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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수술하다

  • 검은색 셔츠에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남자는 타고난 고귀한 분위기로 마치 하늘에서 강림한 신 같았다.
  • 차갑고도 잘생긴 그의 얼굴엔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성큼성큼 다가와 걸음을 멈추고 손을 들자 뒤에 있던 송진이 그에게 진단서를 쥐여주었다.
  • 정민한은 그걸 민연초의 얼굴에 던졌다.
  • 팔락 소리와 함께 검사 결과 몇 장이 민연초의 얼굴 위로 흩어져 침대 위에 떨어졌다.
  • 민연초는 불만스러운 듯 정민한을 노려보다가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양성이라고 쓰인 걸로 보아 임신이었다.
  • “허허.”
  • 왠지 모르게 시큰한 느낌이 밀려와 민연초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 가까스로 양부모님 교통사고의 진범을 찾았는데, 사설탐정이 폭행을 당해 중상을 입었고, 교통사고 가해 운전자는 어딘가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 그녀는 뜻밖에 아이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도 곧 잃게 되었다.
  • 어쩌면 이게 그녀의 운명일지도 몰랐다.
  • 설령 불공평하다 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왜 웃지?”
  • 정민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 민연초는 코를 훌쩍이며 문득 느껴지는 억울함을 감추고 애써 웃으며 검사 결과를 침대에 내려놓고, 시간을 확인했다.
  • “오후 한 시 니까 얼른 수술하죠. 그래야 밤에 출근을 하죠..”
  • 정민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민연초가 아이를 살려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녀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 남자는 망설이지 않았다.
  • “송진아, 의사한테 말해. 수술 준비하라고.”
  • 말을 마친 그는 뒤돌아 병실을 나섰다.
  • 그녀에게 한마디도 더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 뼛속까지 혐오하는 것 같았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가 들어와서 민연초를 수술실로 불렀다.
  •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눌하게 수술실로 들어가자 안에는 산부인과 의사가 두 명 있었다.
  • 한쪽에 놓인 도구들을 보며 마치 그것들이 몸을 헤집는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배를 만지며 다소 견딜 수가 없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만약 정민한의 아이가 아니라면 분명 지켰을 것이었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아이가 맞았다.
  • “누우세요.”
  • 흰 가운에 마스크를 쓴 여의사가 수술대를 가리키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 민연초는 멍하니 수술실을 돌아보았지만 정민한은 보이지 않았다.
  • 정말 박한 사람이었다.
  • 살아있는 생명이 그녀의 뱃속에 있는데도, 아직 모습을 갖추지도 않은 아이를 매정하게 지우려 했다.
  • 그 순간 민연초는 강해지고 싶었다.
  • 충분히 강해야만 그녀는 자신이 보호하고자 하는 사람을 보호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앞뒤로 적에게 당해 반항할 능력도 없는 게 아니라.
  • 그녀는 수술대에 누웠고, 의사는 그녀에게 주사를 놓았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 그제야 정민한은 수술실 밖에 나타났고, 의사들은 그에게 다가갔다.
  • “도련님, 아무런 저항 없이 잠드셨습니다.”
  • 그 말은, 민연초도 수술을 원한다는 뜻이었다.
  • “저 여자가 깨어나면 준비한 약을 건네주세요. 나머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아실 겁니다.”
  • 정민한의 약은 단지 태아를 보호하는 약일 뿐이었다.
  • “네, 도련님.”
  •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 정민한은 의미심장하게 민연초를 한 번 보고 돌아섰다.
  • 그러자 송진이 물었다.
  • “보스, 아이를 살릴 거면 왜 민연초 씨에게 알려주지 않은 겁니까?”
  • “저 욕심 많은 여자가 만약 내가 아이를 남겨둘 걸 알게 되면 또 주제도 모르고 나대겠지. 그럴 바엔 모르는 게 나아.”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정민한도 민연초를 시험해 보는 것이었다.
  • 그녀가 전에 했던 약속처럼 임신한 후에도 아이를 지울지.
  • 결과는…… 그가 그녀를 얕보았다.
  • “하지만 임신하면 입덧도 있고, 곧 알게 될 텐데요.”
