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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깊은 밤 빗소리

  • “돌아왔어요!”
  • 티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저렇게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가슴이 뭉클했다.
  • 조금 전까지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오던 기억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내가 조금만 느렸어도 아마 밀림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여인들도 아마 생존의 희망을 잃었을 테지.
  • 이제 내 목숨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나를 믿고 따르는 이 여자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 내가 손짓하자 여자들은 힘겹게 넝쿨을 옮겨 동굴 아래로 드리웠다. 내가 동굴 안에 들어서자 그녀들은 수확해 온 먹거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새알, 나무토막, 코코넛, 종려나무 껍질 기타 등등 잡동사니들이 있었다.
  • 내 몰골을 본 여자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다 찢어진 옷만 봐도 내가 얼마나 힘든 일을 겪었는지 훤히 보일 것이다. 항상 까칠하게 굴던 여혜미마저 관심 조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을 정도였다.
  • 나는 도끼를 휘둘러 코코넛에 작은 구멍을 내서 여자들에게 건네고 나도 하나 들고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청량한 코코넛 주스는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분 함량도 높아 체력회복에 효과적이었다. 코코넛 두 개를 해치우고 나니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 이어서 다시 땅으로 내려온 나는 도끼로 바닥에 구멍을 내고 새알을 묻었다. 그 위에 모닥불을 지피고 종려나무 껍질을 구웠다. 여인들도 나를 따라 나무껍질을 조심스럽게 굽기 시작했다.
  • 나무껍질을 구우면서 나는 아까의 정글 탐험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맨손으로 벌 떼를 물리치고 멧돼지를 발로 찼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여자들도 내 허세를 눈치채고 깔깔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웃다가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 “여택아!”
  • 여혜미는 눈을 비비며 나를 똑바로 마주 보고 말했다.
  • “너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 하지 마. 이제 함께 가기로 했으면 서로 돕고 의지해야지. 네가 할 수 있는 거 우리도 할 수 있어!”
  • “아, 나는 서서 소변을 보는데….”
  • 말이 끝나기 바쁘게 나는 여혜미의 손바닥을 피해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세 여인은 혐오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저 즐겁다는 듯이 웃고 말았다.
  • 나는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것이 싫었다. 목숨이 붙어 있다면 강하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내 신조이다. 아까 했던 농담도 여자들의 슬픔을 달래 주려고 일부러 한 소리였다.
  • “이제 식사해요!”
  • 나는 모닥불을 한쪽에 밀어놓고 아까 묻어두었던 새알을 꺼냈다. 껍질을 발라보니 잘 익은 흰자위가 드러났다. 맑고 투명한 빛깔이 무척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노른자위는 반숙의 상태였는데 입에 넣으니 좀 비릿하긴 했지만, 무인도에 추락한 뒤로 우리가 먹어 본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
  • 새알 몇 십 알을 게눈 감추듯 다 먹어버린 우리는 만족스러운 트림을 하고 바닥에 드러누워 따뜻한 햇볕을 한껏 만끽했다.
  • “자, 이제 일하러 갑시다!”
  • 빈 코코넛 껍데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여혜미와 함께 밀림에 들어가기로 했다. 가기 전 티나와 심윤아를 동굴로 올려준 뒤, 종려나무 껍질을 섬유로 변할 때까지 계속 구우라고 시켰다.
  • 나와 여혜미는 도끼로 표시해둔 길을 따라 밀림으로 들어섰다. 여인초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 나는 여혜미에게 여인초에서 식수를 채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코코넛 껍데기에 물을 가득 담았다. 그리고 나무로 올라가 코코넛 몇 개를 더 땄다. 저장하기 편한 코코넛은 동굴에 보관하고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꺼내서 먹기로 했다.
