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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생사를 건 싸움

  • 티나는 내 눈치를 모르고 수줍어하며 자기에게 남자 친구가 없다고 말했다!
  • 나는 일부러 놀라는 척하며 물었다.
  • “그럴 리가? 티나 씨는 이렇게 예쁘고 가정 조건도 월등한데 당연히 따르는 남자도 많을 테죠!”
  • 티나가 천천히 설명했다. 그녀는 줄곧 여자 학교에만 다녔고 엄격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심지어 남자애들과 접촉할 기회조차 없었다.
  • 이렇게 보면 티나는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순수한 꼬마 토끼였다… 나는 까닭 없이 흥분되어 계속 그녀를 집적거렸다.
  • “만약 우리가 구조되지 못하고 이렇게 무인도에서 늙어 죽게 된다면 티나 씨는 죽는 날까지 남자 친구가 없다는 게 너무 유감스럽잖아요!”
  • 티나는 나를 보며 얼굴만 붉히고 말이 없었다. 내가 한 가닥의 희망을 보고 그녀와 계속 집적거리는데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여택아… 어서…”
  • 황급히 소리 지른 사람은 여혜미였다. 내가 동굴 입구로 몇 걸음 나가서 허리를 굽히고 보니 여혜미가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모양새로 아래에 서 있었는데 땀인지 눈물인지 온 얼굴이 흠뻑 젖어 있었다.
  • “윤아… 윤아가 그들에게 잡혀갔어…”
  •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들이라면… 틀림없는 박준의 무리일 것이다.
  • 지난번에 그들이 우리의 물건을 다 가져가도록 양보한 것은 사실 그들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냥 싸우다 보면 여자들 셋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을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 이 굴욕을 나는 그냥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동굴을 찾은 후, 그녀들에게 자리를 잡아주고 박준의 무리를 찾아가 따질 생각이었는데 몸에 열이 나는 바람에 당분간 그 생각을 접어야 했다.
  • 하지만 예상외로 내가 그들을 찾아가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도발을 걸어올 줄이야.
  • 나는 분명히 박준의 무리에 무슨 변고가 생겼다고 짐작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도 이런 돌발 상황을 만들지 않을 것이었다.
  • 나는 여혜미를 끌어올리고 사실의 자초지종을 물었다.
  • 앞서 내가 그녀들에게 절대 밀림에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한 바가 있어 그녀들은 어쩔 수 없이 해변에 가서 먹을 것을 찾았다.
  • 오후에는 오전보다 밀물이 적어 백사장에 게나 물고기가 거의 없었다. 부득이한 상황에서 그녀들은 그냥 백사장을 뒤져 조개류나 파냈는데 그렇게 파내면서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돼 심윤아의 비명이 들려왔고 여혜미가 일어나서 보니 박준과 다른 한 사내가 심윤아를 둘러메고 나는 듯이 도망가고 있었다.
  • 여혜미가 바로 도끼를 들고 박준의 무리가 묵는 곳까지 쫓아가니 남자들 몇이 몽둥이를 들고 뛰어나왔다.
  • 이제 심윤아를 구하지 못할 것은 물론 자기까지 잡히면 우리에게 이 일을 알릴 수도 없게 되는 상황이라 여혜미는 바로 결단을 내리고 돌아왔다.
  • 내가 여혜미의 손에서 도끼를 빼앗아 들고 씩씩하게 동굴 입구로 걸어가는데 그제야 여혜미는 내가 아픈 몸이라는 것을 의식한 듯했다.
  • “너…”
  • 나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손을 흔들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기다려! 그리고 동굴 밖으로 나가지 마!”
  • “하지만 넌…”
  • “지금까지 내가 바보처럼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걸 봤어?”
  • 나의 말에 여혜미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는 도끼를 들고 등나무 사다리를 타고 한 걸음씩 아래로 내려갔다.
