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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밀림에서의 추격전

  • “아, 진짜!”
  • 나는 여인들의 주먹질을 피해 도끼를 들고 밀림으로 향했다. 십 분쯤 지났을까, 나는 기다란 칡넝쿨과 마른 나뭇가지들을 꺾어서 돌아왔다.
  • 열대우림에는 널린 게 나무와 칡이다. 나는 다시 동굴로 올라가서 칡넝쿨을 아래로 드리웠다. 하지만 여자들은 가파른 암벽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위에서 큰 소리로 응원했고 여혜미가 가장 먼저 밧줄을 허리에 단단히 묶었다.
  • 여혜미는 그래도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평소에는 믿음직스럽지 못한 행동을 많이 해도 생명과 안전에 관한 일에서는 누구보다 철저하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 그녀는 내 지시에 따라 밧줄을 허리에 묶고 양손을 교차해서 칡넝쿨을 단단히 잡은 채 누운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내 지휘 아래 그녀는 천천히 동굴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 다음 주자는 티나였다. 그녀는 심윤아의 도움을 받아 넝쿨을 허리에 묶고 조심스럽게 올라왔다.
  • 여자 셋을 다 동굴까지 끌어 올리는 일도 체력을 많이 소모하는 일이었다. 나는 잠깐 휴식을 취한 뒤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 활활 타오르는 불빛이 우리의 얼굴을 비추며 동굴 벽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동굴 안을 가득 채웠던 습기도 재빨리 증발해버리면서 주변이 건조해졌다. 나는 잠깐 휴식을 취하고 여자들에게 기다리란 말 한마디 남긴 채 먹을 것을 찾아 동굴을 나섰다.
  • 나는 단단한 암석을 하나 찾아 넝쿨을 단단히 묶었다. 그러고는 여자들에게 만약 내가 밤이 돼도 돌아오지 못하면 넝쿨을 타고 내려가서 박준 패거리들을 찾으라고 일러두었다.
  • “우린 떨어져 죽는 게 더 무서워! 그러니까 기다릴게!”
  • “이건 나를 향한 고백인가?”
  • 나는 호탕하게 웃으며 넝쿨을 잡고 동굴에서 뛰어내렸다. 허공에서 유인원처럼 긴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나는 도끼를 들고 홀로 밀림으로 들어갔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겉보기에 아름다운 열대우림이 사실은 양귀비꽃처럼 화려한 외모와 치명적인 위험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 하지만 목숨 걸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한테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모든 물품을 그 개자식들한테 빼앗겼으니까!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밀림에 손을 내밀어야 했다.
  • 발아래에는 푹신한 낙엽들이 쌓여 있어 마치 카펫을 걷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경각심을 늦추지 않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열대우림은 위장에 능숙한 독사들이 득실대는 곳이다.
  • 숲 속에는 길이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길을 막고 있는 나뭇가지들을 향해 쉴 새 없이 도끼를 휘둘러야 했다. 얼마 가지 않았는데도 팔목이 부러질 듯 아팠다.
  • 한참 가다 보니 거대한 식물을 발견했다. 나는 잎사귀가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 그 식물을 보자 저도 모르게 환호를 질렀다.
  • 나는 이 식물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아프리카의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의 상징 여인초였다.
  • 여인초는 바나나 열매를 맺지는 못하지만 생김새가 바나나 나무를 많이 닮은 식물이다. 그 잎사귀에는 수분이 가득 차 있어 여행자의 갈증을 해소하는 용도로 많이 알려져 여인초라는 이름이 붙었다.
  • 도끼로 줄기를 자르자 맑은 물줄기가 뿜어 나왔다. 나는 재빨리 입을 대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 평생 이렇게 달콤한 물은 처음 마셔보는 것 같았다. 하도 많이 마셔서 배까지 불렀다. 다시 활기를 되찾은 나는 큰 잎사귀를 잘라서 챙기고는 계속 앞으로 걸었다.
  • 새들이 지저귀며 나뭇가지 위로 날아올랐다. 순간 나는 눈이 번쩍 떠졌다.
  • 이게 내가 찾던 것이다!
