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나는 티나를 꼭 끌어안고 있었고 그녀는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었다.
‘어쩐지, 꿈속의 아랍 여인이 티나를 닮았다 싶더라니….’
“이거 놔…이…변태 새끼….”
내가 옆쪽을 가리키자 티나도 고개를 돌렸다. 심윤아와 여혜미도 서로 껴안고 있었다. 나는 티나에게 밤에 추우면 서로 껴안고 자는 게 인간의 본능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티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내 하반신을 힐끗거렸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곳이 불끈 튀어나와 있었다.
‘그래서 격한 반응을 보인 거였구나.’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굳이 탓하자면 내 이름을 탓해야죠….”
“그게 이름하고 무슨 상관이죠?”
티나가 그녀만의 백치미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여혜미가 나를 꼬집었고 심윤아가 티나를 한쪽으로 끌고 갔다.
“저 사람 얘기 듣지 마세요. 저 사람은 그냥 변태예요!”
말을 마친 심윤아는 티나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고 티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버렸다.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여인들을 이끌고 움막 밖으로 나왔다.
바위를 돌아 뒤쪽으로 가보니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싸늘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어젯밤 야영지를 잘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높은 바위가 바닷바람을 막아 주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우리 넷 다 지금쯤 얼어 죽었을 것이다.
멀리 지평선 너머로 아침 해가 떠오르며 붉은 노을이 졌다. 세 여인은 넋을 놓고 이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을 느꼈다. 어젯밤 느꼈던 고민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두 손을 잎 가에 대고 ‘야호’ 하고 소리 질렀다.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내 소리에 놀란 여혜미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하하! 하늘이 이토록 푸르고 대지가 이토록 넓으니 남자는 용기 내서 앞으로 나아가야지!”
나는 당당하게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가며 말했다.
“이제 장 보러 가요!”
우리는 그대로 바닷가로 내려갔다. 썰물이 진 모래사장에는 많은 조개와 미처 파도를 따라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물고기들이 잔뜩 있었다.
나는 선두에 서서 암초를 뒤집는 시범을 보였다. 뾰족한 암초 아래 숨어있던 크기가 자두만한 게가 빠른 속도로 도망갔다.
“썰물과 함께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게들은 거의 암초 아래에 숨어 있어요. 하지만 암초를 뒤집을 때 찔리지 않게 손 조심하셔야 해요!”
나는 간단한 지시를 내린 뒤, 반대쪽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세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아마 게의 집게발에 집혔거나 암초에 손을 베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할 관문이다. 나는 여인들의 비명을 뒤로하고 어젯밤 스타킹을 놓아둔 곳으로 향했다.
어젯밤 나는 스타킹에 나무를 꽂아 바다에 담가두었다. 스타킹으로 간이 어부들이 자주 사용하는 그물망을 만든 셈이다. 미끼를 문 고기가 그물망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는 구조였다.
풀떡풀떡 뛰는 물고기들을 들고 바닷가로 돌아오자 세 여자는 꺅꺅 비명을 지르며 게 한 마리를 쫓고 있었다.
내 주먹만 한 크기의 꽃게였는데 제법 위풍당당하게 모래사장을 누비고 있었다. 세 여자는 부지런히 쫓아가면서도 누구 하나 손을 내밀어 잡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는 한숨이 나왔다. 저런 식으로 무슨 게를 잡는다고! 게가 다 멍청한 인간이라고 비웃을 판이었다.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서 허리 굽혀 꽃게의 배를 눌러 집어 들었다. 그놈은 집게발을 마구잡이로 흔들어댔지만 내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이번에 바닷가에서 상당한 양의 식량을 수확했다. 스타킹으로 잡은 바닷고기, 꽃게 세 마리에 오징어 두 마리까지 주웠다.
나는 그것들을 전부 가마에 넣고 소금을 넣고 끓였다. 얼마 안 가 해산물 특유의 비릿한 향이 풍겼다.
나는 게 세 마리는 여자들한테 양보하고 오징어를 하나 건져 올렸다. 막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악’ 하는 비명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박준이 남자 넷을 이끌고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신이 온통 먹는데 팔려 있어서 저들이 접근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 중 한 명이 어제 파묻었던 나뭇가지에 발을 찔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우린 아마 그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들 손에 들린 긴 나무토막을 보자 나는 순간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 무인도에 추락한 생존자는 28명, 그중 남자는 일곱 명, 그리고 우리 쪽에는 나 혼자였고 박준 패거리에는 남자 여섯 명이나 되는 상황. 어제 박준이 개 패듯 패버린 중년 남자를 제외하고 모두 몰려온 것이다.
그들의 의도는 대강 알 것 같았다. 의논하러 온 것이라면 나무토막을 들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고 일부러 살금살금 소리 죽여 접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따가 모두 입 다물고 있어요. 모든 건 내가 결정해요!”
나는 낮은 소리로 여인들에게 일러두고 도끼를 들고 마중을 나갔다.
“뭐죠? 또 불씨를 빌리러 오신 건가요?”
내가 날이 선 표정으로 박준을 향해 물었다. 박준은 좀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아마 식수가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뒤쪽을 보니 남자 몇 명은 이미 배고픔에 광기 어린 시선으로 여자들이 들고 있는 게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요! 여러분을 초대하러 왔어요!”
박준은 깊게 심호흡한 뒤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나는 지금도 이렇게 팀을 나눠서 움직이는 것보다 우리 생존자들끼리 뭉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러분을 모시러 왔어요!”
“내가 거절한다면요?”
내가 침착하게 답했다.
박준은 나무토막을 꽉 틀어쥔 채 나한테 서서히 다가오며 말했다.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거요!”
