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인들의 주먹질을 피해 도끼를 들고 밀림으로 향했다. 십 분쯤 지났을까, 나는 기다란 칡넝쿨과 마른 나뭇가지들을 꺾어서 돌아왔다.
열대우림에는 널린 게 나무와 칡이다. 나는 다시 동굴로 올라가서 칡넝쿨을 아래로 드리웠다. 하지만 여자들은 가파른 암벽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위에서 큰 소리로 응원했고 여혜미가 가장 먼저 밧줄을 허리에 단단히 묶었다.
여혜미는 그래도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평소에는 믿음직스럽지 못한 행동을 많이 해도 생명과 안전에 관한 일에서는 누구보다 철저하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 지시에 따라 밧줄을 허리에 묶고 양손을 교차해서 칡넝쿨을 단단히 잡은 채 누운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내 지휘 아래 그녀는 천천히 동굴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다음 주자는 티나였다. 그녀는 심윤아의 도움을 받아 넝쿨을 허리에 묶고 조심스럽게 올라왔다.
여자 셋을 다 동굴까지 끌어 올리는 일도 체력을 많이 소모하는 일이었다. 나는 잠깐 휴식을 취한 뒤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빛이 우리의 얼굴을 비추며 동굴 벽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동굴 안을 가득 채웠던 습기도 재빨리 증발해버리면서 주변이 건조해졌다. 나는 잠깐 휴식을 취하고 여자들에게 기다리란 말 한마디 남긴 채 먹을 것을 찾아 동굴을 나섰다.
나는 단단한 암석을 하나 찾아 넝쿨을 단단히 묶었다. 그러고는 여자들에게 만약 내가 밤이 돼도 돌아오지 못하면 넝쿨을 타고 내려가서 박준 패거리들을 찾으라고 일러두었다.
“우린 떨어져 죽는 게 더 무서워! 그러니까 기다릴게!”
“이건 나를 향한 고백인가?”
나는 호탕하게 웃으며 넝쿨을 잡고 동굴에서 뛰어내렸다. 허공에서 유인원처럼 긴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도끼를 들고 홀로 밀림으로 들어갔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겉보기에 아름다운 열대우림이 사실은 양귀비꽃처럼 화려한 외모와 치명적인 위험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목숨 걸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한테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모든 물품을 그 개자식들한테 빼앗겼으니까!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밀림에 손을 내밀어야 했다.
발아래에는 푹신한 낙엽들이 쌓여 있어 마치 카펫을 걷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경각심을 늦추지 않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열대우림은 위장에 능숙한 독사들이 득실대는 곳이다.
숲 속에는 길이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길을 막고 있는 나뭇가지들을 향해 쉴 새 없이 도끼를 휘둘러야 했다. 얼마 가지 않았는데도 팔목이 부러질 듯 아팠다.
한참 가다 보니 거대한 식물을 발견했다. 나는 잎사귀가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 그 식물을 보자 저도 모르게 환호를 질렀다.
나는 이 식물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아프리카의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의 상징 여인초였다.
여인초는 바나나 열매를 맺지는 못하지만 생김새가 바나나 나무를 많이 닮은 식물이다. 그 잎사귀에는 수분이 가득 차 있어 여행자의 갈증을 해소하는 용도로 많이 알려져 여인초라는 이름이 붙었다.
도끼로 줄기를 자르자 맑은 물줄기가 뿜어 나왔다. 나는 재빨리 입을 대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평생 이렇게 달콤한 물은 처음 마셔보는 것 같았다. 하도 많이 마셔서 배까지 불렀다. 다시 활기를 되찾은 나는 큰 잎사귀를 잘라서 챙기고는 계속 앞으로 걸었다.
새들이 지저귀며 나뭇가지 위로 날아올랐다. 순간 나는 눈이 번쩍 떠졌다.
이게 내가 찾던 것이다!
