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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동굴

  • 암벽 위에서 내려다보니 밑에는 거대한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선 초록색의 열대우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안개까지 자욱해서 시력이 좋은 편임에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 이곳은… 섬인가? 아니면 대륙과 이어진 곳인가?
  •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하늘이 주신 은혜에 무릎이라도 꿇고 절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 내가 보이는 범위에서 유추해 보면 바다와 이어진 이곳은 곳곳이 높은 암벽이 자리하고 있었고 유독 우리가 떠내려온 곳만 하얀 모래사장이 있는 해변이었다. 만약 방향이 조금만 틀어졌다면 우리는 이 섬에 착륙하지 못하고 그대로 떠내려가거나 암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을 것이다….
  • “만약…우리가 밀림을 헤쳐나가다 보면…육지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 여혜미가 기대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 “아니!”
  • 내가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 “우린 가는 길에 죽게 될 거야. 시체는 썩어서 나무들의 양분이 될 것이고 영원히 발견되지 못하겠지!”
  • “왜?”
  • 세 여인이 실망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여자들은 이미 나를 리더로 믿고 따르고 있었다.
  • “야인산이라고 들어봤어요?”
  • 세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저들을 향해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야인산은 미얀마의 북쪽에 위치한 한 번도 개발된 적 없는 원시 우림이에요. 북쪽으로 더 가면 히말라야산맥이고요. 미얀마 전쟁 때 중국에서 일본과 맞서기 위해 원정군을 그곳으로 보냈었죠.”
  • “하지만 일본군에 참패를 당했고 사만 명이나 되는 원정군은 어쩔 수 없이 야인산으로 들어가게 되었죠. 마지막에 살아서 밀림을 벗어난 사람이 몇 명인지 알아요?”
  • 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사천 명이에요! 하지만 이들 사천 명도 운 좋게 이들을 발견한 미국군이 공중에서 대량의 물자를 내려보내서 겨우 살아남았던 거예요. 안 그랬으면 전군이 밀림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거예요. 열대우림 속에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산짐승들 말고도 학질 같은 질병들, 독벌레, 거머리, 모기… 전부 몸집도 크고 독성도 강한 놈들이죠. 한번 물리면 가히 치명적이에요.”
  •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 “매일같이 전쟁터를 누비던 강철의 전사들도 못살아 남았는데 우리 같은 일반인이 막연하게 열대우림을 지나간다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거예요!”
  • 내 말에 여혜미와 심윤아는 침묵했고 티나는 눈시울을 붉혔다.
  • “하지만 우리는 비행기 조난으로 이곳에 추락했으니까 항공사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우리를 찾을 거예요! 그러니까 우린 굳이 이 밀림을 뚫고 지나갈 필요는 없어요. 그냥 안전한 곳을 찾아 정착하고 조용히 구조대를 기다리면 돼요! 식량과 물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열대우림이 위험한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풍족하거든요!”
  • 내가 미소 띤 얼굴로 티나를 마주 보았다. 가끔은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공포가 힘든 상황보다 더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그녀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어야 했다. 사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섬에 추락한 뒤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정글을 마주하고 나니 점점 또렷해졌다.
  • 우리의 항공편은 서울에서 두바이로 향하는 여객기였다. 내 생각이 정확하다면 이 여객기가 지나는 바다는 이란 고원과 아라비아반도 사이에 위치한 아라비아해 하나뿐이었다.
  • 하지만 그곳은 전형적인 열대 사막 기후의 지방이지 이런 나무가 무성한 열대우림 기후는 절대 아니었다. 설마…. 우린 진작에 항로를 이탈했다는 말인가?
  • 중년 남자가 박준에게 따져 물었을 때 박준은 구체적인 위치를 설명하지 못했다. 여객기 부조종사라면 한두 번 이 항로를 비행한 것이 아닐 테고 원칙대로라면 그는 대략 우리가 어디쯤인지 짐작할 수는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때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 그렇다면…. 우리를 태운 여객기는 추락 전에 이미 항로를 벗어났다는 얘기인가? 아니면 무슨 음모가 있었던 건가?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 번에 박준을 만나면 자세히 따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하지만 지금은 빨리 안전한 곳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열대우림 가까이 왔으니 비가 자주 내릴 것이고 비바람을 막아줄 보금자리가 필요했다.