  • 내가 도끼로 종려나무 껍질을 벗기자 여혜미가 이건 뭐에 쓸 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가 문명사회에서 즐겨 사용하는 매트리스도 종려나무 껍질로 만든 것이라고 답했다. 주워 온 옷가지들을 박준 패거리들한테 빼앗겼으니 밤에 딱딱한 돌 위에서 자려면 아주 힘들 것이다. 종려나무 껍질을 모닥불에 구우면 섬유로 변하는데 그걸 땅에 깔고 자면 습기도 예방할 수 있어서 제법 편하게 잘 수 있을 것이다. 시간 날 때 나무껍질로 노끈을 만들어서 침대를 만들면 더 완벽할 것이다.
  • 여혜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 “너 어떻게 이렇게 많은 걸 알고 있어? 군대 갔을 때 도대체 어디를 갔던 거야? 넌 복역하고 나서 부대에서 있었던 일을 한 번도 얘기한 적 없잖아. 너 부대에서 승진하고 부대에 남을 거라 했는데 왜 갑자기 돌아온 거야?”
  • 도끼질하던 내 손이 잠시 허공에 멈췄다. 누구에게나 마음에 담아두고 얘기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 여혜미의 질문은 내 아픈 기억을 들추고 돌이키고 싶지 않았던 지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 “아, 유흥업소에 갔다가 들켜서 잘렸어!”
  • 나는 담담히 대답하고는 다시 도끼질을 시작했다. 여혜미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 수확을 끝낸 우리는 코코넛, 종려나무 껍질, 새알, 나무토막과 칡넝쿨을 들고 동굴로 돌아왔다. 동굴 안 습기는 모닥불 덕분에 완전히 제거되고 따뜻한 온기가 감돌았다. 우리는 2인 1조로 나뉘어 티나와 심윤아는 종려나무 껍질을 굽고 나와 여혜미는 칡넝쿨로 사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 칡넝쿨은 단단하고 잘 부러지지 않아서 사다리를 만들기에는 이만한 재료가 없었다. 몇 번 꼬기만 하면 아무리 무거운 사람이 밟아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 하지만 너무 거친 탓에 여혜미의 부드러운 손에는 어느새 물집이 잡혔다. 하지만 그 성격에 절대 애교를 부리거나 게으름을 피우거나 하지 않고 이 악물고 나와 함께 작업을 계속했다.
  • 사다리가 만들어지자 날도 어두워졌다. 동굴 입구에서 내려다보니 지는 해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구름들이 노을과 함께 빛나고 있는 광경이 마치 천국에 온 듯 아름다웠다.
  • 나는 문명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이 아름다운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몇만 년 몇십만 년 전의 인류도 지금의 우리와 비슷한 생활을 했던 것이 아닐까?
  • 나는 사다리를 타고 땅으로 내려가 나무토막들을 구해다 모닥불에 굽기 시작했다. 동굴 안은 통풍이 잘 되지 않아 연소가 덜 된 목재에서 일산화탄소와 같은 유독 기체들이 생기기 쉽다. 그것들은 잠자는 우리의 목숨을 조용히 빼앗아갈 것이다.
  • 하지만 목탄은 이런 문제들을 피할 수 있고 오히려 동굴 안 유독 기체들을 빨아들이는 작용까지 있을뿐더러 보관도 편리하다. 이곳은 열대우림이라 비가 자주 내릴 것이고 비가 내린 뒤에는 마른 목재들을 구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목탄을 많이 만들어 동굴에 보관하는 편이 좋았다.
  • “정말 세심하시군요!”
  • 티나가 동그랗고 큰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 “참, 우리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갖도록 해요.”
  • 나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다들 전공이 뭐였고 잘 할 수 있는 게 뭔지 한번 얘기해봐요. 이렇게 되면 임무를 나눠줄 때 편리하니까요!”
  • “서울대에서 패션 디자인을 공부했고요, 취미로 꽃꽂이랑 다도를 배웠어요….”
  • 먼저 말문을 뗀 티나는 우리 세 명의 시큰둥한 표정을 보고는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 꽃꽂이… 다도… 패션 디자인… 이곳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티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었다….
