 나는 그의 손에서 도끼를 빼앗았다. 이 모든 동작이 너무도 빠르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몇몇 남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몽둥이를 집어 들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늦었다!
  • 나는 도끼날을 박준의 목에 대고 얼른 심윤아를 데려오지 않으면 박준을 죽여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 보아하니 요 며칠간 박준이 그들한테서 리더의 권위를 확고히 한 것 같았다. 박준의 목숨이 내 손에 든 것을 보고 그들은 한 걸음도 더 내디디지 못했다.
  • 박준은 눈을 감고 한마디 말도 없이 죽은 척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정말 총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대응 방법이니까.
  • 심윤아는 이내 내 앞으로 끌려왔다. 너무 울어서 두 눈이 복숭아처럼 부어오른 그녀가 나를 보고 무슨 말인가 하려는 것을 내가 저지했다.
  • 그리고 앞에 있는 몇몇 남자들한테 소리쳤다.
  • “너희들 모두 몸을 돌리고 앞으로 백 보씩 걸어! 한걸음이라도 많거나 적게 걸으면 바로 박준을 죽여버리겠다!”
  • 몇몇 남자들은 내 말에 따라 몸을 돌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한주먹에 박준을 정신 잃게 하고 도끼날로 그의 오른 손목을 쭉 그었다.
  • 시뻘건 피가 그의 손목에서 콸콸 흘러나왔다. 만약 제때 구급하면 죽지는 않겠지만 대신 이 손은 병신이 되고 말 것이다. 만약 그가 바로 죽어버린다고 해도 나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번에 우리는 감정이 틀어질 만큼 틀어져서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 무슨 자비를 베풀 필요도 없었다.
  • 내가 심윤아를 이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녀가 나를 반쯤 안고 간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이었다. 이미 체력이 거의 바닥이 난 나는 그녀를 따라 비틀거리며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 사실 이것은 한차례 도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그 남자들이 조금만 더 결단력이 있어도 먼저 달려와 나를 죽이고 다시 다른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하지만 그들은 박준을 구급하는 게 더 급했던지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 심윤아와 함께 동굴로 돌아온 나는 여혜미와 티나의 빗방울을 머금은 배꽃 같은 얼굴을 보며 우는 것보다 보기에 더 구차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시름을 놓는 순간, 머릿속이 새까매지며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 나는 극심한 통증 때문에 깨어났다. 여혜미가 더운물로 내 등에 있는 상처를 자세히 씻고 있었다. 그 아픔은 정말이지 인간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 나는 온 얼굴에 땀을 흘리며 머리를 떨었다. 심윤아가 옆에 앉아 부드럽고 탄성이 있는 자기 다리에 내 머리를 올려놓고 내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머리를 숙여 멍하니 나를 보고 있었다.
  • “몹시 아프죠…”
  • 티나가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천 조각으로 한번, 또 한 번 내 얼굴의 땀을 닦았다.
  • 통증의 주의력을 전이시키기 위해 나는 티나와 심윤하를 쳐다보며 두 사람의 곡선미, 특히 튀어나온 부분을 비교했다.
  • 두 사람은 이내 눈치를 챘으나 얼굴을 붉히면서도 내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 그러자 오히려 멋쩍은 것은 나였다. 여혜미는 내 상처를 다 싸매고 내 앞으로 돌아와서 굳은 표정을 짓고 말했다.
  • “여택, 나 아주 중요한 일을 너한테 말하려고 해!”
  • “맞춰봐. 윤아가 박준의 무리에서 무엇을 봤는지!”
  • 나는 여혜미가 무슨 중요한 말을 하랴 싶어 귀가 솔깃했는데 이 말을 듣고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 “자기 동료 고기를 먹은 걸 그러나!”
  • “먹어…”
  • 티나가 소리를 지르며 나는 듯이 동굴 입구로 달려가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 여혜미는 얼굴을 찡그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 “그걸 어떻게 알았지?”
  • “박준에게서 들은 거야. 그리고 사실 내가 짐작했던 것이기도 하고.”
  •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 “이런 무인도에 있으면 법률의 제한을 벗어난 인간의 저열한 근성이 무한하게 확대될 수 있어. 많은 영화에서도 이런 장면이 나오거든. 하지만 이는 절대로 영화에서 나오는 갈등 요소가 아니야. 인류의 생존 본능이지.”
