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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정글의 법칙

  • 귓가에서 새된 비명이 들렸다!
  • 눈을 떠보니 나는 티나를 꼭 끌어안고 있었고 그녀는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었다.
  • ‘어쩐지, 꿈속의 아랍 여인이 티나를 닮았다 싶더라니….’
  • “이거 놔…이…변태 새끼….”
  • 내가 옆쪽을 가리키자 티나도 고개를 돌렸다. 심윤아와 여혜미도 서로 껴안고 있었다. 나는 티나에게 밤에 추우면 서로 껴안고 자는 게 인간의 본능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 티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내 하반신을 힐끗거렸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곳이 불끈 튀어나와 있었다.
  • ‘그래서 격한 반응을 보인 거였구나.’
  •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이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굳이 탓하자면 내 이름을 탓해야죠….”
  • “그게 이름하고 무슨 상관이죠?”
  • 티나가 그녀만의 백치미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여혜미가 나를 꼬집었고 심윤아가 티나를 한쪽으로 끌고 갔다.
  • “저 사람 얘기 듣지 마세요. 저 사람은 그냥 변태예요!”
  • 말을 마친 심윤아는 티나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고 티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버렸다.
  •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여인들을 이끌고 움막 밖으로 나왔다.
  • 바위를 돌아 뒤쪽으로 가보니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싸늘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어젯밤 야영지를 잘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높은 바위가 바닷바람을 막아 주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우리 넷 다 지금쯤 얼어 죽었을 것이다.
  • 멀리 지평선 너머로 아침 해가 떠오르며 붉은 노을이 졌다. 세 여인은 넋을 놓고 이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을 느꼈다. 어젯밤 느꼈던 고민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두 손을 잎 가에 대고 ‘야호’ 하고 소리 질렀다.
  •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 내 소리에 놀란 여혜미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 “하하! 하늘이 이토록 푸르고 대지가 이토록 넓으니 남자는 용기 내서 앞으로 나아가야지!”
  • 나는 당당하게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가며 말했다.
  • “이제 장 보러 가요!”
  • 우리는 그대로 바닷가로 내려갔다. 썰물이 진 모래사장에는 많은 조개와 미처 파도를 따라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물고기들이 잔뜩 있었다.
  • 나는 선두에 서서 암초를 뒤집는 시범을 보였다. 뾰족한 암초 아래 숨어있던 크기가 자두만한 게가 빠른 속도로 도망갔다.
  • “썰물과 함께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게들은 거의 암초 아래에 숨어 있어요. 하지만 암초를 뒤집을 때 찔리지 않게 손 조심하셔야 해요!”
  • 나는 간단한 지시를 내린 뒤, 반대쪽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세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아마 게의 집게발에 집혔거나 암초에 손을 베인 것 같았다.
  • 하지만 이런 것들은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할 관문이다. 나는 여인들의 비명을 뒤로하고 어젯밤 스타킹을 놓아둔 곳으로 향했다.
  • 어젯밤 나는 스타킹에 나무를 꽂아 바다에 담가두었다. 스타킹으로 간이 어부들이 자주 사용하는 그물망을 만든 셈이다. 미끼를 문 고기가 그물망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는 구조였다.
  • 풀떡풀떡 뛰는 물고기들을 들고 바닷가로 돌아오자 세 여자는 꺅꺅 비명을 지르며 게 한 마리를 쫓고 있었다.
  • 내 주먹만 한 크기의 꽃게였는데 제법 위풍당당하게 모래사장을 누비고 있었다. 세 여자는 부지런히 쫓아가면서도 누구 하나 손을 내밀어 잡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 나는 한숨이 나왔다. 저런 식으로 무슨 게를 잡는다고! 게가 다 멍청한 인간이라고 비웃을 판이었다.
  •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서 허리 굽혀 꽃게의 배를 눌러 집어 들었다. 그놈은 집게발을 마구잡이로 흔들어댔지만 내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 이번에 바닷가에서 상당한 양의 식량을 수확했다. 스타킹으로 잡은 바닷고기, 꽃게 세 마리에 오징어 두 마리까지 주웠다.
  • 나는 그것들을 전부 가마에 넣고 소금을 넣고 끓였다. 얼마 안 가 해산물 특유의 비릿한 향이 풍겼다.