  • “아! 저쪽을 좀 봐요!”
  • 심윤아가 한 곳을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저쪽에 있는 암벽에 작은 폭포 하나가 있었다. 시원하게 흐르는 물줄기는 햇빛에 반사되어 현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 이 순간 세 여자의 물에 대한 갈망은 다이아몬드나 명품 향수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자들의 강력한 요구에 우리는 방향을 돌려 밀림의 변두리를 따라 그곳으로 출발했다.
  • 그렇게 우리는 암벽을 타고 폭포로 향했다. 밀림 특유의 신선한 공기가 바닷물의 비린내를 날려버렸다. 우리는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고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 꼬르륵… 티나의 배가 또 아우성쳤고 그녀는 쑥스럽게 얼굴을 가린 채 우리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나도 배고파서 미칠 것 같았다.
  • 반 시간쯤 지났을까 우리는 폭포 아래에 도착했다. 암벽은 엄청 높았는데 맑디맑은 물이 암벽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작은 개울을 이루고 있었고 물길 따라 밀림으로 흐르고 있었다.
  • “잠깐 여기 있어요!”
  • 내가 팔을 펼쳐 그녀들을 막았다. 그러고는 유일하게 남은 재산-도끼를 들고 빠르게 물가에 접근했다.
  • 원칙대로라면 이런 물가는 산짐승들이 많이 드나드는 장소이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아도 짐승의 발자국이나 배설물이 없자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나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엎드려서 혀로 물맛을 보았다. 오랜만에 마셔보는 물맛은 아주 달았다. 이건 아마 암벽 정상에 고인 빗물이 석회암 같은 암석들을 따라 흐르면서 천연 정화를 마친 결과물일 것이다. 마실 수 있는 물이다. 하지만 광물질 함량이 높아 많이 마셔도 좋지 않았다.
  • “이제 오셔도 돼요!”
  • 나는 여인들을 향해 손짓하며 먼저 크게 몇 모금 들이마셨다.
  • “이 물 마실 수 있는 물이에요. 하지만 많이 마셔도 안 좋아요. 광물질 함량도 좀 높고 이런 물은 충란이나 뱀알 함량도 알 수 없으니 목만 축이는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
  • 내 말을 들은 여자들은 몇 모금 목만 축이고는 더 마실 엄두를 못 냈다. 하지만 자기들끼리 뭔가 의논하더니 여혜미가 수상쩍은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 “여택아, 나 할 얘기 있어.”
  • 나한테 다가온 그녀는 손을 내밀어 내 두 눈을 단단히 막고는 기분 좋은 말투로 말했다.
  • “여사님들이 좀 씻고 싶대. 하지만 우리 셋 다 네가 무조건 훔쳐볼 거라 판단해서 내가 대신 가려 주는 거야!”
  • 첨벙, 하는 물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저도 몰래 벌거벗은 두 여인이 물속에서 물장구치는 모습을 상상했다. 햇빛 아래 여인들의 하얀 피부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 “야, 침은 왜 흘려. 더러워 죽겠네….”
  • 여혜미의 짜증 섞인 비난에 나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 “차라리 귀도 좀 막아 줘!”
  • 다 씻은 심윤아가 여혜미를 대신해 내 눈을 막았다. 그래도 여혜미보다는 부드러운 태도였다. 최소한 심윤아는 눈을 막으면서 미안하다고 얘기했으니까.
  • 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사실 눈은 이제 가릴 필요 없는데요. 여혜미랑 나는 어릴 때부터 같이 목욕한 사이예요. 쟤 가슴에 큰 점이 하나 있는 것도 알고 있는데요 뭐…. ”
  • “풋….”
  • 심윤아가 웃음을 터뜨리고 저쪽에서 여혜미의 욕설이 들렸다. 나도 얄밉게 크게 소리 내서 웃기 시작했다. 내 웃음소리에 물장구 소리가 잠시 멈추더니 여혜미가 비명을 질렀다.