  • “그럼 여택 씨는요?”
  • 심윤아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 “어느 날 먹을 게 다 떨어지면 여택 씨도 우리를 잡아먹을 거예요?”
  • “아니! 나는 이슬람교도거든요!”
  •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심윤아는 멍하니 나를 보다가 여혜미의 주먹이 내 몸에 떨어져서야 내 말이 농담인 줄 알아차렸다.
  • 어둠이 점점 짙어지자 나는 그녀들이 먹을 것을 찾으러 단독으로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겨우 하나밖에 남지 않은 코코넛을 물과 함께 먹으며 배고픔을 달랬다.
  • 체력 소모를 줄이기 위해 우리는 먹자마자 각각 자리에 누웠다.
  • 깊이 잠들었던 나는 몽롱한 가운데 향긋하고 나긋한 몸이 내 품속을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다.
  • 눈을 뜨지 않아도 나는 그 향긋한 냄새를 분별할 수 있었다. 바로 심윤아였다.
  • “전 너무 무서워요. 내가 무엇을 봤는지 여택 씨는 모르죠…”
  • 심윤아는 입을 나의 귓전에 대고 흐느끼며 말했다.
  • “그 남자는 몸의 일부 고기가 뜯겨서 하얀 뼈가 다 드러났어요… 그는 눈을 뜨고 있었는데… 그들이 어쩜 그렇게 할 수 있어요?”
  • “그리고 몇몇 여인들도 발가벗겨진 채로 짐승처럼 땅에 엎드려서 남자들에게…”
  • “전 정말 무서워요… 만약 여택 씨가 저를 구해 주지 않았다면 저도 그녀들처럼 될까 봐 무서웠어요…”
  • 여기까지 말하고 심윤아는 감정을 억제할 수 없어 부들부들 떨며 내 몸에 더욱 바싹 다가들었다.
  • “그때, 여택 씨가 왕자처럼 나타났고… 나를 자기 여인이라고 말할 때… 그 순간 저는 감동되어 울고 싶었어요…”
  • 그녀가 나에게 바싹 다가붙자 따뜻한 콧바람이 내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러자 내 마음속에서 깊이 잠자던 맹수가 그녀의 콧바람과 함께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다.
  • 나는 대뜸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어둠 속에서 부드러운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다가 길을 잃은 듯이 미끄러져 나의 속눈썹, 볼을 거쳐 내려와 시탐하듯 내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반복했다.
  • 이런 상황에서도 내가 그냥 모르쇠를 댄다면 그것은 고자나 할 짓이었다. 나는 머리를 들어, 내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포개고 게걸스럽게 빨아댔다.
  • 심윤아는 내가 자기 입술을 더듬는 데 대해 서툴게 반응했다. 나는 끊임없이 그녀의 입술을 빨았고 그녀의 달콤한 음성은 그녀의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내 몸속에서 여태껏 잠자던 이름 모를 힘이 강력하게 솟구쳤다. 나의 두 손은 풍만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몸을 더듬으며 곡선미가 아름다운 어깨와 정교한 쇄골을 거쳐 아래로 내려가며 마침내 봉긋하게 솟은 봉우리에 닿았다…
  •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윤아는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나를 밀어내고 한쪽으로 굴러가서 짐짓 자는 척했다.
  • 티나가 기어 일어나서 살금살금 나한테로 다가왔다.
  • “여택 씨, 전 무서워요…”
  • 티나는 조심스럽게 내 곁에 누워 곁눈질로 나를 보며 손을 가볍게 내 어깨에 얹었다.
  • “눈을 감으면 윤아가 하던 말이 생각나요. 전 방금 제가 다른 사람에게 잡혀서 커다란 솥에 들어가 끓는 물에 삶기는 꿈을 꾸었어요… 여택 씨, 전 정말 무서워요…”
  • 티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 “절 안아줄 수 있어요?”
  • 나는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끌어안았다. 심윤아에 비해 티나의 체격은 조금 왜소했다. 하지만 올록볼록 튀어나온 부분은 합격점을 받을만했다. 그녀의 몸에서 심윤아와 다른 냄새를 맡으며 내 몸속에 아직 꺼지지 않은 화염이 기름을 부은 것처럼 맹렬하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