  • 그리고 머리를 돌려 동굴 입구를 보니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 어려서부터 무슨 일에서나 득을 보면 봤지 밑지는 노릇은 절대 하지 않아 사람마다 나를 약삭빠른 놈이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내 가슴속에도 뜨거운 피가 끓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번에 비록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나는 가야 했다…
  • 심윤아가 나를 따르기로 한 그 순간부터 나는 나 자신을 그녀들 셋의 수호신으로 생각했다.
  • “저기…”
  • 머리 위에서 갑자기 티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들어 올려다보니 그녀가 동굴 입구에 엎드려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 “꼭 돌아와요!”
  • “걱정하지 말아요!”
  • 나는 손을 흔들었다.
  • “돌아오면… 저도 남자 친구를 사귀어볼 생각이에요…”
  • 나는 걸음을 비틀거리며 티나를 주시했다. 얼굴이 저녁노을처럼 빨갛게 상기된 그녀는 반짝이는 두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 “크크! 좋아요!”
  • 가슴속에 호방한 감정이 솟구친 나는 도끼를 들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그녀들의 시선을 벗어나서 나는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굽히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나의 체력은 이미 그 고열 때문에 거의 바닥이 났다. 방금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한 것은 그녀들이 걱정할까 봐서였다.
  • 체력을 회복하는 한편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지금 상대가 강하고 내가 약한 상황에서 오직 이악스럽게 나서는 방법밖에 없었다!
  • 앞서 우리가 묵었던 자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규모가 더 큰 움막 몇 개가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의 비로 적잖게 피해를 본 듯, 하나는 반쯤 무너졌고 다른 두 개도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 야외 생존 훈련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움막은 겨우 햇볕만 가릴 수 있을 뿐 비바람은 막아내지 못한다.
  • 나는 도끼를 허리춤에 찌른 후, 두 손에 불타는 장작 몇 개를 집어 들고 그들의 움막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 남자 하나가 안에서 나오더니 나를 보고 이내 몸을 돌려 안에 대고 소리를 질러댔다.
  • 그러자 가장 먼저 박준이 나오고 그의 뒤로 4명의 남자가 따랐다. 그들은 제각각 손에 몽둥이를 들고 믿는 구석이 있는 듯, 겁도 없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 “난 사람 데리러 왔어!’
  • 나는 박준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 “내 여인을 말이야!’
  • “엉! 그녀가 벌써 네 여인이 됐어?”
  • 박준은 음침한 눈길로 나를 보며 손으로 아래턱을 만졌다.
  • “정말 네 여인이라면 무엇으로 바꿔 갈 거야?”
  • “무엇을 요구하는데?”
  •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불타는 장작을 쳐들었다.
  • “내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어젯밤의 큰비에 너희들의 불이 다 꺼졌을 거야!”
  • 박준은 숨길 게 없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 “그래, 맞아! 우리는 네가 필요해! 너는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처럼 불을 지피든 거주지를 찾든 확실히 야외에서 생활하는데 일가견이 있어! 그러니까 너는 모든 사람을 위해 봉사해야 해!”
  • “내가 너희들을 위해 봉사하게 하려고 내 여인을 납치했어?”
  • 나는 씁쓸하게 박준을 바라보았다. 세상에는 박준과 같은 사람이 많고도 많다. 그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살며 반드시 다른 사람이 자기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수단을 비난하지 말고 결과를 중요시해야 해!”
  • 박준은 머리를 끄덕이며 내 말을 묵인했다.
  • 나는 목소리를 길게 뽑았다.
  • “만약 내가 싫다고 하면…”
  • 박준은 능글맞게 웃었다.
  • “솔직히 말해 우리는 먹을 것도 아주 부족해. 그래서…”
  • 박준의 웃음이 이상한 것을 보고 내 머릿속에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서며 놀라운 눈길로 그를 주시했다.
  • “너희들은…”
  • 박준은 씁쓸하게 말했다.
  • “어젯밤에 누군가 죽었고… 우리는 먹는 문제를 해결했어!”
  • 나의 위가 경련을 일으키며 구역질이 나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 나는 박준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사람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 박준의 노골적인 말은 이미 위험한 신호였다. 문명과 도덕의 틀에서 철저히 벗어난 그들은 단지 생존만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야수에 불과할 뿐이었다!