  • 나는 게 세 마리는 여자들한테 양보하고 오징어를 하나 건져 올렸다. 막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악’ 하는 비명이 들렸다.
  •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박준이 남자 넷을 이끌고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신이 온통 먹는데 팔려 있어서 저들이 접근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 그들 중 한 명이 어제 파묻었던 나뭇가지에 발을 찔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우린 아마 그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 그들 손에 들린 긴 나무토막을 보자 나는 순간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 무인도에 추락한 생존자는 28명, 그중 남자는 일곱 명, 그리고 우리 쪽에는 나 혼자였고 박준 패거리에는 남자 여섯 명이나 되는 상황. 어제 박준이 개 패듯 패버린 중년 남자를 제외하고 모두 몰려온 것이다.
  • 그들의 의도는 대강 알 것 같았다. 의논하러 온 것이라면 나무토막을 들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고 일부러 살금살금 소리 죽여 접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이따가 모두 입 다물고 있어요. 모든 건 내가 결정해요!”
  • 나는 낮은 소리로 여인들에게 일러두고 도끼를 들고 마중을 나갔다.
  • “뭐죠? 또 불씨를 빌리러 오신 건가요?”
  • 내가 날이 선 표정으로 박준을 향해 물었다. 박준은 좀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아마 식수가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뒤쪽을 보니 남자 몇 명은 이미 배고픔에 광기 어린 시선으로 여자들이 들고 있는 게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 “아니요! 여러분을 초대하러 왔어요!”
  • 박준은 깊게 심호흡한 뒤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 “나는 지금도 이렇게 팀을 나눠서 움직이는 것보다 우리 생존자들끼리 뭉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러분을 모시러 왔어요!”
  • “내가 거절한다면요?”
  • 내가 침착하게 답했다.
  • 박준은 나무토막을 꽉 틀어쥔 채 나한테 서서히 다가오며 말했다.
  •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거요!”
  • 보아하니 박준은 이미 그들 패거리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다. 그가 앞으로 다가서자 그를 따르는 남자들이 부채꼴 모양으로 흩어지더니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 왔다.
  • 어제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와서 내 도끼 한 방에 겁에 질려 도망갔지만, 오늘은 나무토막을 들고 온 것으로 보아 무력을 휘두를 작정으로 온 것이다!
  • 저들이 이러는 이유도 대략 짐작이 갔다. 창백한 얼굴빛으로 보아 잘 먹지도, 쉬지도 못한 것 같았고 얼핏 보기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심지어 어렵게 빌린 불씨도 보존법을 모르다 보니 이미 꺼진 것 같았다. 그래서 저들한테는 나 같이 쉽게 불씨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박준의 입장에서는 내 존재 자체가 위협이었다. 우리 쪽의 생존 조건이 향상되는 동시에 그의 권위도 바닥으로 떨어질 테니까. 패거리들이 내 쪽으로 돌아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나를 무리로 데려가야 했다.
  • 내가 허락한다면 우선 그의 절대적인 권위가 보장될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나는 그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저들은 사정없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저들이 들고 있는 나무토막은 내 도끼와 맞서기 위해 준비해 온 것이 틀림없었다.
  • 나는 깊게 심호흡하고 뒤로 두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들어 발 아래에 금을 긋고 도끼를 치켜들었다.
  • 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들을 향해 말했다.
  • “여기 불도 있고 가마도 있고 식량도 있어요! 필요하면 다 가져가요! 이게 내가 참아드릴 수 있는 한계예요. 우리는 이 선 뒤에 서 있을게요. 만약 당신들이 이 선을 넘어온다면, 어디 한번 피 터지게 싸워 보죠!”
  • “여택아….”
  • 뒤에 있던 여혜미가 불만스러운 말투로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낮게 주의를 주었다.
  • “닥쳐!”
  • 내 사나운 모습에 여혜미는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내 눈짓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더 말은 하지 않았다.
  • 박준은 넋을 놓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내가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사색에 잠겼고, 나는 등 뒤로 세 여인을 향해 손짓했다. 내 손짓을 본 여자들이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 하지만 이런 행동들은 금세 박준에게 간파당했다. 놈은 여인들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 “저들을 잡아!”
