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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죽음의 탐색3

  • 우리는 지금 침팬지와 악어의 협공에 동서남북 따위 고려할 틈 없이 보이는 대로 달리고 또 달렸다.
  • 사람이 위급하면 초인적인 힘이 나온다고 걸음아 나 살려라, 우리 둘은 미친 듯이 달렸다. 그런데 눈앞에 또다시 습지대가 펼쳐졌고 우리는 밀림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 우리가 닥치는 대로 돌아다니다 보니 악어와 침팬지는 어느덧 보이지 않았지만, 덕분에 우리도 방향을 잃었다.
  • 너무 우거진 수풀 탓에 바람이 잘 들어오지 않아 매우 덥고 답답했으며 나의 웃옷은 진작에 티나의 생리대가 되어 사라졌고 벌거벗은 상체는 가지들로 생긴 생채기들이 가득했는데 땀 범벅이 된 탓에 쓰라리고 가려웠다.
  • 애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완전히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옷이 달라붙어 아름다운 몸매 라인이 적나라하게 비쳤는데 내가 다 눈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벌렁거릴 지경이었다.
  • “저… 저는 더 못해요….”
  • 애리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하지만 나는 급히 그녀를 다시 일으켰다.
  • “격렬한 운동 후 바로 쉬면 안 돼요. 심장과 뇌가 혈액이 부족해져서 손상을 입을 수 있어요. 우리 일단 천천히 걸어요! 걸으면서 천천히 호흡하며 혈액순환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게 해요.”
  • 애리는 거의 나에게 매달리다시피 기대며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 “근데 저 정말로 더 걸을 수가 없어요. 저 좀 부축해 주세요!”
  • 우리 둘의 몸은 밀착된 채 비벼졌고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와 무언가를 하기에는 장소가 좋지 못했다.
  • 나는 마음속에 피어오르던 불길을 애써 잠재우고 그녀를 부축한 채 주변을 돌아보았다. 수풀은 매우 우거지고 빽빽했다.
  • 나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밀림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해 뻗어 있었는데 서쪽엔 드넓은 바다가 있었다. 우리가 비록 지금 밀림의 어느 쪽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쪽을 향해 계속 걸어가다 보면 밀림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 지금 해야 할 것은, 방향을 확인하는 것이다.
  • 나는 일단 큰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태양이 떠 있는 방향을 확인하였다. 그리고는 내려와 애리를 데리고 앞을 향해 걸어갔다.
  • 애리는 비틀거리며 거의 내게 끌려가다시피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투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예요…? 천천히 가기로 했잖아요.”
  • 나는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 “방금 태양을 봤는데 지금쯤이면 아마 4시에서 5시 정도 됐을 거예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밀림에서 못 빠져나간다면 우리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예요!”
  • 애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더는 뭐라 하지 않았고 우리는 앞을 향해 걸어갔다. 몇 걸음 걸을 때마다 나는 나무에 올라가 방향을 확인해야만 했고 걷다가 섰다가 반복하던 우리는 결국 밀림에서 밤을 맞이하였다.
  • 나는 매우 초조해졌다. 밤이 되었다는 것은 밀림에서의 위험지수가 배가 되었다는 것이고 많은 동물이 밤을 틈타 먹을거리를 찾아 돌아다닐 것이다. 내가 밖으로 나온 지 이미 하루, 세 여인은 아마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돌아갈 때까지 그녀들이 부디 얌전히, 날 찾는다고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길 바랄 뿐이다.
  • 내 속이 타들어 가든 말든 태양은 지고 달은 떴다. 자연의 섭리는 어김없이 찾아왔고 밀림엔 어둠이 찾아왔다.
  • 나는 애리를 불러 잡아 세웠다. 당장 나갈 수 없다면 잠시 여기에 머무르는 수밖에. 나는 주변을 돌아보며 올라가 밤을 지새울 수 있는 적당한 나무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 이때 귓가에 샤샤샥-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10m 정도 떨어진 나무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 보였다.
  • 이미 어둠이 가득 드리워진 밀림에 나는 저 그림자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초록빛을 띤 눈동자를 발견한 나는 절대로 만만한 상대는 아닐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 “나무 위로 올라가요!”
