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리의 침팬지들이 우리를 향해 이빨을 드러낸 채 울부짖으며 마구잡이로 나뭇가지들을 던졌다.
동물원에서 볼 때는 귀여웠던 녀석들을 이렇게 철창 밖에 야생에서 맞닥뜨리니 두려움이 일었다.
침팬지들의 분노하는 모습과 가지런히 정돈된 바나나 숲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저 숲을 가꾼 것이 침팬지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봤는데 인간 다음으로 침팬지가 제일 똑똑하며 그들은 간단한 도구 정도라면 충분히 스스로 사용할 줄 안다고 했던 것 같다. 침팬지는 인간의 DNA와 가장 가까운 동물이며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인간을 제3의 침팬지라 부른다고도 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저들이 바나나 숲을 만들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고로 우리는 저 침팬지들의 영역에서 바나나를 딴 것과 같으니 지금 우리를 내쫓기 위해 저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침착하게 외쳤다.
“조용히 해요!”
웅성거림이 점점 잦아지고 나는 소리 높여 말했다.
“우린 머릿수로도 저들에게 밀리지 않고 저들이 우리보다 덩치도 작고 무기도 없는데 우리가 여기서 겁먹고 도망친다면 어떻게 인간이라 할 수 있겠어요!”
주변에 있던 한 명 한 명을 둘러보니 모두 얼굴에 수치심이 가득했다. 나는 손에 있던 도끼를 휘두르며 말을 이어갔다.
“침팬지를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따요! 마침 고기도 필요하던 참인데 저것들이 감히 허튼짓이라도 한다면 죽여버리면 그만이에요!”
내 격려와 함께 사람들은 다시 바나나를 따기 시작했다. 바나나 무더기는 점점 더 커졌고 이를 본 침팬지들은 더욱 격노하여 가슴 치며 울부짖었다.
‘멍청이들.’
사람들은 멀리서만 날뛰지 다가오지 않는 침팬지들을 보며 그제야 안심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침팬지들을 향해 조롱의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단순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모르는 사이에 불어나기 시작한 침팬지의 숫자는 어느덧 처음 봤을 때의 두 세배나 되어 있었다. 그제야 이를 눈치챈 나는 당황하며 외쳤다.
“그만 갑시다!”
다급하게 외쳤지만, 사람들은 아직 멍하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벗어났다. 나에게 팔짱을 낀 애리도 따라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바나나는…. 안 가져가요?”
누군가가 멍청하게 질문했다. 머리가 다 아팠다.
“버려요. 일단 살고 봐야죠!”
말을 마치자마자 앞에서부터 침팬지의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무 위에서 사람보다도 더 큰 침팬지가 뛰어내려 내 앞을 가로막았다.
거의 키가 2미터가량이 되는 거대한 침팬지였다. 마치 인간을 연상시키는 침팬지의 냉정한 눈빛에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우끼끼! 우끼끼!”
침팬지는 연달아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스스슥… 나무 위에 있던 침팬지들이 뛰어내려 우리를 포위했다.
“흩어져서 튀어!”
외침과 동시에 나도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침팬지의 숫자와 거구의 우두머리 침팬지까지…. 그의 앞에 서면 난 그대로 갈가리 찢길 것만 같았다.
뒤에서 우두머리 침팬지의 침착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의 울음소리를 따라 침팬지들이 3마리씩 짝을 지어 우리를 둘러쌌다.
‘진법 펼칠 줄도 안다고?’
눈앞에서 여자 한 명이 침팬지들한테 붙잡혀 숲속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기를 바라던 이들 중 한 명이었는데 공동의 적을 마주하고 있으니 속에서부터 알 수 없는 동족 의식이 솟구쳤다.
“놓아줘!”
나는 도끼를 휘두르며 숲속으로 뛰어갔다. 내가 휘두른 도끼에 머리를 맞은 침팬지 한 마리가 쓰러졌다.
피가 눈앞에 솟구치고 고통스러운 침팬지의 비명과 함께 무수한 침팬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번뜩이는 눈동자와 털이 가득한 손이 마구잡이로 나를 뜯어 젖혔다.
이성을 잃은 나는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팔을 휘둘렀다. 내게 남은 건 살아남겠다는 본능뿐이었다.
나는 여자를 일으켜 얼른 도망치라고 외치고는 도끼를 휘두르며 마구잡이로 침팬지를 죽였다.
사방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고 그 비명은 마치 보이지 않는 비수가 되어 내 마음속을 헤집어 놓았다.
나는 이를 악물며 옆에 있던 침팬지들을 한 차례씩 도끼로 가격했다. 제일 가까이에 있던 남자를 도와주려 움직이려던 찰나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밀쳤고 나는 그대로 바닥에 나자빠졌다.
그와 동시에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 커다란 돌덩어리가 아슬아슬하게 내 머리 위를 지나쳤다.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누군가가 나를 밀치지 않았다면 내 머리는 그대로 박살 났을 것이다.
애리였다. 그녀는 계속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나를 밀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죽음을 면치 못했으리라.
나는 애리를 부둥켜안은 채 바닥을 뒹굴었다.
