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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이상한 좌표

  • 나는 힘껏 티나를 끌어안았다. 그녀를 단번에 내 몸 안으로 비벼 넣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티나가 목구멍으로 갑갑한 소리가 내며 입으로 내뿜는 숨결이 화끈하게 내 얼굴에 닿았다.
  • “너무 더워요…”
  • 티나가 중얼거렸다.
  • “전 숨을 쉴 수 없어요… 어서…”
  • “내가 인공호흡을 해줄게요!”
  • 나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 “으응…”
  • 티나는 깜짝 놀라며 이를 악물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 나는 혀로 그녀의 꼭 악문 아래윗니를 벌리려 시도하는 한편 슬그머니 손을 그녀의 옷 속에 집어넣었다. 도자기처럼 매끄럽고 해면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피부가 내 손놀림에 의해 가볍게 전율했다.
  • 내가 계속 그녀의 몸을 더듬는데 갑자기 한 가닥 번갯불이 번쩍하며 순간적으로 동굴 입구를 환하게 비추었다. 이어서 우르릉 쾅쾅!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귓전을 때렸다.
  • “아…”
  • 여혜미와 심윤아가 새된 소리를 지르며 발딱 일어나 앉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내가 이 여자 저 여자 끌어안으며 방탕하게 즐기는 것을 보고 하느님이 벼락으로 경고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 폭우에 광풍이 동반해서 빗방울이 흩날리며 동굴 안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모닥불을 가장 안쪽으로 옮겨놓았고 우리 넷은 그 모닥불을 둘러싸고 암벽에 기대어 앉았다.
  • “상처가 괜찮아?”
  • 여혜미가 물었다.
  • 내가 머리를 끄덕이자 그녀가 입을 실룩거렸다.
  • “그러길래 그렇게 힘이 나서 뒤치락거렸겠지!”
  • 방금 그녀가 모든 것을 다 보았다는 생각에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심윤아와 티나도 얼굴을 붉혔는데 그 얼굴에 새빨간 불빛이 비쳐 유달리 아름다웠다.
  • “그냥 이렇게 지낸다는 것도… 방법이 아니야!”
  • 나는 화제를 돌렸다.
  • “이곳이 은폐되기는 했지만, 동굴이 깊지 못해서 비가 오면 그 영향을 많이 받게 돼. 이제 내가 좀 더 나으면 나가서 더 적합한 주거 자리를 찾아봐야겠어.”
  • 티나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 “저도 호주의 한 남자가 열대우림에 집을 짓는 걸AcFun 사이트에서 본 적이 있어요. 우리도 집을 지으면 되잖아요!”
  •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 “그 동영상을 나도 봤거든요. 그 녀석은 허풍이 많아요. 정말 그가 지은 집이라고 해도 들어가 살려면 사흘도 못 넘길걸요!”
  • “이 밀림에는 득실거리는 게 야수와 독사라고요. 거기에 광풍과 폭우도 있고. 그렇게 사방이 다 뚫린 집은 아무것도 막아내지 못해요.”
  • 티나는 혀를 홀랑 내밀었다. 나는 웃으며 계속 말했다.
  • “그래도 석굴을 찾아서 주거해야죠. 혹시 며칠 안에 구조대가 올 수도 있으니까!”
  • “그래요! 구조대는 꼭 올 거예요!”
  • 심윤아가 힘있게 머리를 끄덕였다.
  • 희망은 가물거리는 불길처럼 사람들에게 온기와 빛을 주었다. 하지만 내 마음에는 그냥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폭우는 다급하게 쏟아붓고 빨리도 물러갔다. 비가 끊기자 우리는 다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 이른 아침의 공기는 씻은 듯이 맑고 시원했다. 나는 도끼를 메고 동굴을 떠났다.
  • 그녀들에게 먹을 것을 찾으러 간다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박준의 무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 이 사람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타락했다. 그 때문에 그들을 계속 살려둘 수 없었다. 일단 철저히 타락해서 한계를 넘을 경우, 그것은 우리에게 큰 화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세상에서 두 부류의 사람이 가장 무섭다. 하나는 목숨을 내 거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낯가죽이 두꺼운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일단 한계를 넘으면 다른 사람에게 재앙이 될 수 있다.
