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리는 심하게 변형됐고 유리창이 산산조각 났으며 트렁크에 불까지 붙어 언제든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 운전자는 피투성이가 된 채 차 안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민연초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고민 없이 바로 달려들어 그 남자를 필사적으로 끌어냈다.
몇 미터 밖으로 끌고 나가자 ‘펑’하는 굉음과 함께 차가 그대로 폭발했다.
민연초는 소름이 끼쳤다. 그녀가 조금 더 늦었더라면 함께 폭사당했을 것이다!
중상을 입은 남자는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그녀의 손목을 힘껏 움켜쥐고 혼미한 정신으로 이렇게 말했다.
“살려줘! 병원에 데려다줘… 200억 줄게…”
200억이라니!
설마 세계 최고의 갑부를 구한 건 아니겠지?
수납 창구의 직원이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민연초가 대답하려던 그때.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본 직원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
“아, 저희 원장님 따님이신 이윤아 씨 아니세요? 아가씨,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바로 의사 선생님을 배정해 드릴게요…”
민연초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윤아는 그녀의 친언니였다. 두 사람은 똑같이 생겼지만 운명은 사뭇 달랐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유괴되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지금의 양부모에게 팔렸다.
하지만 한 달 전 양부모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입원을 하게 됐다. 그래서 큰 액수의 치료비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때 갑자기 친부모가 나타나 양부모의 병을 치료해 줄 수 있는데 우선 백혈병에 걸린 이 씨 가문의 막내아들에게 골수이식을 해줘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내걸었다. 그리고 이윤아와 똑같이 생긴 얼굴을 드러내지 말라고 했다.
친어머니인 조유란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윤아는 거문고, 바둑, 서예, 그림, 작문, 가무에 능통한 연성 제일의 미인이야. 근데 넌 그냥 시골 계집애니까 나설 처지가 못 돼. 절대 너의 존재 때문에 우리 윤아의 좋은 명성에 흠집을 낼 수는 없지.”
양부모의 치료를 위해 민연초는 모욕을 참으며 승낙했다.
그녀는 연성에서 평소에 일부러 못생겨 보이는 화장을 했다. 오늘에는 늦은 밤에 배달을 하는 거라 화장을 하기가 귀찮아 스킵 한 것이다. 그들이 알아볼 줄 몰랐고 깜빡하고 친아버지의 병원에 들어온 것이라 본인이 ‘이윤아’라고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으로 수술비 100만 원을 넣었다.
모든 일을 해결한 민연초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월세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했다. 더러워진 옷을 세탁하던 그때, 주머니에서 블랙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를 발견했다.
아까 그 남자가 자신의 옷을 잡아당길 때 주머니에 떨어뜨린 거겠지?
그녀는 별생각 없이 탁자 위에 반지를 올려두고 잠시 눈을 붙이려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걸어가 문을 열었다.
“민연초, 너 너무 천박한 거 아니야? 내가 너한테 했던 말 다 잊었어?”
늘씬한 몸매의 이윤아가 바로 민연초의 뺨을 내리쳤다.
“연성에 왔을 때 내가 경고했지. ‘내 얼굴’ 쳐들고 돌아다니지 말라고. 네 양부모의 목숨은 필요 없어진 거야?”
민연초는 화가 치밀어올라 똑같이 이윤아의 뺨을 때렸다.
양부모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친부모에게 괴롭힘을 당했지만 그녀는 결코 남에게 유린당하고 강한 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윤아는 새된 소리를 질렀다.
“민연초, 네가 감히 날 때려?”
민연초는 이윤아보다 훨씬 힘이 셌다. 뺨 한 대로 이윤아의 얼굴이 약간 부어올랐다.
민연초는 손을 털더니 에쁜 눈썹을 찌푸렸다.
“맞았으면 참아! 내가 네 엄마도 아닌데 건방진 그 성격을 참아줄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밤늦게 외간 남자를 데리고 우리 아빠 병원에 갔잖아. 그거 소문나면 난 어떻게 밖에 나가라고? 오히려 당당하네!”
이윤아는 얼굴을 붉히며 그녀를 질책했다.