  • “동굴….”
  • 나는 그녀들이 위험에 처한 줄 알고 재빨리 심윤아의 두 손을 뿌리쳤다. 여혜미와 티나가 물속에 앉아 있었는데 볼륨감 있는 가슴 절반이 물 위에 드러나 있었다. 잔잔한 물결 위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한 폭의 화면이 펼쳐져 있었다.
  • 그래도 여혜미가 좀 더 크네…. 나는 곁눈질로 사이즈를 확인하고는 그녀들의 시선을 따라 위로 올려다보았다. 폭포가 점점 가늘어지고 물줄기 끝자락에 시커먼 동굴이 하나 보였다.
  • 물줄기는 빠르게 흘러 그녀들의 몸을 감싸고 지나가고 있었고 두 여자의 벌거벗은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제야 두 여인은 내가 눈을 가리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 “악!”
  • 귀를 찌르는 비명에 숲 속에 있던 새 떼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 “내 눈, 왜 갑자기 아무것도 안 보이지?”
  • 나는 짐짓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손을 내밀어 장님 흉내를 내며 그녀들을 지나쳐 암벽 아래에 도착했다. 나는 도끼를 허리에 묶고 손에 침을 바른 뒤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도움닫기를 이용해 뛰어올라 2m 높이에 있는 뾰족한 암석을 손으로 잡았다. 그렇게 몇 번의 도움닫기를 이용해서 동굴에 도착했다. 습기가 확 얼굴을 덮쳤다.
  • 나는 눈을 감고 잠시 있다가 다시 눈을 떴다. 어느 정도 어둠에 익숙해지자 나는 동굴 안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10평 남짓한 동굴은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바닥이 평평했고 동굴 벽에서도 물기가 만져지지 않았다. 이는 이곳의 습기는 장시간 햇빛을 보지 못해 생겼다는 것을 설명한다.
  • 이 점은 매우 중요했다. 너무 습한 환경은 인체 관절에 심한 손상을 주어서 퇴행성 관절염이나 풍습 같은 질병에 걸리기 쉽다. 하지만 이곳은 간단히 불을 피우면 습기를 제거할 수 있는 정도였다.
  • 내가 동굴에서 내려왔을 때는 여자들이 옷을 다 입은 뒤였다. 티나는 얼굴이 새빨개서 내 눈을 피했고 여혜미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 나는 욕설을 퍼부으려던 그녀를 향해 손뼉을 쳤다.
  • “여사님들, 우리의 거처를 찾았어요. 우리의 동거생활은 이제 시작이에요!”
  • “혹시….”
  • 심윤아가 귀엽게 입을 오므리며 암벽 중간에 있는 동굴을 가리켰다.
  • “이거요?”
  • “그래요! 어때요?”
  • 심윤아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 질렀다.
  • “미쳤어요? 이거 최소 지면에서 7m 이상 떨어져 있어요. 어떻게 올라가요?”
  • “여러분들이 못 올라가면 박준도 마찬가지예요. 저들이 만약 또다시 허튼수작을 부리면 내가 동굴 입구에서 아무도 못 올라오게 막을 거예요! 최소한 이제 저들의 위협을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씀이에요!”
  • 나는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했다.
  • “그래요, 낮은 동굴을 찾을 수도 있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밤에 얼마나 위험한지 상상이 가요?”
  • “박준 패거리들을 제쳐두고라도 독사에 산짐승에 독벌레, 개미까지… 이런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고 가장 치명적이에요! 내 예측대로라면 이 동굴 위로 흐르는 폭포는 단류 폭포에 속해요. 매번 비가 내리면 고인 물이 장시간 흘러내릴 거예요. 좋은 은신처가 될 뿐만 아니라 야영을 할 때는 물이 가장 중요하죠.”
  • 나는 손가락까지 접어가며 설명을 이어 갔다.
  • “안전하고, 물이 있고, 바람을 막아 주고, 멀리 내다볼 수도 있고...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이 있나요?”
  • “하지만… 못 올라가잖아요….”
  • 심윤아가 난감한 기색으로 말했다.
  • 나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 “여러분들 몸을 나한테 맡기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