  • 나는 내가 이 밀림에서 왕 행세를 하며 아무거나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난 나 자신을 잘 알았다. 몇만 년을 거쳐 힘을 키워 온 이 밀림에서 나는 그저 나약한 외부인일 뿐이고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중에서 조류는 최상의 목표였다.
  • 나는 아까 땄던 여인초 잎을 접어 모자처럼 머리에 쓰고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 운 좋게도 새 둥지에 열 알 남짓한 새알이 들어있었다. 이것 역시 내 목표 중 하나였다.
  • 나는 여인초 모자를 벗어 새알을 집어넣고 칡넝쿨로 허리에 단단히 묶었다. 옆을 보니 새들이 또 있었다.
  • 나는 주저 없이 옆 나무의 새 둥지까지 털었다. 그런데 이번엔 운이 나빠서 날아간 새들이 내가 둥지를 털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시 날아와서 자지러지게 울었다.
  • 인간을 한 번도 접촉해보지 못한 새들은 한참 울더니 내가 물러서려 하지 않자 아예 날아와서 부리로 나를 쪼았다.
  •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나는 도끼를 들어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새의 민첩함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것 같다. 녀석은 허공에서 날렵하게 방향을 틀어 도끼를 스치고 날아가 버렸다. 새의 거친 날개가 내 얼굴을 쳤고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나는 급기야 눈을 감았다. 눈가가 얼얼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눈가에 가져갔다.
  • 하지만 내가 잊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나무 위에 있던 나는 손을 놓자마자 미끄러지며 아래로 추락했다.
  • 나는 급기야 도끼를 들어 탄탄해 보이는 나뭇가지를 찍었다. 그제야 간신히 추락은 피할 수 있었다. 내가 겨우 숨을 돌리는데 귓가에 간담을 서늘케 하는 소리가 들렸다.
  • “윙윙….”
  • 손톱만 한 벌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내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 제길! 아까 도끼로 내리찍었던 나뭇가지에 공교롭게 벌 둥지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이런 열대에 서식하는 벌들은 독성이 매우 강한 종류이다. 한 무리가 뭉치면 코끼리 한 마리도 쏘아 죽일 수 있다. 내 몸은 두세 방이면 하늘나라로 가게 될 것이다.
  • 나는 다리에 힘을 풀어 나무를 타고 신속히 밑으로 내려갔다. 바지와 피부가 거친 나무껍질에 긁혔지만 아픈 감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냅다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다.
  • 나는 아까 오면서 도끼로 표시해둔 길을 따라 죽기 살기로 달렸다. 뒤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렸다.
  • 전속력으로 달리느라 체력은 바닥이 나고 있었고 숨이 턱에 찼다. 두 다리는 마비될 지경인데 벌떼는 여전히 바싹 쫓아오고 있었다. 거의 절망하고 있을 때 갑자기 주변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 나는 길을 잃을 수 있다는 걱정은 제쳐 두고 과감히 내가 표시해 두었던 길을 포기하고 옆쪽 나무숲으로 뛰어갔다.
  • 가지가 무성한 나무 몇 그루를 지나자 눈앞이 탁 트이는 광경이 펼쳐졌다.
  • 눈앞에는 넓고 푸른 초원이 펼쳐졌고 중앙에 곡선이 아름답게 뻗은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많은 새가 이곳에 서식하고 있는 듯했다. 내 발걸음 소리에 약삭빠른 놈은 높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일부는 멍청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이런 원시 삼림에 이런 거대한 습지가 있다니. 나는 감탄하기에 앞서 빠르게 달려 나가 물속에 뛰어들었다.
  • 차고 맑은 강물은 내 허리춤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나는 급기야 몸을 낮춰 완전히 물속으로 들어가서 숨었다.
  • 끈질긴 벌떼들은 수면위에서 한참이나 돌다가 결국엔 안 되겠는지 포기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물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멀리 떠나는 벌떼들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고 다시 강가로 올라왔다.
  • 허리춤을 만져보니 다행히 아까 챙겨 두었던 새알은 그대로 있었다. 기분 좋게 돌아가는 길을 찾으려는데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은 물체가 보였다. 그놈도 고개를 들고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 제길! 나는 그저 울고 싶었다.