  • “박준!”
  • 나는 이를 갈며 박준을 향해 도끼를 치켜들었다.
  • “여기서 꼭 피를 보아야겠어? 그래, 인정할게. 당신들은 사람이 많고 나 혼자서는 당신들을 못 이겨! 하지만 죽기 살기로 싸우면 난 절대 혼자 죽지는 않을 거야! 믿지 못하겠으면 어디 한번 시험해봐!”
  • 박준이 기세등등하게 앞으로 나섰지만, 뒤에 있는 놈들은 움직임이 상당히 굼떴고 박준 혼자 앞으로 나선 꼴이 되었다. 그제야 그는 아무도 먼저 매 맞기를 자초하지 않을 것을 알아차렸다.
  • 두바이 항공편에 오른 사람 들은 거의 대부분이 일정한 실력을 갖춘 사업가들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일수록 생각이 많고 이기적이다. 내가 저들과 함께하기 싫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점에서였다.
  • “덤벼!”
  • 나는 큰소리로 외치며 도끼를 높이 치켜들고 앞으로 두 발자국 걸어 나가서 독기 어린 눈빛으로 저들을 쏘아보았다.
  • 내 기세에 압도당했는지 박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신속히 결단을 내렸다.
  • “좋아! 그렇게 하지!”
  • 나는 저들이 우리가 갓 잡아 온 식량들을 먹어 치우고 움막으로 들어가서 옷가지와 다른 물건들을 안고 나오는 모습을 이를 악물고 지켜보았다. 저들은 우리의 모든 물건을 빼앗고 횃불을 들고 자리를 떴다.
  • 내가 이를 부드득 갈고 있는데 뒤쪽에서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눈물범벅이 된 티나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 “나쁜 놈들! 망할 자식들….”
  • 여혜미와 심윤아도 주먹을 꽉 쥔 채 사라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쏘아보고 있었다.
  • “저들 탓이 아니에요!”
  • 나는 티나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 “내가 계속 강조했던 것이 이런 거예요. 지금 우리는 무인도에 있고 문명사회의 윤리 도덕과 법률은 여기서 아무런 작용도 없어요! 여기는 한 가지 법칙만 따라요. 정글의 법칙! 간단하게 말하면… 약육강식이죠! 예전에 한 작가가 그랬어요. 가난한 생활이 온화하고 매너 있는 사람을 짐승으로 만든다고요. 아직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일주일, 십일 뒤였으면 저들이 어떻게 나올 것 같나요?”
  •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 “저들은 아마 주저 없이 우리를 죽일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고기를 말려 식량으로 먹겠죠! 나 괜히 겁주는 거 아니에요. 잔인하긴 하지만 이게 현실이에요!”
  • 여혜미가 등 뒤에서 나를 잠깐 끌어안더니 재빨리 다시 놓아주었다. 그녀가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 “알아. 우리가 없었으면 너는 주저 없이 저들과 한판 싸움을 벌였겠지! 가끔은 참는 자가 더 용기 있는 자야!”
  • 여혜미는 현명한 여자였다. 비록 평소에 나한테 까칠하게 굴기는 했어도 이럴 때 나한테 가장 필요한 게 위로와 격려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나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고 바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 “이제 여기를 떠나야 해요! 며칠 뒤 배고픔과 추위가 저들의 마지막 남은 양심까지 삼켜버리면 그 때엔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해요!”
  • “안전한 곳이요?”
  • 심윤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 “어떤 방면으로 안전한 곳이요?”
  • “수비하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곳이요!”
  • 나는 음산한 말투로 말을 마친 뒤,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움막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앞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 이제부터 우리에게는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더 먼 곳으로 가야만이 살아갈 희망이라도 찾을 수 있었다. 맹목적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젯밤 나는 새떼들이 깊은 밀림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밀림 속에 새떼들의 보금자리와 먹이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섬은 면적이 상당한 섬일 것이다.
  • 세 여자는 조용히 나를 따랐고 우리는 깊은 밀림을 향해 걸어갔다.
  • 우리가 서로 부축하며 몇 개 의 바위를 넘어서자 우리의 눈앞에 놀라운 세상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