보아하니 박준은 이미 그들 패거리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다. 그가 앞으로 다가서자 그를 따르는 남자들이 부채꼴 모양으로 흩어지더니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 왔다.
어제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와서 내 도끼 한 방에 겁에 질려 도망갔지만, 오늘은 나무토막을 들고 온 것으로 보아 무력을 휘두를 작정으로 온 것이다!
저들이 이러는 이유도 대략 짐작이 갔다. 창백한 얼굴빛으로 보아 잘 먹지도, 쉬지도 못한 것 같았고 얼핏 보기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심지어 어렵게 빌린 불씨도 보존법을 모르다 보니 이미 꺼진 것 같았다. 그래서 저들한테는 나 같이 쉽게 불씨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박준의 입장에서는 내 존재 자체가 위협이었다. 우리 쪽의 생존 조건이 향상되는 동시에 그의 권위도 바닥으로 떨어질 테니까. 패거리들이 내 쪽으로 돌아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나를 무리로 데려가야 했다.
내가 허락한다면 우선 그의 절대적인 권위가 보장될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나는 그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저들은 사정없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저들이 들고 있는 나무토막은 내 도끼와 맞서기 위해 준비해 온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깊게 심호흡하고 뒤로 두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들어 발 아래에 금을 긋고 도끼를 치켜들었다.
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들을 향해 말했다.
“여기 불도 있고 가마도 있고 식량도 있어요! 필요하면 다 가져가요! 이게 내가 참아드릴 수 있는 한계예요. 우리는 이 선 뒤에 서 있을게요. 만약 당신들이 이 선을 넘어온다면, 어디 한번 피 터지게 싸워 보죠!”
“여택아….”
뒤에 있던 여혜미가 불만스러운 말투로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낮게 주의를 주었다.
“닥쳐!”
내 사나운 모습에 여혜미는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내 눈짓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더 말은 하지 않았다.
박준은 넋을 놓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내가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사색에 잠겼고, 나는 등 뒤로 세 여인을 향해 손짓했다. 내 손짓을 본 여자들이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런 행동들은 금세 박준에게 간파당했다. 놈은 여인들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저들을 잡아!”
“박준!”
나는 이를 갈며 박준을 향해 도끼를 치켜들었다.
“여기서 꼭 피를 보아야겠어? 그래, 인정할게. 당신들은 사람이 많고 나 혼자서는 당신들을 못 이겨! 하지만 죽기 살기로 싸우면 난 절대 혼자 죽지는 않을 거야! 믿지 못하겠으면 어디 한번 시험해봐!”
박준이 기세등등하게 앞으로 나섰지만, 뒤에 있는 놈들은 움직임이 상당히 굼떴고 박준 혼자 앞으로 나선 꼴이 되었다. 그제야 그는 아무도 먼저 매 맞기를 자초하지 않을 것을 알아차렸다.
두바이 항공편에 오른 사람 들은 거의 대부분이 일정한 실력을 갖춘 사업가들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일수록 생각이 많고 이기적이다. 내가 저들과 함께하기 싫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점에서였다.
“덤벼!”
나는 큰소리로 외치며 도끼를 높이 치켜들고 앞으로 두 발자국 걸어 나가서 독기 어린 눈빛으로 저들을 쏘아보았다.
내 기세에 압도당했는지 박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신속히 결단을 내렸다.
“좋아! 그렇게 하지!”
나는 저들이 우리가 갓 잡아 온 식량들을 먹어 치우고 움막으로 들어가서 옷가지와 다른 물건들을 안고 나오는 모습을 이를 악물고 지켜보았다. 저들은 우리의 모든 물건을 빼앗고 횃불을 들고 자리를 떴다.
내가 이를 부드득 갈고 있는데 뒤쪽에서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눈물범벅이 된 티나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나쁜 놈들! 망할 자식들….”
여혜미와 심윤아도 주먹을 꽉 쥔 채 사라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쏘아보고 있었다.
“저들 탓이 아니에요!”
나는 티나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계속 강조했던 것이 이런 거예요. 지금 우리는 무인도에 있고 문명사회의 윤리 도덕과 법률은 여기서 아무런 작용도 없어요! 여기는 한 가지 법칙만 따라요. 정글의 법칙! 간단하게 말하면… 약육강식이죠! 예전에 한 작가가 그랬어요. 가난한 생활이 온화하고 매너 있는 사람을 짐승으로 만든다고요. 아직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일주일, 십일 뒤였으면 저들이 어떻게 나올 것 같나요?”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저들은 아마 주저 없이 우리를 죽일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고기를 말려 식량으로 먹겠죠! 나 괜히 겁주는 거 아니에요. 잔인하긴 하지만 이게 현실이에요!”
여혜미가 등 뒤에서 나를 잠깐 끌어안더니 재빨리 다시 놓아주었다. 그녀가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알아. 우리가 없었으면 너는 주저 없이 저들과 한판 싸움을 벌였겠지! 가끔은 참는 자가 더 용기 있는 자야!”
여혜미는 현명한 여자였다. 비록 평소에 나한테 까칠하게 굴기는 했어도 이럴 때 나한테 가장 필요한 게 위로와 격려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고 바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여기를 떠나야 해요! 며칠 뒤 배고픔과 추위가 저들의 마지막 남은 양심까지 삼켜버리면 그 때엔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해요!”
“안전한 곳이요?”
심윤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떤 방면으로 안전한 곳이요?”
“수비하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곳이요!”
나는 음산한 말투로 말을 마친 뒤,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움막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앞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이제부터 우리에게는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더 먼 곳으로 가야만이 살아갈 희망이라도 찾을 수 있었다. 맹목적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젯밤 나는 새떼들이 깊은 밀림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밀림 속에 새떼들의 보금자리와 먹이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섬은 면적이 상당한 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