  • 나는 한 걸음 가로질러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조용히 알렸다.
  • 초록색 눈을 한 그것이 매우 조심스러운 자세로 탐색하듯 몇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어렴풋이 알록달록 얼룩진 금색의 털가죽이 보였다.
  • 저건… 표범! 늑대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 비록 표범의 전투력은 늑대를 능가하지만 중요한 건 표범은 단독생활을 하고 늑대는 무리 지어 다닌다는 것이다.
  • 내가 표범과 맞닥뜨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 유형의 동물은 대형 고양이과 동물 중에서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먹을 것과 몸을 의탁할 곳만 있다면 이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 밀림, 산지, 초원, 사막, 열대우림에서도 모두 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세상에서 제일 높다는 히말라야산맥에서도 이들의 아종인 눈표범을 발견할 수 있다.
  • 표범을 만나면 절대로, 절대로 등을 돌려서 도망쳐서는 안 된다. 이런 정글 표범은 시속 120km로 우사인 볼트도 눈 깜짝할 사이에 죽여버릴 수 있다. 또한 산양을 물고도 십 미터가 넘는 높은 나무도 기어오를 수 있는 능력까지 있다.
  • 그렇기 때문에 표범을 만났으면 도망은 이미 물 건너갔으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위험하더라도 승부를 보는 것이다. 좁은 길에서 적을 만났다면 용감한 쪽이 이긴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 이 표범은 아마도 인간을 처음 봤을 것이다. 녀석은 마치 전력을 가늠하듯 조용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 사실 난 지금 피곤하고도 배고팠다. 아까 달리기로 인해 이미 내 체력은 거의 한계였다. 이제 갓 성년 된 것 같은 팔팔한 표범까지 마주하고 있자니 심장이 조금씩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 하지만 여기서 내가 죽는다면 여혜미와 두 여인도 얼마 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더욱더 세게 그러쥐고는 조금도 물러섬 없이 표범과 마주했다.
  • 잠깐 멈춰 섰던 표범이 쓱쓱 하는 소리와 함께 사뿐사뿐 내게 걸어왔다. 나는 몸을 살짝 수그린 채 침착하게 녀석을 주시했다.
  • 여유롭게 몇 발자국 걸어오던 표범이 갑자기 돌변하여 번개처럼 내게 돌진했다.
  • 녀석의 속도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까지 도달한 표범은 초록색 눈에 살기 어린 붉은 빛을 띠고 입을 크게 벌리며 비린내를 토해내고는 차갑게 빛나는 앞발톱으로 내 목을 움켜쥐려는 듯 할퀴었다.
  • “빌어먹을!”
  • 나도 고함을 지르며 황급히 뛰어올라 도끼를 내리찍었다.
  • 표범의 민첩성이란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녀석은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빠르게 도끼질을 피하며 스치듯 내 옆을 지나갔다. 덕분에 내 얼굴은 녀석의 굵고 단단한 꼬리로 강타당했다.
  • 나는 쇠바늘처럼 거친 표범의 꼬리에 맞아 거의 기절하는 줄 알았다. 나는 머리를 흔들고 있었는데 뒤에서 찬바람이 느껴졌다. 표범은 땅에 착지와 동시에 다시 튕겨 오르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 늦었다는 걸 나도 느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피하려 몸을 비틀었다. 표범의 날카로운 발톱이 내 등을 긁고 지나갔다. 등이 불타는 듯한 고통에 비명이 저절로 나왔다.
  • 전에 박준에게 입은 상처가 미처 낫지도 않았는데 이번엔 표범에게 긁힌 상처까지… 내가 비록 볼 수는 없지만 심각한 상처일 것임은 분명했다.
  • 나는 필사적으로 앞을 향해 엎드렸고 표범이 그 위를 스쳐 지나갔다. 내 몸에서 나는 피 냄새 때문에 표범은 극도의 흥분상태가 되었다. 녀석은 다시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다시 나를 덮쳤다.
  • 표범의 속도는 정말 너무 빨랐다.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녀석은 이미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 두 발톱으로 내 어깨를 낚아채고는 크게 입을 벌려 내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 나는 있는 힘껏 머리를 들어 녀석의 코를 이마로 들이받았다.