  • “그러니까, 그동안은 내가 지켜보는 거지.”
  • 정민한은 말을 하며 걸음을 멈추고 다시 송진에게 말했다.
  • “테라에 얘기해. 매일 12시 제때 퇴근시키라고.”
  • “민연초 씨는 매일 배달 아르바이트도 하는데, 일찍 퇴근하면 또 배달을 하지 않을까요?”
  • 유산 징조가 있었던 터라 송진이 귀띔했다.
  • 정민한이 얇은 입술을 움직여 입꼬리를 올렸다.
  • “그럼, 내 뜻대로 되는 거지.”
  • 할머니가 손을 대지 못하게 했지만, 만약 그녀가 사고로 유산을 하게 된다면 그에게 나쁠 건 없었다.
  • ……
  • 반 시간 뒤, 민연초가 깨어났다.
  • 몽롱한 머리를 흔들며, 매달린 약물과 옆에 있던 간호사를 보며 물었다.
  • “수술은 끝났나요?”
  • “수술을 끝났습니다. 다만, 일주일 동안 소염제를 맞으셔야 하고, 한 달 후에 와서 다시 검사하셔야 합니다.”
  • 간호사는 진지하게 민연초에게 말했다.
  • “이미 유산하셨습니다. 3일 동안 침대에 누워 쉬시고, 보름 동안 힘든 일은 하시면 안 되고, 술 담배는 당연히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유증이 남아서 평생 임신할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 간호사가 말한 소염제는 제시간에 태아를 보호하는 약을 맞으러 오라는 핑계일 뿐이었다.
  • “그렇게 심각한가요? 알곘어요, 조심할게요.”
  • 민연초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아직 어린데 벌써 불임이면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시집을 못 갈 것 같았다.
  • 안정을 찾은 뒤 배에 손을 올리자 억울함이 밀려왔다.
  • 첫아이인데, 이렇게 갔다.
  • 약물을 걸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움직이려는데 이상하게 몸이 평소처럼 가벼웠다.
  • “간호사님, 수술을 했는데 왜 아무런 감각이 없죠?”
  • 간호사는 두 눈을 살짝 빛내며 빙긋 웃었다.
  • “작은 수술이라, 통증이 없지만 쉬는데 신경 쓰셔야 해요.”
  • 말을 하며 약을 한 무더기 건넸다.
  • “이건 복용하셔야 할 약들입니다. 복용 방법은 표기되어 있어요.”
  • “네, 감사합니다.”
  • 집으로 돌아온 민연초는 테라에 3일 휴가를 냈고, 상대방도 흔쾌히 승낙했다.
  • 그녀는 고마웠다.
  • “매니저님 참 좋아. 휴가 내는 게 이렇게 쉽다니.”
  • 지난번 정 씨 저택에 3일 지낼 때도 쉽게 허락을 해주고, 이번에 3일 휴가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허락을 해주었다.
  • 집에서 3일을 쉬면서 매일 제때 병원에 계시는 엄마한테 밥을 가져다주고, 엄마와 함께 산책도 하고 햇볕도 쬐며, 의식이 없는 아빠를 마사지해 줄 생각이었다.
  • 그 외엔 병원에 가서 소염제를 맞고 나머지 시간엔 집에 누워 쉬려고 했다. 배달도 가지 못했다.
  • 집에서 휴대폰을 하던 그녀는 실시간 뉴스를 확인하게 되었고, “수배 중이던 범인, 연성 바닷가에서 시체로 발견”이라는 기사를 봤다.
  • 제목에 이끌려 호기심에 클릭을 했다.
  • 사진은 모자이크 처리돼 있지만 수배자의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 “이 사람…… 낯이 익은데.”
  • 중얼거리던 민연초가 눈을 크게 뜨며 며칠 전 사설탐정이 그녀에게 보낸 사진을 뒤졌다.
  • 비교를 하던 그녀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 “그 사람이다!”
  • 뉴스에서 밝혀진 사망자는 바로, 그녀의 양부모를 치어 다치게 한 사고 차량의 주인이며, 사설탐정으로부터 구조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