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이 과자를 가져온다고 어떻게 확신해? 아까 네가 하는 걸 보니까 아주 쉽던데! 저들도 불을 피울 수 있잖아!”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여혜미, 내가 한 시간 줄게. 네 손으로 내가 아까 했던 것처럼 불을 피워 올리면 앞으로 네 속옷, 내가 다 손빨래해 준다!”
얼굴이 확 달아오른 여혜미가 나한테 욕설을 퍼부으려던 찰나, 나는 급기야 그녀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그제야 그녀는 어둠 속에서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박준을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함께 무인도에 추락한 사람들끼리 당연히 서로 돕고 살아야죠!”
한 손에 과자 여덟 조각을 들고 한 손에 횃불을 든 박준이 싱글벙글 웃었다. 나도 그를 마주 보며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다음번엔 아까처럼 서로 서먹하게 굴지 맙시다!”
과자로 불씨를 바꾼 박준은 그대로 돌아가는 대신 그 자리에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진지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한참 생각하고 나서야 왜 시체들을 바다에 던졌는지 알 것 같았어요. 당신은 참 대단한 사람 같아요!”
나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닥불에 비친 그의 얼굴은 표정을 알아볼 수 없어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도 진지하게 답했다.
“이렇게 빨리 교환하러 올 줄은 몰랐어요. 저는 이 무인도에서 잠시 함께 생활하는 건 괜찮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럴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야지요!”
박준이 단호하게 내 말을 잘랐다. 그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남자가 횃불을 들고 자신의 무리로 돌아가자 여자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생각을 정리하고는 상황을 설명했다.
“아까 박준이 화를 내면서 돌아가고 사실 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거든요. 만약 박준이 오분 이내에 다시 온다면 저놈은 아주 위험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삼분 만에 돌아왔네요!”
나는 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그녀들을 위해 다시 설명했다.
“평소 우리는 불이 필요할 때 라이터나 가스를 이용하죠. 하지만 여긴 무인도예요. 불씨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하지만 그쪽은 아까….”
티나가 두 눈을 반짝였다. 나는 고개를 숙여 비행기 잔해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다른 사람한테는 쉽지만 내가 하면 쉽지 않은 일들이 많아요. 어떤 나무토막은 단단하고 어떤 나무토막은 부드럽죠. 어떤 것은 나뭇결이 섬세하고 어떤 것은 투박해요. 이 중에 어떤 걸 사용해야 하는지 알고 있나요? 그리고 불을 지필 때 나무의 각도와 풍향, 이런 것들 전부가 불을 지피는데 중요한 작용을 해요. 저들은 그걸 모르니까 절대 불을 지필 수 없어요!”
나는 계속 설명했다.
“하지만 저 사람도 결단력이 있는 편이에요. 지금 저 사람한테 가장 중요한 건 무리 중에서 자신의 위신일 거예요. 매번 실패한다면 사람들은 더는 저 사람을 믿지 않겠죠. 그래서 주저 없이 과자를 들고 교환하러 온 거예요! 이 사람, 대적하기 쉽지 않겠어요!”
“그럼 왜 저들을 대적해야 하는 거죠? 이런 무인도에서 다 같은 조난자들끼리 서로 돕는 게 더 좋지 않아요?”
심윤아가 물었다.
“박준이 절대적으로 공평하게 사람을 대할 거라 어떻게 믿어요?”
내가 반문했다.
심윤아는 바로 고개를 흔들더니 밝게 미소 지었다.
“이제 알겠어요!”
“하지만 저는 모르겠어요!”
티나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여혜미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미소 지었다.
“천천히 다 알게 될 거예요!”
티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는 비행기 파편을 두드려서 간단한 가마 모양을 만들었다.
“여기서 기다려요!”
그러고는 가마를 들고 어딘가로 향했다. 잠시 후, 나는 바닷물이 담긴 가마를 모닥불에 올려놓았다.
“바닷물을 마시자고요?”
티나가 찌푸린 표정으로 물었다.
“증류수를 마시는 거죠!”
말을 마친 나는 옷가지를 부글부글 끓는 물 위에 덮어 놓았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면서 옷이 젖었다.
내가 젖은 옷가지를 비틀어 물을 짜내자 세 여자는 동시에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더 깨끗한 방법도 있었지만, 이런 방법으로 그녀들을 하루빨리 무인도 생활에 적응시킬 작정이었다.
바닷물은 재빨리 증발해버리고 그렇게 짜낸 증류수는 생수병에 담아 보관했다. 옷에서 짜낸 물이라서 좀 혼탁했다. 세 여자는 이미 수분 부족으로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지만 아무도 그 물을 마시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라 괜찮았다. 나는 여자들의 표정은 무시한 채 도끼로 가마 밑부분에 남은 하얀 결정체들을 긁어냈다.
“이게 바닷소금이라는 거죠?” 티나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저 눈빛은 존경의 눈빛인가?’
“맞아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물을 좀 부어 가마를 깨끗이 씻은 뒤, 남은 증류수를 전부 가마에 부었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증류수는 금세 끓기 시작했다. 나는 빠르게 박준이 가져다준 과자들을 가마에 집어넣었다.
여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과자는 가마에서 작은 회오리를 일으키더니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주변에 우유와 딸기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나뭇가지 하나를 가져다가 과자가 덩어리 없이 물에 잘 녹도록 조심스럽게 젓기 시작했다.
