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리가? 티나 씨는 이렇게 예쁘고 가정 조건도 월등한데 당연히 따르는 남자도 많을 테죠!”
티나가 천천히 설명했다. 그녀는 줄곧 여자 학교에만 다녔고 엄격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심지어 남자애들과 접촉할 기회조차 없었다.
이렇게 보면 티나는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순수한 꼬마 토끼였다… 나는 까닭 없이 흥분되어 계속 그녀를 집적거렸다.
“만약 우리가 구조되지 못하고 이렇게 무인도에서 늙어 죽게 된다면 티나 씨는 죽는 날까지 남자 친구가 없다는 게 너무 유감스럽잖아요!”
티나는 나를 보며 얼굴만 붉히고 말이 없었다. 내가 한 가닥의 희망을 보고 그녀와 계속 집적거리는데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택아… 어서…”
황급히 소리 지른 사람은 여혜미였다. 내가 동굴 입구로 몇 걸음 나가서 허리를 굽히고 보니 여혜미가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모양새로 아래에 서 있었는데 땀인지 눈물인지 온 얼굴이 흠뻑 젖어 있었다.
“윤아… 윤아가 그들에게 잡혀갔어…”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들이라면… 틀림없는 박준의 무리일 것이다.
지난번에 그들이 우리의 물건을 다 가져가도록 양보한 것은 사실 그들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냥 싸우다 보면 여자들 셋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을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이 굴욕을 나는 그냥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동굴을 찾은 후, 그녀들에게 자리를 잡아주고 박준의 무리를 찾아가 따질 생각이었는데 몸에 열이 나는 바람에 당분간 그 생각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내가 그들을 찾아가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도발을 걸어올 줄이야.
나는 분명히 박준의 무리에 무슨 변고가 생겼다고 짐작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도 이런 돌발 상황을 만들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여혜미를 끌어올리고 사실의 자초지종을 물었다.
앞서 내가 그녀들에게 절대 밀림에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한 바가 있어 그녀들은 어쩔 수 없이 해변에 가서 먹을 것을 찾았다.
오후에는 오전보다 밀물이 적어 백사장에 게나 물고기가 거의 없었다. 부득이한 상황에서 그녀들은 그냥 백사장을 뒤져 조개류나 파냈는데 그렇게 파내면서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돼 심윤아의 비명이 들려왔고 여혜미가 일어나서 보니 박준과 다른 한 사내가 심윤아를 둘러메고 나는 듯이 도망가고 있었다.
여혜미가 바로 도끼를 들고 박준의 무리가 묵는 곳까지 쫓아가니 남자들 몇이 몽둥이를 들고 뛰어나왔다.
이제 심윤아를 구하지 못할 것은 물론 자기까지 잡히면 우리에게 이 일을 알릴 수도 없게 되는 상황이라 여혜미는 바로 결단을 내리고 돌아왔다.
내가 여혜미의 손에서 도끼를 빼앗아 들고 씩씩하게 동굴 입구로 걸어가는데 그제야 여혜미는 내가 아픈 몸이라는 것을 의식한 듯했다.
“너…”
나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손을 흔들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려! 그리고 동굴 밖으로 나가지 마!”
“하지만 넌…”
“지금까지 내가 바보처럼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걸 봤어?”
나의 말에 여혜미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는 도끼를 들고 등나무 사다리를 타고 한 걸음씩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머리를 돌려 동굴 입구를 보니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어려서부터 무슨 일에서나 득을 보면 봤지 밑지는 노릇은 절대 하지 않아 사람마다 나를 약삭빠른 놈이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내 가슴속에도 뜨거운 피가 끓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번에 비록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나는 가야 했다…
심윤아가 나를 따르기로 한 그 순간부터 나는 나 자신을 그녀들 셋의 수호신으로 생각했다.
“저기…”
머리 위에서 갑자기 티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들어 올려다보니 그녀가 동굴 입구에 엎드려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꼭 돌아와요!”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손을 흔들었다.
“돌아오면… 저도 남자 친구를 사귀어볼 생각이에요…”
나는 걸음을 비틀거리며 티나를 주시했다. 얼굴이 저녁노을처럼 빨갛게 상기된 그녀는 반짝이는 두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크크! 좋아요!”
가슴속에 호방한 감정이 솟구친 나는 도끼를 들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녀들의 시선을 벗어나서 나는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굽히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나의 체력은 이미 그 고열 때문에 거의 바닥이 났다. 방금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한 것은 그녀들이 걱정할까 봐서였다.
체력을 회복하는 한편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지금 상대가 강하고 내가 약한 상황에서 오직 이악스럽게 나서는 방법밖에 없었다!
앞서 우리가 묵었던 자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규모가 더 큰 움막 몇 개가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의 비로 적잖게 피해를 본 듯, 하나는 반쯤 무너졌고 다른 두 개도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야외 생존 훈련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움막은 겨우 햇볕만 가릴 수 있을 뿐 비바람은 막아내지 못한다.
나는 도끼를 허리춤에 찌른 후, 두 손에 불타는 장작 몇 개를 집어 들고 그들의 움막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남자 하나가 안에서 나오더니 나를 보고 이내 몸을 돌려 안에 대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가장 먼저 박준이 나오고 그의 뒤로 4명의 남자가 따랐다. 그들은 제각각 손에 몽둥이를 들고 믿는 구석이 있는 듯, 겁도 없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난 사람 데리러 왔어!’
나는 박준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내 여인을 말이야!’
