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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포옹

  • 여혜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 “저들이 과자를 가져온다고 어떻게 확신해? 아까 네가 하는 걸 보니까 아주 쉽던데! 저들도 불을 피울 수 있잖아!”
  •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 “여혜미, 내가 한 시간 줄게. 네 손으로 내가 아까 했던 것처럼 불을 피워 올리면 앞으로 네 속옷, 내가 다 손빨래해 준다!”
  • 얼굴이 확 달아오른 여혜미가 나한테 욕설을 퍼부으려던 찰나, 나는 급기야 그녀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그제야 그녀는 어둠 속에서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박준을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 “함께 무인도에 추락한 사람들끼리 당연히 서로 돕고 살아야죠!”
  • 한 손에 과자 여덟 조각을 들고 한 손에 횃불을 든 박준이 싱글벙글 웃었다. 나도 그를 마주 보며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 “그럼요, 다음번엔 아까처럼 서로 서먹하게 굴지 맙시다!”
  • 과자로 불씨를 바꾼 박준은 그대로 돌아가는 대신 그 자리에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진지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 “한참 생각하고 나서야 왜 시체들을 바다에 던졌는지 알 것 같았어요. 당신은 참 대단한 사람 같아요!”
  • 나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닥불에 비친 그의 얼굴은 표정을 알아볼 수 없어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도 진지하게 답했다.
  • “이렇게 빨리 교환하러 올 줄은 몰랐어요. 저는 이 무인도에서 잠시 함께 생활하는 건 괜찮지만, 시간이 지나면….”
  • “그럴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야지요!”
  • 박준이 단호하게 내 말을 잘랐다. 그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 남자가 횃불을 들고 자신의 무리로 돌아가자 여자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생각을 정리하고는 상황을 설명했다.
  • “아까 박준이 화를 내면서 돌아가고 사실 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거든요. 만약 박준이 오분 이내에 다시 온다면 저놈은 아주 위험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삼분 만에 돌아왔네요!”
  • 나는 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그녀들을 위해 다시 설명했다.
  • “평소 우리는 불이 필요할 때 라이터나 가스를 이용하죠. 하지만 여긴 무인도예요. 불씨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 “하지만 그쪽은 아까….”
  • 티나가 두 눈을 반짝였다. 나는 고개를 숙여 비행기 잔해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다른 사람한테는 쉽지만 내가 하면 쉽지 않은 일들이 많아요. 어떤 나무토막은 단단하고 어떤 나무토막은 부드럽죠. 어떤 것은 나뭇결이 섬세하고 어떤 것은 투박해요. 이 중에 어떤 걸 사용해야 하는지 알고 있나요? 그리고 불을 지필 때 나무의 각도와 풍향, 이런 것들 전부가 불을 지피는데 중요한 작용을 해요. 저들은 그걸 모르니까 절대 불을 지필 수 없어요!”
  • 나는 계속 설명했다.
  • “하지만 저 사람도 결단력이 있는 편이에요. 지금 저 사람한테 가장 중요한 건 무리 중에서 자신의 위신일 거예요. 매번 실패한다면 사람들은 더는 저 사람을 믿지 않겠죠. 그래서 주저 없이 과자를 들고 교환하러 온 거예요! 이 사람, 대적하기 쉽지 않겠어요!”
  • “그럼 왜 저들을 대적해야 하는 거죠? 이런 무인도에서 다 같은 조난자들끼리 서로 돕는 게 더 좋지 않아요?”
  • 심윤아가 물었다.
  • “박준이 절대적으로 공평하게 사람을 대할 거라 어떻게 믿어요?”
  • 내가 반문했다.
  • 심윤아는 바로 고개를 흔들더니 밝게 미소 지었다.
  • “이제 알겠어요!”
  • “하지만 저는 모르겠어요!”
  • 티나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여혜미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미소 지었다.
  • “천천히 다 알게 될 거예요!”
  • 티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는 비행기 파편을 두드려서 간단한 가마 모양을 만들었다.
  • “여기서 기다려요!”
  • 그러고는 가마를 들고 어딘가로 향했다. 잠시 후, 나는 바닷물이 담긴 가마를 모닥불에 올려놓았다.
  • “바닷물을 마시자고요?”
  • 티나가 찌푸린 표정으로 물었다.
  • “증류수를 마시는 거죠!”
  • 말을 마친 나는 옷가지를 부글부글 끓는 물 위에 덮어 놓았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면서 옷이 젖었다.
  • 내가 젖은 옷가지를 비틀어 물을 짜내자 세 여자는 동시에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 사실 더 깨끗한 방법도 있었지만, 이런 방법으로 그녀들을 하루빨리 무인도 생활에 적응시킬 작정이었다.
  • 바닷물은 재빨리 증발해버리고 그렇게 짜낸 증류수는 생수병에 담아 보관했다. 옷에서 짜낸 물이라서 좀 혼탁했다. 세 여자는 이미 수분 부족으로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지만 아무도 그 물을 마시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라 괜찮았다. 나는 여자들의 표정은 무시한 채 도끼로 가마 밑부분에 남은 하얀 결정체들을 긁어냈다.
  • “이게 바닷소금이라는 거죠?” 티나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 ‘저 눈빛은 존경의 눈빛인가?’
  • “맞아요!”
  • 고개를 끄덕인 나는 물을 좀 부어 가마를 깨끗이 씻은 뒤, 남은 증류수를 전부 가마에 부었다.
  •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증류수는 금세 끓기 시작했다. 나는 빠르게 박준이 가져다준 과자들을 가마에 집어넣었다.