그러는 목적은 단 하나였다. 공평한 분배!
얼마 지나지 않아 싸구려 카페라테를 닮은 거품이 둥둥 떠다니는 죽이 완성되었다.
“이게 우리들 저녁이에요!”
나는 미리 깨끗이 씻어 챙겨두었던 플라스틱 컵을 꺼냈다. 과자로 만든 죽은 컵 네 개도 가득 채우지 못할 양이었다. 하지만 최대한 공평하게 오차를 3mL 이내로 줄여서 똑같이 부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엄격한 식량 분배 제도를 실시할 거예요. 그래야 모든 사람의 욕망을 통제할 수 있어요!”
나는 여자들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시겠지만, 지금 우리한테 중요한 건 한가지예요! 그건 바로… 어떻게든 살아남는 거!”
말을 마친 나는 죽을 들고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죽은 먹음직한 향기와는 다르게 맛은 좀 이상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문명사회의 식량은 이것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여혜미가 컵을 들고 한 모금 맛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나를 따라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심윤아를 향해 눈짓했다.
심윤아도 일그러진 표정으로 먹기 시작했다. 부잣집 아가씨 티나는 울상으로 죽을 집어 들더니 혀를 날름 내밀어 맛을 보고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헛구역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나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먹기 힘들면 먹지 마세요!”
“네!”
멍청한 티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컵을 놓으려는데, 여혜미와 심윤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티나가 얼굴을 매만지며 물었다.
“왜요?”
여혜미가 한숨을 쉬며 일깨워 주었다.
“여긴 무인도예요. 도심 속이 아니란 말이에요. 배고파도 배달을 시킬 수 없고, 지금 안 먹으면 다음 끼니를 언제 먹을 수 있을지, 뭘 먹을지도 몰라요… 진짜 안 드실 거예요?”
티나는 나를 한번 흘겨보더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결국에 그녀는 한약을 먹는 모양새로 코를 막고 죽을 통째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다 드셨으면 이제 시작하죠!”
나는 꺾어온 나뭇가지들을 도끼를 이용해 뾰족하게 갈았고, 여자들은 그것을 움막 주변에 꽂아놓았다. 불의의 습격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설명할 필요 없이 다들 내 의도를 알아차렸다.
작업이 끝난 뒤, 나는 모닥불이 타고 남은 잿더미를 움막 주변에 고르게 뿌렸다. 마지막으로 충분한 땔감을 준비한 뒤, 움막으로 들어갔다.
작은 움막 안에는 주워 온 나뭇잎들과 시체의 몸에서 벗겨낸 옷들을 고르게 펴서 잠자리를 만들었다. 세 여자만 들어가도 좁아터진 움막에 나까지 들어가자 서로의 숨결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티나가 물었다. 나는 피곤한 기색으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미 얘기했잖아요!”
“얘기했다고요?”
티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살아남는 거요!”
“왜 갑자기 분위기 잡고 그래!”
여혜미가 입을 삐죽이더니 발로 내 다리를 찼다. 손으로 그녀의 다리를 붙잡은 나는 갑자기 떠오르는 아이디어에 눈을 번쩍 떴다.
“중요한 걸 잊을 뻔했네!”
“이거 놔….”
여혜미가 내 손아귀를 벗어나려 발버둥질 쳤다.
“움직이지 마,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래!”
내 손이 그녀의 다리를 더듬어 위로 올라갔다. 내 손이 허벅지 끝에 닿자 당황한 여혜미가 흠칫 몸을 떨었다.
“누나 스타킹 좀 빌릴게!”
말을 마친 나는 스튜어디스 전용 스타킹 끝 쪽을 확 잡아당겨 벗겨냈다.
“변태 새끼!”
여혜미의 고함이 등 뒤로 들려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타킹 한 쌍을 집어 들고 움막을 나섰다.
십여 분쯤 지났을까, 나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세 여인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어디 갔었냐고 물었지만, 나는 씩 웃음 짓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사실 여자들 앞이라 강한 척, 자신 있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너무 불안했다. 갑자기 이런 황무지에 뚝 떨어졌고 구조대도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상황에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현대과학의 구조기술은 사실 그다지 믿을 것이 못 된다. 말레이시아 항공편도 실종된 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단서도 못 찾았지 않은가! 만약에….
나는 자꾸만 떠오르는 불안한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꿈속에서 나는 드디어 그리고 그리던 두바이에 도착했고 버즈 알 아랍 호텔 앞 길거리에서 깨진 그릇을 앞에 내려놓고 앉았다. 품 안에는 초록색의 달러 지폐가 가득 들어있었다.
갑자기 기분 좋은 은은한 향이 풍겨오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하얀 면사포를 쓴 아랍 미인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품 안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내 그릇에 던져 주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눈부신 다이아몬드가 가득 들어있었다. 아마 사오십 알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놀란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인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포를 벗자, 사랑스러운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이 얼굴…너무 낯이 익어!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그녀가 허리를 숙이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여인의 부드러운 몸이 나를 감싸고 여인의 몸에서 풍겨오는 은은한 향이 내 코를 자극했다. 내가 반쯤 넋이 나가 있을 때, 갑자기 옆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