“오늘 아침에 우리 아빠한테 보고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난 아직도 아무것도 몰랐겠지! 네가 내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더러운 짓을 하고 다니는지!”
“네 얼굴… 하.”
민연초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눈빛에 슬픔이 가득했다.
이 불공평한 운명. 같은 얼굴로 태어난 건데 자신은 진짜 얼굴을 보여줄 자격도 없었다.
그때, 이윤아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한쪽에 서서 전화를 받던 그녀는 눈을 살짝 돌렸다가 마침 탁자 위에 놓인 블랙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았다.
그 다이아 반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엄마, 무슨 일이야?”
그녀가 물었다.
“세상에. 우리 딸, 언제 정도련님을 구한 거야? 그렇게 큰일을 왜 엄마한테 얘기하지 않았어? 방금 정씨 가문 쪽에서 사람을 보냈는데 일주일 뒤에 너랑 만나재.”
수화기 너머의 조유란은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기뻐했다.
“정도련님?”
탁자 위의 반지를 보던 이윤아는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전에 명문가 규수들의 사교모임에 갔을 때 그들이 보낸 정도련님의 사진에서 그가 이 반지를 하고 있었다.
정씨 가문의 상속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다이아몬드 반지라고 했다.
어젯밤에 민연초가 병원에 나타났던 일까지 떠올린 이윤아는 순간 깨달았다. 알고 보니 민연초가 어제 정민한을 구한 거였구나!
그리고 민연초가 병원에 그녀의 이름을 말한 탓에 정민한이 자신이 그를 구했다고 생각하는 거였다.
그녀는 뜻밖에 정도련님의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
이건 로또에 당첨된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엄마, 나 지금 일이 좀 있어서 나중에 얘기하자.”
이윤아는 기쁨으로 날뛰는 마음을 억누르고 민연초가 한눈을 파는 틈에 슬그머니 탁자 위에서 그 반지를 가져갔다. 그녀는 민연초의 앞에 다가오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다음에 또 그러면 네 양부모의 시신을 거두게 될 거야.”
그녀는 화를 내며 나갔다.
민연초는 새벽에 들어와 잠시 눈을 붙일 생각이었는데 늦잠을 자버렸다.
그녀는 더 이상 이윤아와 따지고 싶지 않았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그 남자를 찾았다.
보상금 200억.
그녀가 목숨을 걸고 얻은 것이었다.
그런데 맙소사. 그녀가 병원에 도착해 간호사에게 묻자 밤에 깨어난 그가 바로 나갔다고 했다.
심지어 아무런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사기꾼, 개자식!”
민연초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발을 굴렀다.
“그 100만 원은 두 달 생활비인데!”
역시, 남자의 말은 믿을 것이 아니었다.
괜히 생활비 100만 원을 날렸고 배달을 잃어버려 플랫폼 측에서 배달비를 2만 원 넘게 삭감했다.
아르바이트로 배달을 뛴 것인데 휴가를 받은 이틀 동안 번 배달비를 전부 플랫폼에 배상한 꼴이 되었다.
민연초는 마음이 아팠다.
사회는 무서운 곳이고 그녀는 아직 너무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매일 더 열심히 출근을 했고 퇴근을 하면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병원에 있는 양부모에게 식사를 배달했다.
테라.
경비원 차림을 한 민연초는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며 보안팀의 동료와 CCTV 앞에 앉아 하소연했다.
“그 배은망덕한 놈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왜 이번 주에 매일 두 끼밖에 못 먹겠어? 배고파서 살이 엄청 빠졌다니까.”
교통사고를 당한 양아버지는 지금까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양어머니는 매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친부모가 치료비를 내주고 있지만 민연초는 여전히 적지 않은 일상적인 지출을 감당해야 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100만 원을 그 개자식의 수술비로 써버려서 돈이 바닥났다.
동료 진탁이 물었다.
“연초 누나, 누나한테 그 사람 말은 많이 들었는데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거예요?”
“얼굴은 기억나. 그때 의식을 잃었는데 내가 어떻게 그 사람 이름을…”
민연초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CCTV 화면 속의 누군가를 가리켰다.
“저저저… 보이지… 쟤야. 저 사람이라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개자식, 드디어 내가 널 찾았구나.”