  • 송아지만 한 크기에 검고 흙투성이가 된 털, 입 밖으로 삐져나온 긴 이빨, 볼품없는 긴 코. 놈은 나를 바라보며 쉴새 없이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 이건…거대한 멧돼지였다!
  • 아마 물가에서 실컷 물을 마시고 낮잠을 자려던 찰나 내 발소리에 놀라서 깼고, 그래서 짜증이 많이 나 있는 듯했다. 놈은 핏발이 선 눈에 살기를 띠고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 나는 도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서늘한 공포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산돼지는 많이 봤지만 이렇게 큰 놈은 처음 보았다.
  • 예전에 자주 산에 다니던 사냥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산속에서 서열 1위가 돼지, 2위가 곰, 3위가 호랑이라는 말이 틀린 것 하나 없다.
  • 그러니까 멧돼지가 곰이나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돼지는 멍청한 동물이라 드세고 속도도 빠르다. 산에서 멧돼지를 만나면 별로 건드리지 않아도 제 쪽에서 성질 나서 사람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 나는 주저 없이 밀림 방향으로 죽어라 달렸다. 놈은 끙하는 소리를 내더니 무서운 속도로 쫓아왔다.
  • 놈의 몸집이 너무 커서 땅도 녀석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뒤 돌아볼 엄두도 못 냈다. 저놈과 속도를 겨룬다는 건 멍청한 짓이다.
  • 나는 노선을 변경해서 S자로 뛰었다. 몇 번인가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오더니 멧돼지의 거대한 몸집이 바람과 함께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직선으로 뛰었더라면 얼마 못 가 저놈의 발아래에 깔렸을 것이다.
  • 비록 등 뒤에 눈이 달린 건 아니지만 멧돼지를 피해 요리조리 도망 다니는 내 모습을 영상으로 남겼으면 성룡 형님의 영화보다 더 생동감 있는 액션 장면이 나왔을 것이다.
  • 나는 여기저기 부딪치며 겨우 밀림으로 뛰어 들어갔고 멧돼지는 울부짖으며 맹렬히 추격해 왔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는 놈의 거대한 몸집이 가장 큰 약점이 된다.
  • 나는 나무들 사이로 쉴 새 없이 달렸고 뒤쪽에서 나무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어린 나무들은 아예 놈에 의해 부러져 버렸다. 참으로 태풍이 휘몰아치고 간듯한 광경이었다.
  • 나무들의 엄호를 받으며 나는 드디어 멧돼지의 추격에서 벗어났다. 놈이 더는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 쉬기 시작했다.
  • 벌떼의 공격에서 멧돼지의 추격까지, 기진맥진할 때까지 달렸다. 한참 휴식을 취하고 나서야 기력이 좀 회복되자 그제야 몸 곳곳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 미친 듯이 도망 다니느라 온몸에 나뭇가지에 찔린 상처가 나 있었다. 멧돼지한테 쫓길 때는 너무 긴장한 탓에 아픈 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은 여기저기 다 아팠다.
  • 더 기분 나쁜 건 등 뒤가 끈적끈적한 것으로 보아 새알들이 다 깨진 것 같았다.
  •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데! 다들 배를 곯고 있을 텐데!
  • 나는 또 반나절을 들여 새알 몇 십 알을 찾아냈다. 돌아갈 길을 찾고 있을 때 아까 다 썼다고 생각했던 행운이 또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눈앞에 코코넛 나무가 있었다!
  •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코코넛이었다. 아까 올 때 샅샅이 살펴도 보이지 않던 것이 이렇게 내 눈앞에 떡하니 있는 것이다.
  • 그럼 그렇지. 이런 열대 섬에 코코넛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코코넛의 번식 과정은 꽤 재미있다. 코코넛 나무는 주로 해변에서 많이 자라는데 잘 익은 코코넛 열매는 바다에 떨어져 표류하다가 육지에 도착하면 뿌리를 내릴 수 있다.
  • 비록 체력이 다 바닥난 상태였지만, 코코넛의 유혹에 나는 또다시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코코넛 몇 개를 땄다.
  • 하지만 행운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내가 표식을 해놓았던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