  • 비록 몸의 상처가 다 아물지는 않았어도 나는 시급히 이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
  • 내 몸은 온통 상처투성이지만 그들의 상황 역시 별로 나은 데가 없었다. 박준이 죽지 않았다고 해도 병신은 됐을 것이니까 그의 무리는 이제 우두머리가 없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게다가 내가 그들의 움막을 다 태워버려서 어젯밤의 폭풍우에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이 몇 가지를 종합해 보고 나는 혼자서 도끼를 들고 나서게 되었다.
  • 과연 내 예상대로 그들이 조잡하게 대강 지은 움막은 이미 죄다 무너졌다. 밖에서 몇몇 여인이 옷을 말리며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무슨 말인가 수군거리고 있었다.
  • 남자 넷은 필사적으로 나무를 비비고 있었는데 스스로 나무를 비벼 불을 지피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무는 죄다 비에 젖어서 나도 어쩔 수 없는 것을 그들이라고 아무리 노력해 봤자 그냥 헛수고에 불과할 뿐이었다.
  • 박준은 헝겊을 목에 둘러 손목 힘줄이 끊어진 팔을 가슴에 고정해 놓았다. 얼굴이 이상하리만치 창백한 그는 큰 돌 위에 앉아 실성한 눈빛으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내가 오는 것을 보고 박준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갑자기 히스테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마 그 몇몇 남자들더러 나를 죽이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 나는 도끼를 어깨에 멘 채 입에 구미초를 물고 한적한 정원을 거닐 듯이 유유하게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 햇빛이 내 등을 비추며 내 그림자가 앞으로 길게 드리우게 했다. 내 그림자가 그들에게 닿을 때야 그 네 남자가 무의식중에 몽둥이를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허… 나를 죽이려고?”
  •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입에 물었던 구미초를 뱉어내며 그들을 일일이 손가락질했다.
  • “어디 덤벼봐! 내가 네놈들을 한꺼번에 쓰러뜨릴 수 있는지 없는지 한번 보자고!”
  • 몇몇 남자는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 나는 도끼를 손에 쥐고 성큼성큼 걸어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 “나는 너희들이 정말 답답해. 불도 지필 줄 모르는 찌질이 말을 들으면서 나와 함께 어려운 고비를 헤쳐나갈 생각은 없는 거야?”
  • “바보들이잖아! 야, 너희들은 모두 바보야!”
  • 네 남자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주저하자 박준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저놈의 말을 듣지 마! 너희들은 고기를 먹을 때 바로 생각했어야… 우리는 이미 물러설 길이 없어!”
  • “죽여라! 죽여라! 죽여…”
  • 박준이 미처 고함을 다 지르기 전에 내가 번개같이 달려가서 한발에 그를 쓰러뜨렸다.
  • 내가 한발로 그의 얼굴을 밟자 그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표독스러운 그의 눈빛을 보며 허리를 굽히고 나직이 말했다.
  • “넌 이제 끝났어!”
  • 박준의 가슴이 심하게 오르내렸다. 나는 그를 보며 웃고 나서 머리를 돌려 네 사람을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
  • “이놈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나를 따를 것이냐? 너희들이 선택해!”
  • 박준에게 두들겨 맞은 적이 있는 대머리 중년 남자가 맨 먼저 나뭇가지를 버리며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 “당신을 따를 것이오!”
  • “너희들은?”
  • 나는 나머지 세 사람을 노려보았다.
  • 일단 선수를 치는 사람이 있으면 뒤에 있는 사람은 심리 방어선이 쉽게 무너진다. 불과 십여 초 만에 세 남자도 다투어 나에게 충성을 표시했다.
  • 나는 엄숙한 눈길로 그들을 보며 뒤로 두 발 물러서서 쌀쌀하게 말했다.
  • “나를 따르기로 했으면 그만한 표시가 있어야 할 것이야!”
  • “표시라니?”