나는 내가 이 밀림에서 왕 행세를 하며 아무거나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난 나 자신을 잘 알았다. 몇만 년을 거쳐 힘을 키워 온 이 밀림에서 나는 그저 나약한 외부인일 뿐이고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중에서 조류는 최상의 목표였다.
나는 아까 땄던 여인초 잎을 접어 모자처럼 머리에 쓰고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 운 좋게도 새 둥지에 열 알 남짓한 새알이 들어있었다. 이것 역시 내 목표 중 하나였다.
나는 여인초 모자를 벗어 새알을 집어넣고 칡넝쿨로 허리에 단단히 묶었다. 옆을 보니 새들이 또 있었다.
나는 주저 없이 옆 나무의 새 둥지까지 털었다. 그런데 이번엔 운이 나빠서 날아간 새들이 내가 둥지를 털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시 날아와서 자지러지게 울었다.
인간을 한 번도 접촉해보지 못한 새들은 한참 울더니 내가 물러서려 하지 않자 아예 날아와서 부리로 나를 쪼았다.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나는 도끼를 들어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새의 민첩함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것 같다. 녀석은 허공에서 날렵하게 방향을 틀어 도끼를 스치고 날아가 버렸다. 새의 거친 날개가 내 얼굴을 쳤고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나는 급기야 눈을 감았다. 눈가가 얼얼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눈가에 가져갔다.
하지만 내가 잊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나무 위에 있던 나는 손을 놓자마자 미끄러지며 아래로 추락했다.
나는 급기야 도끼를 들어 탄탄해 보이는 나뭇가지를 찍었다. 그제야 간신히 추락은 피할 수 있었다. 내가 겨우 숨을 돌리는데 귓가에 간담을 서늘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윙윙….”
손톱만 한 벌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내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제길! 아까 도끼로 내리찍었던 나뭇가지에 공교롭게 벌 둥지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이런 열대에 서식하는 벌들은 독성이 매우 강한 종류이다. 한 무리가 뭉치면 코끼리 한 마리도 쏘아 죽일 수 있다. 내 몸은 두세 방이면 하늘나라로 가게 될 것이다.
나는 다리에 힘을 풀어 나무를 타고 신속히 밑으로 내려갔다. 바지와 피부가 거친 나무껍질에 긁혔지만 아픈 감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냅다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다.
나는 아까 오면서 도끼로 표시해둔 길을 따라 죽기 살기로 달렸다. 뒤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렸다.
전속력으로 달리느라 체력은 바닥이 나고 있었고 숨이 턱에 찼다. 두 다리는 마비될 지경인데 벌떼는 여전히 바싹 쫓아오고 있었다. 거의 절망하고 있을 때 갑자기 주변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나는 길을 잃을 수 있다는 걱정은 제쳐 두고 과감히 내가 표시해 두었던 길을 포기하고 옆쪽 나무숲으로 뛰어갔다.
가지가 무성한 나무 몇 그루를 지나자 눈앞이 탁 트이는 광경이 펼쳐졌다.
눈앞에는 넓고 푸른 초원이 펼쳐졌고 중앙에 곡선이 아름답게 뻗은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많은 새가 이곳에 서식하고 있는 듯했다. 내 발걸음 소리에 약삭빠른 놈은 높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일부는 멍청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원시 삼림에 이런 거대한 습지가 있다니. 나는 감탄하기에 앞서 빠르게 달려 나가 물속에 뛰어들었다.
차고 맑은 강물은 내 허리춤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나는 급기야 몸을 낮춰 완전히 물속으로 들어가서 숨었다.
끈질긴 벌떼들은 수면위에서 한참이나 돌다가 결국엔 안 되겠는지 포기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물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멀리 떠나는 벌떼들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고 다시 강가로 올라왔다.
허리춤을 만져보니 다행히 아까 챙겨 두었던 새알은 그대로 있었다. 기분 좋게 돌아가는 길을 찾으려는데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은 물체가 보였다. 그놈도 고개를 들고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제길! 나는 그저 울고 싶었다.