“연초 누나, 잠깐만요.”
진탁은 민연초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CCTV 화면 속 그 사람을 가리켰다.
“이 사람 확실해요?”
“그 개 같은 남자는 재가 되어도 알아볼 수 있어.”
민연초가 나가려는데 진탁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연초 누나, 진정해요. 저 사람 이름은 정민한인데 연성의 4대 가문 중 하나인 정씨 가문의 상속자예요. 저 사람은 차갑고 악랄해요. 손에 피까지 묻혀본 사람이라고요. 누나한테 은혜를 갚으려고 했다면 말 한마디면 해결됐을 거예요. 그런데 누나를 안 찾은 걸 보면 돈을 줄 생각이 없었던 거겠죠. 연초 누나, 목숨이 더 중요해요. 100만 원일 뿐이잖아요. 우리 그냥 개한테 줬다고 생각해요.”
“정민한?”
민연초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일하는 클럽은 연성에서 제일가는 재벌들의 유흥 장소였다. 사업가와 유명 인사들만 오는 곳이어서 그녀도 정민한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진탁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민연초는 새벽 한 시까지 기다렸다. 정민한이 룸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그녀도 따라 들어갔다.
테라 클럽의 1층부터 8층까지는 술집이었고 위에는 호텔 스위트룸이 자리해 있었다.
엘리베이터. 민연초는 곁눈질로 자신보다 얼굴 하나 더 큰 정민한을 쳐다보았다. 그의 몸에서 술기운이 느껴졌는데 준수한 얼굴에 비정상적인 홍조가 어려 있었다. 그는 이따금 기다란 손가락으로 목에 있는 넥타이를 잡아당겼는데 술에 취해서 더운 것 같았다.
띵-
38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남자가 밖으로 나갔고 그녀도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정민한이 갑자기 멈춰 섰고 민연초도 조심하지 않아 그의 등에 부딪혔다.
“아야… 당신…”
남자는 이내 커다란 손바닥으로 그녀의 목을 조르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해, 너 누구야?”
“아파요…”
민연초는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뇌로 가는 산소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정민한의 손을 쳤다.
“놓아줘요, 나… 나 숨이 안 쉬어져…”
그 말을 들은 정민한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그녀가 쓰고 있던 경비원 모자를 날려버렸다.
“여자였어?”
민연초는 클럽에서 일하기 때문에 추행을 당하는 걸 피하려고 남자 목소리로 위장했고 얼굴에도 분장을 했다.
매니저와 보안팀을 제외하고는 그녀가 여자인 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네, 네.”
“말해. 누가 보냈어?”
“저… 저는 그저…”
민연초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정민한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내 여자가 되고 싶은 거야?”
그는 일찌감치 눈앞의 경비원이 수상쩍다는 걸 발견했다. 오늘 술에도 양념이 되어 있었겠지.
역시나, 또 그에게 약을 먹이고 그의 침대에 올라가려는 여자였다.
민연초는 목이 졸려서 죽을 것 같았다.
개자식,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분수가 있지!
그녀는 화가 나서 욕을 했다.
“무슨 그런…”
‘개소리’라는 말을 뱉기도 전에 남자가 손을 풀었다.
민연초는 몸이 나른해져서 주저앉더니 손으로 바닥을 짚고 숨을 몰아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녀는 38층이 통으로 개인 주택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실버 그레이 컬러의 쿨톤 인테리어가 럭셔리하고 고급스러웠다.
보아하니 정민한은 진작에 그녀가 수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나 정민한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남자는 눈에 핏발을 세운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콜록콜록콜록…”
민연초는 졸렸던 목이 따끔거려서 기침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죽으러 온 거 같으니까 네 소원을 들어줄게.”
말을 마친 정민한은 그녀의 팔을 병아리 잡듯 잡고 안방으로 데려가더니 침대에 내던졌다.
“저기, 당신… 뭐 하려는 거예요?”
민연초는 깜짝 놀랐다. 정민한이 앞에 있으니 솔직히 두려웠다.
남자는 한 손으로 넥타이를 잡아당기고 한 손으로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침실의 커튼이 닫혔고 순식간에 깜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