  • 여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과자는 가마에서 작은 회오리를 일으키더니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주변에 우유와 딸기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 나는 나뭇가지 하나를 가져다가 과자가 덩어리 없이 물에 잘 녹도록 조심스럽게 젓기 시작했다.
  • 그러는 목적은 단 하나였다. 공평한 분배!
  • 얼마 지나지 않아 싸구려 카페라테를 닮은 거품이 둥둥 떠다니는 죽이 완성되었다.
  • “이게 우리들 저녁이에요!”
  • 나는 미리 깨끗이 씻어 챙겨두었던 플라스틱 컵을 꺼냈다. 과자로 만든 죽은 컵 네 개도 가득 채우지 못할 양이었다. 하지만 최대한 공평하게 오차를 3mL 이내로 줄여서 똑같이 부었다.
  • “지금부터 우리는 엄격한 식량 분배 제도를 실시할 거예요. 그래야 모든 사람의 욕망을 통제할 수 있어요!”
  • 나는 여자들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 “지금 내가 하는 행동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시겠지만, 지금 우리한테 중요한 건 한가지예요! 그건 바로… 어떻게든 살아남는 거!”
  • 말을 마친 나는 죽을 들고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죽은 먹음직한 향기와는 다르게 맛은 좀 이상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문명사회의 식량은 이것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 여혜미가 컵을 들고 한 모금 맛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나를 따라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심윤아를 향해 눈짓했다.
  • 심윤아도 일그러진 표정으로 먹기 시작했다. 부잣집 아가씨 티나는 울상으로 죽을 집어 들더니 혀를 날름 내밀어 맛을 보고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헛구역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 나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 “먹기 힘들면 먹지 마세요!”
  • “네!”
  • 멍청한 티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컵을 놓으려는데, 여혜미와 심윤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티나가 얼굴을 매만지며 물었다.
  • “왜요?”
  • 여혜미가 한숨을 쉬며 일깨워 주었다.
  • “여긴 무인도예요. 도심 속이 아니란 말이에요. 배고파도 배달을 시킬 수 없고, 지금 안 먹으면 다음 끼니를 언제 먹을 수 있을지, 뭘 먹을지도 몰라요… 진짜 안 드실 거예요?”
  • 티나는 나를 한번 흘겨보더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결국에 그녀는 한약을 먹는 모양새로 코를 막고 죽을 통째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 “다 드셨으면 이제 시작하죠!”
  • 나는 꺾어온 나뭇가지들을 도끼를 이용해 뾰족하게 갈았고, 여자들은 그것을 움막 주변에 꽂아놓았다. 불의의 습격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설명할 필요 없이 다들 내 의도를 알아차렸다.
  • 작업이 끝난 뒤, 나는 모닥불이 타고 남은 잿더미를 움막 주변에 고르게 뿌렸다. 마지막으로 충분한 땔감을 준비한 뒤, 움막으로 들어갔다.
  • 작은 움막 안에는 주워 온 나뭇잎들과 시체의 몸에서 벗겨낸 옷들을 고르게 펴서 잠자리를 만들었다. 세 여자만 들어가도 좁아터진 움막에 나까지 들어가자 서로의 숨결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 티나가 물었다. 나는 피곤한 기색으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 “이미 얘기했잖아요!”
  • “얘기했다고요?”
  • 티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 “살아남는 거요!”
  • “왜 갑자기 분위기 잡고 그래!”
  • 여혜미가 입을 삐죽이더니 발로 내 다리를 찼다. 손으로 그녀의 다리를 붙잡은 나는 갑자기 떠오르는 아이디어에 눈을 번쩍 떴다.
  • “중요한 걸 잊을 뻔했네!”
  • “이거 놔….”
  • 여혜미가 내 손아귀를 벗어나려 발버둥질 쳤다.
  • “움직이지 마,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래!”
  • 내 손이 그녀의 다리를 더듬어 위로 올라갔다. 내 손이 허벅지 끝에 닿자 당황한 여혜미가 흠칫 몸을 떨었다.
  • “누나 스타킹 좀 빌릴게!”
  • 말을 마친 나는 스튜어디스 전용 스타킹 끝 쪽을 확 잡아당겨 벗겨냈다.
  • “변태 새끼!”
  • 여혜미의 고함이 등 뒤로 들려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타킹 한 쌍을 집어 들고 움막을 나섰다.
  • 십여 분쯤 지났을까, 나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세 여인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어디 갔었냐고 물었지만, 나는 씩 웃음 짓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 사실 여자들 앞이라 강한 척, 자신 있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너무 불안했다. 갑자기 이런 황무지에 뚝 떨어졌고 구조대도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상황에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 현대과학의 구조기술은 사실 그다지 믿을 것이 못 된다. 말레이시아 항공편도 실종된 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단서도 못 찾았지 않은가! 만약에….
  • 나는 자꾸만 떠오르는 불안한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꿈속에서 나는 드디어 그리고 그리던 두바이에 도착했고 버즈 알 아랍 호텔 앞 길거리에서 깨진 그릇을 앞에 내려놓고 앉았다. 품 안에는 초록색의 달러 지폐가 가득 들어있었다.
  • 갑자기 기분 좋은 은은한 향이 풍겨오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하얀 면사포를 쓴 아랍 미인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품 안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내 그릇에 던져 주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눈부신 다이아몬드가 가득 들어있었다. 아마 사오십 알 정도 되는 것 같았다….
  • 놀란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인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포를 벗자, 사랑스러운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 이 얼굴…너무 낯이 익어!
  •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그녀가 허리를 숙이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 여인의 부드러운 몸이 나를 감싸고 여인의 몸에서 풍겨오는 은은한 향이 내 코를 자극했다. 내가 반쯤 넋이 나가 있을 때, 갑자기 옆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