  •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내 눈앞에 무수한 별들이 떠올랐지만, 녀석도 못지않게 아팠는지 뚜렷이 움직임이 느려졌다.
  • 나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온몸의 힘을 허리에 모으고 두 다리를 표범의 허리에 끼운 채 몸을 휙 뒤집어 마치 레슬링에서 암바 걸듯이 고정한 뒤 끌어안고는 한 바퀴 굴러 아래로 내리눌렀다.
  • 나는 원을 그리다시피 하며 표범의 머리를 향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 “깽!”
  • 표범이 자지러지는 울음소리를 내며 마구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녀석이 내 등을 발톱으로 휘갈겨대는 바람에 점점 상처가 늘어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녀석의 머리를 찍고 또 찍었다.
  • 끝없이 선혈이 튀어 올랐고 표범의 머리는 나한테 찍히고 찍혀 너덜너덜해졌다. 녀석은 바닥에 사지를 늘어뜨린 채 숨을 내쉴 뿐 들이쉬질 못 했다.
  • 마침내 녀석이 미동도 없이 잠잠해졌고 온몸에 물 밀려오듯 통증이 나를 덮쳤다. 나도 기력을 잃어 녀석의 몸 위로 쓰러졌다.
  • 난 너무 피곤했고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이만 여기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끝없이 내 머리를 맴돌았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빙글빙글 돌았고 나는 견딜 수 없는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 “여택!”
  • 누군가가 나를 마구 흔들어댔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눈을 떴고 애리가 내 옆에 무릎 꿇은 채 나를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 “자면 안 돼요! 자면 안 돼….”
  • “나 너무 피곤해… 좀만 자자….”
  • 나는 너무 피곤해서 말이 자꾸만 끊겨 나왔다.
  • “안 돼요!”
  • 애리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고집스레 말했다.
  • “제가 상처를 치료할게요. 일단 앉아 봐요….”
  • 애리가 옷을 찢어 조심스레 내 등에 난 상처를 닦아냈다. 그녀가 나름대로 상처 위에 있던 진흙과 풀떼기들을 조심스레 떼어냈지만 그래도 난 너무 고통스러웠다. 내 울음소리가 다른 동물들의 주의를 끌까 봐 나뭇가지를 찾아 입에 물었다.
  • 그녀가 마침내 천으로 내 상처를 다 감쌌을 때 나뭇가지는 이미 내게 물어뜯겨 부러져 있었다.
  • 하지만 극심한 통증 덕분에 졸음도 싹 가셨다. 나는 도끼를 들고 표범에게 다가가 녀석의 목을 그어버렸고 검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려 왔다.
  • 나는 입을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 이 어두운 밤 밀림에서 불을 지피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임으로 나는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잠시 원시인처럼 굴 수밖에 없었다.
  • 따뜻한 피의 비린내 때문에 위가 경련을 일으켰지만 난 메스꺼움을 어떻게든 버티며 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쪼그라들었던 배가 내게 만족감을 표했고, 내 정신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 “자, 당신도 좀 마셔요!”
  • 나는 애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내 예상과는 달리 애리는 아무 불만 없이 나를 따라 입을 대고 벌컥벌컥 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 만약에 여혜미와 그 둘이었다면 내가 아무리 입이 닳도록 말한다고 해도 못했을 것이다!
  • 난 애리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불만 없는 것이 매우 총명했고 나도 이런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매우 편했다.
  • 애리는 피를 몇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엔 피가 묻어 마치 두꺼운 립스틱을 바른 듯했고 어두운 밤중에 어딘가 보고 있자면 가슴을 뒤흔드는 야생미마저 느껴졌다. 게다가 그녀는 나의 상처를 싸매주느라 상의가 거의 절반 찢어져 있었는데 하얀 뱃살과 잘록한 허리가 드러나 보는 사람이 하여금 알 수 없는 충동이 일게 했다.
  • 그녀는 내게 다가와 두 팔로 살며시 나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뿌리내렸다.
  • “당신의 나의 히어로예요. 나의 히어로!”
  • 그녀는 고개를 들어 눈을 감았고 기다란 속눈썹이 흔들리며 입술이 내밀어졌다.
  • 이건… 키스를 하자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