송아지만 한 크기에 검고 흙투성이가 된 털, 입 밖으로 삐져나온 긴 이빨, 볼품없는 긴 코. 놈은 나를 바라보며 쉴새 없이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이건…거대한 멧돼지였다!
아마 물가에서 실컷 물을 마시고 낮잠을 자려던 찰나 내 발소리에 놀라서 깼고, 그래서 짜증이 많이 나 있는 듯했다. 놈은 핏발이 선 눈에 살기를 띠고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도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서늘한 공포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산돼지는 많이 봤지만 이렇게 큰 놈은 처음 보았다.
예전에 자주 산에 다니던 사냥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산속에서 서열 1위가 돼지, 2위가 곰, 3위가 호랑이라는 말이 틀린 것 하나 없다.
그러니까 멧돼지가 곰이나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돼지는 멍청한 동물이라 드세고 속도도 빠르다. 산에서 멧돼지를 만나면 별로 건드리지 않아도 제 쪽에서 성질 나서 사람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나는 주저 없이 밀림 방향으로 죽어라 달렸다. 놈은 끙하는 소리를 내더니 무서운 속도로 쫓아왔다.
놈의 몸집이 너무 커서 땅도 녀석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뒤 돌아볼 엄두도 못 냈다. 저놈과 속도를 겨룬다는 건 멍청한 짓이다.
나는 노선을 변경해서 S자로 뛰었다. 몇 번인가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오더니 멧돼지의 거대한 몸집이 바람과 함께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직선으로 뛰었더라면 얼마 못 가 저놈의 발아래에 깔렸을 것이다.
비록 등 뒤에 눈이 달린 건 아니지만 멧돼지를 피해 요리조리 도망 다니는 내 모습을 영상으로 남겼으면 성룡 형님의 영화보다 더 생동감 있는 액션 장면이 나왔을 것이다.
나는 여기저기 부딪치며 겨우 밀림으로 뛰어 들어갔고 멧돼지는 울부짖으며 맹렬히 추격해 왔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는 놈의 거대한 몸집이 가장 큰 약점이 된다.
나는 나무들 사이로 쉴 새 없이 달렸고 뒤쪽에서 나무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어린 나무들은 아예 놈에 의해 부러져 버렸다. 참으로 태풍이 휘몰아치고 간듯한 광경이었다.
나무들의 엄호를 받으며 나는 드디어 멧돼지의 추격에서 벗어났다. 놈이 더는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 쉬기 시작했다.
벌떼의 공격에서 멧돼지의 추격까지, 기진맥진할 때까지 달렸다. 한참 휴식을 취하고 나서야 기력이 좀 회복되자 그제야 몸 곳곳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미친 듯이 도망 다니느라 온몸에 나뭇가지에 찔린 상처가 나 있었다. 멧돼지한테 쫓길 때는 너무 긴장한 탓에 아픈 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은 여기저기 다 아팠다.
더 기분 나쁜 건 등 뒤가 끈적끈적한 것으로 보아 새알들이 다 깨진 것 같았다.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데! 다들 배를 곯고 있을 텐데!
나는 또 반나절을 들여 새알 몇 십 알을 찾아냈다. 돌아갈 길을 찾고 있을 때 아까 다 썼다고 생각했던 행운이 또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눈앞에 코코넛 나무가 있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코코넛이었다. 아까 올 때 샅샅이 살펴도 보이지 않던 것이 이렇게 내 눈앞에 떡하니 있는 것이다.
그럼 그렇지. 이런 열대 섬에 코코넛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코코넛의 번식 과정은 꽤 재미있다. 코코넛 나무는 주로 해변에서 많이 자라는데 잘 익은 코코넛 열매는 바다에 떨어져 표류하다가 육지에 도착하면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비록 체력이 다 바닥난 상태였지만, 코코넛의 유혹에 나는 또다시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코코넛 몇 개를 땄다.
하지만 행운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내가 표식을 해놓았던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