  • “나는….”
  • 여혜미가 입을 떼자 나는 얼른 됐다고 손사래를 쳤다. 어려서부터 같이 자랐으니 여혜미의 상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 “너 유일하게 쓸모 있는 점이 학교에서 의학을 잠깐 공부했다는 것인데, 지금 우린 의약품이 없어!”
  • 나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심윤아를 바라보았다. 이 아름다운 스튜어디스한테 반전이 있기를 기대하며.
  • “난 인문학을 전공했어요! 음… 그리고 요가도….”
  • 심윤아는 쑥스러운 얼굴로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나는 실망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 나를 도울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식사가 끝난 뒤 내가 더 말이 없자 모두 종려나무 껍질로 만든 잠자리 위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 동굴 안에는 타닥타닥 목탄 타는 소리만 들렸고 밝은 불빛 아래 우리는 침묵을 지켰다. 오늘 체력 소모가 많았던 탓에 나는 금세 잠이 들었다. 하지만 부대에서 들인 습관이 있어 잠자는 동안에도 경각심은 늦추지 않았다.
  • 갑자기 세 여자가 자고 있는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실눈을 뜨고 보니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는 티나가 보였다. 그녀는 심윤아와 여혜미를 살피더니 살금살금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 순간 머리에 온갖 생각이 다 떠올랐다. 내 인격 매력에 반해버린 티나가 이 밤에 나한테 안기러 오는 걸까? 하지만 진짜 하게 되면 여혜미랑 심윤아도 소리를 듣고 깰 텐데…. 먼저 저들을 기절시켜야 하나?
  • 온갖 상상을 하고 있는데 이미 내 옆에 다가온 티나가 허리를 굽히고 내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깊게 잠든 척 얕은 숨을 내쉬었고 티나는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비틀비틀 나를 가로 타고 지나갔다.
  • 이게 무슨 상황이지?
  • 나는 살그머니 고개를 돌렸고 티나는 동굴 입구로 가더니 돌 하나를 옮기고 있었다. 그건 내가 안전을 위해 사다리를 접어서 위를 눌러 두었던 돌인데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설마 몰래 떠나려고?
  • 얼마 지나지 않아 티나는 돌을 옮기는 것을 포기하고 난감한 기색으로 우리를 살폈다. 무언가 참고 있는 듯한 그 표정에 그제야 나는 그녀가 뭘 하려는 건지 대강 짐작이 갔다.
  • 등을 돌린 티나는 동굴 입구에 쪼그려 앉더니 바지를 내렸다. 눈앞에 나타난 동그랗고 하얀 엉덩이가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 쪼르륵 소리와 함께 옅은 지린내가 코를 찔렀다. 나는 얼른 눈을 감았다. 티나 성격에 내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 동굴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었다.
  • 하지만 나는 끓어오르는 욕구를 참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몸소 느끼고 있었다. 티나가 조심스럽게 자리로 돌아간 뒤, 심윤아도 자리에서 일어났고 여혜미도 잇달아 일어났다.
  • 아마 세 여인은 잠들지 못하고 참고 있다가 누구 하나 먼저 행동에 옮기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 세 여자가 일을 다 보고 나자 나도 소변이 마려웠다. 나는 그녀들처럼 살금살금 나가는 대신 당당하게 일어나서 동굴 입구로 다가가 시원하게 싸버렸다. 조용한 밤에 쏴 하는 물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 자리에 돌아와 누운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한참이나 진정시켜야 했다….
  • 어색한 분위기가 동굴 안에 퍼졌고 서로의 거친 숨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아무도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 후….
  • 갑자기 광풍이 동굴 안에 휘몰아치고 모닥불은 바람에 꺼져버렸다. 어두운 동굴에서 세 여자의 비명이 들리고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입구와 가장 가까운 쪽에 누워 있던 내 몸을 사정없이 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