  • 네 사람은 의문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박준을 가리키며 손으로 내 목을 가로 그어 보였다.
  • 내 손시늉의 뜻을 그들은 이내 이해했다. 하지만 서로 눈길만 주고받을 뿐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두 글자를 내뱉었다.
  • “10초!”
  • “10.”
  • “9, 8, 7, 6…”
  • 한 왜소한 남자가 첫 사람으로 나서서 손에 든 몽둥이로 박준의 머리를 내리쳤다.
  • 박준이 얼른 몸을 피하자 몽둥이는 그의 얼굴을 스치며 땅을 찍었다. 순간적으로 진흙이 사방으로 튀는 것을 보면 그 몽둥이의 힘이 절대 약하지 않았다.
  • 앞장서는 사람이 나타나자 다른 사람들도 주저 없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박준을 덮쳤다.
  • 박준은 필사적으로 땅바닥에서 구르며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쌀쌀한 눈길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툭툭 탁탁하는 소리와 함께 박준이 비참하게 부르짖었다.
  • “그만 때려. 나 비밀 하나 있는데… 알려줄게… 우리 모든 사람의 생사와 관련된…”
  • “멈춰!”
  • 나는 몇 걸음 나서서 머리를 숙이며 박준을 내려다보았다.
  • “말해!”
  • 박준의 얼굴은 이미 돼지머리처럼 부어올랐다. 그는 피 섞인 침을 뱉어내며 나를 노려보았다.
  • “말하면 나를 살려줄 거야?”
  • 나는 시원스럽게 머리를 끄덕였다.
  • “나도 너를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너를 죽이지 못하게 할 거야. 이건 장담하지! 하지만 난 더는 너를 관계치 않을 거야. 넌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해!”
  • 박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 “만약 그 마지막 한마디가 없었다면 난 너를 믿지 않았을 거야!”
  • 심호흡하는 박준의 표정은 웃는지 우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내가 말해도 너는 믿지 않을 거야!”
  •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보았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 “비행기 사고가 나던 그 순간에 나는 청천난류를 만난 줄 알았어. 하지만 무의식중에 좌표를 보았는데 그때의 놀라움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어…”
  • 그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헐떡이며 말했다.
  • “그때의 좌표에는 우리가 북아메리카 플로리다반도의 동남부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어…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탄 비행기가 순간적으로 공간이동을 한 게 아니라면 우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항공 노선을 수천 리나 이탈했을 리 없다는 거야… 하지만 이 좌표는… 정말 무슨 일이든 다 발생할 수 있어…”
  • “이 좌표는… 북아메리카 플로리다반도 동남부…”
  • 갑자기 내 머릿속에 무서운 지명 하나가 떠오르며 온몸에 식은땀이 쭉 흘렀다.
  • “네가 가리키는 것은… 버뮤다?”
  • 박준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끄덕였다.
  • 나는 박준을 노려보며 마음속으로 그가 한 말이 죄다 거짓말이기를 바랐다.
  •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온통 절망뿐이어서 내 마음도 점점 무거워졌다.
  • 버뮤다, 세상 사람 모두가 이 무서운 지역을 알고 있다. 버뮤다는 이미 신비하고 이해할 수 없는 각종 실종사건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 우리가 왜 갑자기 여기까지 날아왔을까? 여기는 우리의 항공 노선과 수천 리나 떨어져 있다!
  • 이 버뮤다는 현대과학으로도 해석할 수 없는 존재였다…
  • 만약 박준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영원히 구조대를 만날 수 없다! 구조대원들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수천 리 밖에 있는 우리를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 게다가 여기서는 그 어떤 기계도 작동하지 못하며 지금까지 예외는 없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여기서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영원히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심지어 시신도…
  • 어쩐지… 박준의 무리가 여기서 겨우 사나흘 지내는 동안에 내 예상보다 훨씬 이르게 동료의 고기를 먹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이것은 틀림없는 자포자기였다. 박준은 영원히 구조를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나는 힘없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박준의 곁에 앉아 우리가 주거하는 곳에서 반대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 “내가 생각을 바꾸기 전에 얼른 내 눈앞에서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