“엉! 그녀가 벌써 네 여인이 됐어?”
박준은 음침한 눈길로 나를 보며 손으로 아래턱을 만졌다.
“정말 네 여인이라면 무엇으로 바꿔 갈 거야?”
“무엇을 요구하는데?”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불타는 장작을 쳐들었다.
“내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어젯밤의 큰비에 너희들의 불이 다 꺼졌을 거야!”
박준은 숨길 게 없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우리는 네가 필요해! 너는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처럼 불을 지피든 거주지를 찾든 확실히 야외에서 생활하는데 일가견이 있어! 그러니까 너는 모든 사람을 위해 봉사해야 해!”
“내가 너희들을 위해 봉사하게 하려고 내 여인을 납치했어?”
나는 씁쓸하게 박준을 바라보았다. 세상에는 박준과 같은 사람이 많고도 많다. 그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살며 반드시 다른 사람이 자기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단을 비난하지 말고 결과를 중요시해야 해!”
박준은 머리를 끄덕이며 내 말을 묵인했다.
나는 목소리를 길게 뽑았다.
“만약 내가 싫다고 하면…”
박준은 능글맞게 웃었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먹을 것도 아주 부족해. 그래서…”
박준의 웃음이 이상한 것을 보고 내 머릿속에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서며 놀라운 눈길로 그를 주시했다.
“너희들은…”
박준은 씁쓸하게 말했다.
“어젯밤에 누군가 죽었고… 우리는 먹는 문제를 해결했어!”
나의 위가 경련을 일으키며 구역질이 나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나는 박준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사람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박준의 노골적인 말은 이미 위험한 신호였다. 문명과 도덕의 틀에서 철저히 벗어난 그들은 단지 생존만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야수에 불과할 뿐이었다!
우리 둘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치는 순간, 나는 그의 눈에서 적나라한 살기를 보고 잠깐의 침묵을 깨며 조금 뒤로 물러섰다.
“좋아! 네 요구를 들어줄게. 하지만 내 여인이 살아있다는 걸 반드시 증명해야 해!”
박준이 휘파람을 불자 두 여인이 심윤아를 끌고 다른 움막에서 나왔다.
뒤로 두 손을 묶인 채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울음을 터뜨렸다.
“여택 씨, 이 사람들이…”
왼쪽에 선 뚱뚱한 중년 여인이 주먹으로 심윤아의 배를 호되게 때렸다. 심윤아는 더는 말을 못 하고 허리를 굽히며 토하기 시작했다.
그 한 주먹은 그들에 대한 나의 마지막 한 가닥 연민마저 끊어버렸다.
“박준, 네가 요구하는 걸 내가 줄게!”
내 얼굴에 경련이 일자 박준은 재빨리 위험을 느끼고 큰소리를 질렀다.
“죽여라!”
뒤에서 휙휙 바람 소리와 함께 몇 개의 몽둥이가 나를 공격해왔다. 나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손에 쥐고 있던 장작불을 힘껏 내던졌다.
몇 개의 불덩이가 허공에서 흩날리다 움막의 지붕에 떨어져 이내 짙은 연기를 피워 올렸다. 나는 도끼를 뽑아 들고 심윤아가 있는 방향으로 나는 듯이 달려갔다.
“어서 불을 꺼라!”
“저놈 죽여라…”
난잡한 함성 속에서 나는 도끼를 휘두르며 사람들 속으로 사납게 들어갔다.
비록 전에는 이들과 동병상련이었지만 지금은 도리를 따질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처음 동료의 고기를 먹는 순간부터 그들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도끼가 살갗을 찢고 피가 얼굴에 튀며 비린내를 풍겨 나는 그 시절 격렬한 전쟁판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혈안이 된 나는 히스테리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죽기 살기로 피로 물든 길을 뚫었다.
내가 피투성이 된 몸으로 사납게 돌진하자 심윤아를 붙잡고 있던 두 여인 중 오른쪽의 여인은 대뜸 두 눈에 흰자위만 번득거리다가 기절하고 왼쪽의 여인은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나를 향해 심윤아를 확 밀쳤다. 나는 바로 심윤아의 유연한 허리를 휘어잡아 번쩍 들어서 어깨에 둘러메고 발을 빼 도망쳤다.
뒤에서 요란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박준의 무리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바짝 쫓아왔다. 그들도 지금의 상황이 이미 생사를 건 사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병이 낫지 않은 몸으로 용기만 가지고 박준의 무리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해내고 또 어깨에 사람을 메고 뛰려니 얼마 못 가서 두 다리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런대로 비틀거리며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뛰는데 그만 발이 돌부리에 걸리는 바람에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몇 바퀴 구르는 와중에도 귓가에 심윤아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내가 미처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몽둥이 하나가 휙, 바람 소리를 내며 내 어깨에 떨어졌다.
극심한 통증 때문에 나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고 손에 쥐었던 도끼도 땅에 떨어뜨렸다. 이어 나의 머리와 몸을 몽둥이로 두드리는 소리가 둔탁하고 요란하게 들려왔다.
박준의 무리는 우리 둘을 에워싸고 미친 듯이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나는 앞으로 엎어져서 심윤아를 밑에 깔고 두 팔로 머리를 감싸며 막아냈으나 그냥 헛수고에 불과했다.
그들이 죽어라 내려치는 몽둥이찜질에 나는 점점 정신이 희미해졌고 몽둥이 하나가 내 두 팔 틈새로 정수리를 내려치는 순간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