우두머리 침팬지가 다시 돌덩어리를 들고 경멸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나를 위험한 적으로 인식한 듯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다란 팔뚝이 또다시 큰 돌덩어리를 조준하는 것을 보았다. 놀란 나는 허리에 힘을 주어 마치 뱀처럼 빠져나갔다. 돌덩어리는 내 뒤로 떨어지며 진흙과 풀떼기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우두머리 침팬지는 이번에 아예 돌덩어리를 쥐고 나를 쫓기 시작했다. 그는 비록 거구였으나 전혀 속도에는 지장이 없이 매우 빠르게 나를 향해 돌진해 왔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 덕에 아직 내 품에 있던 애리도 함께 몸을 일으켰다. 나는 아예 그녀를 어깨에 들쳐 메고는 정말 젖 먹던 힘까지 다 끌어올려 뛰었다. 귓가에 씽씽 바람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방향을 가리지 않고 좁은 곳을 골라 가지 사이를 뚫고 미친 듯이 달렸다.
우두머리 침팬지는 끈질기게 쫓아왔다. 길이 좁지만 않았다면 아마 진작에 나는 그놈에게 따라 잡혔을 것이다.
이리저리 미친 듯이 뛰어다니다가 반얀 나무 뿌리 사이를 뚫고 지나갔는데 갑자기 눈앞이 확 틔었다.
여기저기 듬성듬성 풀이 돋아나 있는 벌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또 습지라니! 앓음 소리가 저절로 났다. 이렇게 탁 트인 곳이라면 우두머리 침팬지한테 쉽게 잡힐 텐데….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감자가 언덕을 구르듯 괴성을 지르며 아래로 내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뒤가 너무 조용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겨우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우두머리 침팬지가 숲 끝자락에 서서 기이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발밑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
발밑이 서서히 잠기고 있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발목까지 올라온 진흙이 여전히 멈추지 않고 나를 점점 안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런! 여긴 늪지대였다… 어쩐지 저 녀석이 쫓아오지 않는다고 했더니!
나는 황급히 몸을 앞으로 엎드려 폈다. 그 덕에 내가 둘러업고 있던 애리도 진흙 위로 철퍼덕 던져졌다. 다행히 바닥이 폭신해 얼굴이 진흙더미가 된 것 외엔 별문제 없어 보였다.
여자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단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비명도 없이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는 고개를 들어 요염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저 여자의 눈빛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보고 있자면 어딘가 마음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난 지금 그럴 기력이 없었다.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말했다.
“당신도 좀 쉬어요. 맨날 그렇게 연기하는 거 힘들지도 않아요?”
애리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처럼 진짜 사나이 앞에선 저도 모르게 자꾸 그렇게 되네요.”
“보는 눈이 있네요!”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우두머리 침팬지가 기다란 팔뚝으로 마침 이쪽으로 돌을 던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이번 조준 실력은 매우 형편없었다. 우리와 좀 떨어진 진흙탕 속으로 낙하한 돌은 쿨렁하는 소리와 함께 깊이 가라앉았다.
무슨 상황이지? 머릿속에 강한 경보음이 울렸다. 뒤를 돌아보니 진흙탕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듯 요동치고 있었다.
썩은 나무토막과도 같은 것이 끊임없이 진흙탕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
나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하마터면 울음을 터트릴 뻔하였다.
악어였다! 빌어먹을. 이 진흙탕 속에 있던 건 전부 다 악어였다!
저 약아빠진 우두머리 침팬지는 이를 알고 있었다. 방금 그가 돌멩이를 던진 건 이 악어들에게 먹을거리가 왔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런 씨X, 원숭이와 악어의 우정 이야기가 사실이었을 줄이야. 그들은 진짜 서로 협력하는 사이였다….
우두머리 침팬지는 마침 인간이 된 것처럼 두 팔을 가슴에 꼬고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뒤에 있던 악어들은 아직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아직 잠이 덜 깬 건지 느릿느릿 밖으로 기어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저 악어들이 앞으로도 우리를 발견하지 못할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소리를 낮춰 애리에게 말했다.
“따라서 와요. 이렇게 엎드려서….”
난 바닥에 굴러 진흙탕을 온몸에 묻히고는 그대로 바짝 엎드린 채 우두머리 침팬지 반대 방향 숲을 향해 기어갔다.
하지만 우두머리 침팬지는 영리하게도 악어들이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걸 알고서 또다시 우리를 향해 돌을 던졌다.
돌이 아주 가까운 곳에 진흙탕을 튀기면서 떨어졌다. 또다시 들려온 소리에 악어들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우리를 발견하였다.
먹이를 인지한 악어들이 재빨리 우리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달려!”
나는 애리를 잡아끌고는 그나마 좀 단단한 바닥을 찾아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진흙탕 속에 빠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악어에게 뜯어 먹히지 않겠다는 의지로 애리를 잡아끌고는 황급히 내달렸다. 그나마 운이 따라 줬는지 진흙에 빠져 죽지도 악어에 잡아 먹히지도 않고 무사히 밀림에 발을 내디뎠다.
우두머리 침팬지는 내가 생각지도 못하게 늪지대에서 빠져나오자 크게 아우성치며 밀림을 따라 쫓아오기 시작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수십 마리의 악어도 여전히 나를 향해 늪지대를 헤치며 빠르게 기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