  • 우리 둘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치는 순간, 나는 그의 눈에서 적나라한 살기를 보고 잠깐의 침묵을 깨며 조금 뒤로 물러섰다.
  • “좋아! 네 요구를 들어줄게. 하지만 내 여인이 살아있다는 걸 반드시 증명해야 해!”
  • 박준이 휘파람을 불자 두 여인이 심윤아를 끌고 다른 움막에서 나왔다.
  • 뒤로 두 손을 묶인 채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울음을 터뜨렸다.
  • “여택 씨, 이 사람들이…”
  • 왼쪽에 선 뚱뚱한 중년 여인이 주먹으로 심윤아의 배를 호되게 때렸다. 심윤아는 더는 말을 못 하고 허리를 굽히며 토하기 시작했다.
  • 그 한 주먹은 그들에 대한 나의 마지막 한 가닥 연민마저 끊어버렸다.
  • “박준, 네가 요구하는 걸 내가 줄게!”
  • 내 얼굴에 경련이 일자 박준은 재빨리 위험을 느끼고 큰소리를 질렀다.
  • “죽여라!”
  • 뒤에서 휙휙 바람 소리와 함께 몇 개의 몽둥이가 나를 공격해왔다. 나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손에 쥐고 있던 장작불을 힘껏 내던졌다.
  • 몇 개의 불덩이가 허공에서 흩날리다 움막의 지붕에 떨어져 이내 짙은 연기를 피워 올렸다. 나는 도끼를 뽑아 들고 심윤아가 있는 방향으로 나는 듯이 달려갔다.
  • “어서 불을 꺼라!”
  • “저놈 죽여라…”
  • 난잡한 함성 속에서 나는 도끼를 휘두르며 사람들 속으로 사납게 들어갔다.
  • 비록 전에는 이들과 동병상련이었지만 지금은 도리를 따질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처음 동료의 고기를 먹는 순간부터 그들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 도끼가 살갗을 찢고 피가 얼굴에 튀며 비린내를 풍겨 나는 그 시절 격렬한 전쟁판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혈안이 된 나는 히스테리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죽기 살기로 피로 물든 길을 뚫었다.
  • 내가 피투성이 된 몸으로 사납게 돌진하자 심윤아를 붙잡고 있던 두 여인 중 오른쪽의 여인은 대뜸 두 눈에 흰자위만 번득거리다가 기절하고 왼쪽의 여인은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나를 향해 심윤아를 확 밀쳤다. 나는 바로 심윤아의 유연한 허리를 휘어잡아 번쩍 들어서 어깨에 둘러메고 발을 빼 도망쳤다.
  • 뒤에서 요란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박준의 무리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바짝 쫓아왔다. 그들도 지금의 상황이 이미 생사를 건 사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병이 낫지 않은 몸으로 용기만 가지고 박준의 무리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해내고 또 어깨에 사람을 메고 뛰려니 얼마 못 가서 두 다리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런대로 비틀거리며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뛰는데 그만 발이 돌부리에 걸리는 바람에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몇 바퀴 구르는 와중에도 귓가에 심윤아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 내가 미처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몽둥이 하나가 휙, 바람 소리를 내며 내 어깨에 떨어졌다.
  • 극심한 통증 때문에 나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고 손에 쥐었던 도끼도 땅에 떨어뜨렸다. 이어 나의 머리와 몸을 몽둥이로 두드리는 소리가 둔탁하고 요란하게 들려왔다.
  • 박준의 무리는 우리 둘을 에워싸고 미친 듯이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나는 앞으로 엎어져서 심윤아를 밑에 깔고 두 팔로 머리를 감싸며 막아냈으나 그냥 헛수고에 불과했다.
  • 그들이 죽어라 내려치는 몽둥이찜질에 나는 점점 정신이 희미해졌고 몽둥이 하나가 내 두 팔 틈새로 정수리를 내려치는 순간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