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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납치

  • “연초 넌 이틀 동안 저택에 머물면서 이 노인네와 함께 있자꾸나.”
  • 정 씨 노부인이 민연초에게 말했다.
  • 민연초는 자신이 정민한을 건드렸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양부모 때문에 이 씨 가문 사람들에게 굽실거리기도 싫었기 때문에 지금으로선 정 씨 노부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 어찌 됐든 정 씨 노부인은 그녀에게 아무런 적대심이 없어 보였다.
  • “내가 왜 할머니랑 함께 있어야 하죠?”
  • “민한이 그놈이 널 ‘침범’했으니 너한테 책임을 져야지. 저택에 며칠 동안 머물면서 나도 너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 보려고.”
  • 정 씨 노부인은 민연초가 걱정하는 문제를 떠올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 “네 부모님은 해외 최고의 전문가가 와서 치료를 하고 있으니 금방 나아지실 거야.”
  • 민연초는 고마운 마음을 보답할 길이 없었다.
  • 그녀는 자신이 정민한을 구하고 정 씨 노부인이 그녀의 양부모님을 구했으니 서로 빚진 것이 없다고 끊임없이 자신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 “감사해요, 할머니.”
  • 민연초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 그렇게 3일 동안, 민연초는 아침에는 정 씨 노부인을 모시고 태극권 연습을 했고 오전에는 정원에서 꽃과 풀을 다듬었으며 오후에는 함께 디저트를 만들 거나 바둑을 두었다.
  • 알차게 보낸 시간은 언제나 빨리 지나간다.
  • 넷째 날 아침, 민연초는 노부인과 함께 식사를 마친 후에야 짐을 싸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있는 정 씨 노부인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건넸다.
  • “할머니, 전 이만 가볼게요. 환대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 정 씨 노부인은 일어나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고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 “네가 성격이 밝아서 너랑 같이 지내는 동안 이 노인네가 훨씬 젊어진 것 같구나.”
  • 민연초의 앞에서 정 씨 노부인은 가문의 주인으로서의 위엄은 털끝만큼도 없었고 오히려 외할머니 같은 친근감이 느껴졌다.
  • “할머니는 영원히 젊게 사셔야 해요. 그럼 전 이만, 안녕히 계세요.”
  • “그래, 시간 날 때 이 노인네 만나러 오렴.”
  • “아…하하하…네, 할머니.”
  • 민연초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 저택에 다시 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녀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저택에서 나온 뒤, 정 씨 노부인은 기사님을 시켜 민연초를 연성 시내까지 데려다주라고 했다.
  • 가던 도중 약국을 발견한 민연초는 기사님을 향해 말했다.
  • “세워주세요. 저는 여기서 내릴게요.”
  • 차가 멈춰 서자 그녀는 차에서 내려 기사님에게 말했다.
  • “아저씨, 저 대신 할머니께 감사 인사 전해주세요.”
  • “네, 민연초 아가씨.”
  • 기사님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고는 차를 돌려 떠나갔다.
  • 민연초는 크로스백을 메고 종종걸음으로 약국에 들어갔고 약사가 그녀를 맞아주었다.
  • “안녕하세요, 무슨 약 찾으세요?”
  • “가장 효과 좋은 피임약 한 통 주세요.”
  • 민연초는 허둥지둥 약사에게 말했다.
  • 며칠 동안 계속 정 씨 가문 저택에 머물러 있느라 그녀는 밖으로 나올 기회가 없었고 당연히 약을 살 수도 없었다.
  • 지금 집에서 나왔으니 제일 먼저 약부터 사 먹어야지, 진짜 임신이라도 해버린다면 모든 게 끝장이다.
  • 약사는 약 한 통을 그녀에게 건넸다.
  • “사후 72시간 안에 가장 효과적인 약이에요.”
  • 약을 받고 몸을 돌려 계산대로 가려던 그때, 민연초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 “뭐라고요, 72시간?”
  • “네, 빠를수록 좋아요. 3일 지나서 먹으면 소용없어요.”
  • “3일이요?”
  • “네.”
  • 민연초는 머리를 망치로 세게 두드려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 곧 그녀는 머리를 숙여 약에 적힌 설명서를 확인했고 설명서에는 역시나 72시간 긴급 피임약이고 시간을 넘기면 효과가 없다고 적혀있었다.
  • 그녀는 지금껏 피임약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고 피임약은 일주일 안에 모두 사용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생각했다.
  • 정 씨 노부인이 그녀를 굳이 3일 동안 저택에 머물게 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 민연초는 약을 약사에게 돌려주고는 눈시울을 붉히며 약국을 나섰다.
  • 그녀는 혼자 거리를 거닐며 한참을 진정한 후에야 스스로를 위로했다.
  • ‘두려워할 것 없어, 아이가 생기면 떼버리면 그만이야!’
  • ‘무슨 일이든 대처할 방법은 있을 테니 무서울 것 없어!’
  • 끼이익…
  • 바로 이때, 길가에 승용차 한 대가 갑자기 급정거하여 민연초 앞에 멈추었다.
  • 민연초가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차 안에 타 있었다.
  • “이봐요, 당…당신…당신들 누구야? 대낮에 대놓고 사람을 납치하는 건 불법이야!”
  • 그녀는 몇 번 몸부림을 치더니 경고했다.
  • “차 세워, 당장 차 세우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
  • “민연초 씨, 겁 없이 나대지 말고 조용히 있어요.”
  • 문득 운전석에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 민연초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목을 길게 내빼고 운전석에 앉은 사람을 쳐다봤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송진이었다.
  • 그럼 정민한이 그녀를 납치하라고 시켰단 말인가?
  • 역시나 허세는 부리는 게 아니었다.
  • 그녀가 정 씨 가문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정민한은 바로 그녀를 납치했다. 이건 너무 빠른 것 아닌가.
  • “송진 씨, 빨리 차 세워요. 그렇지 않으면 할머니한테 연락드릴 겁니다.”
  • “민연초 씨는 상황 파악을 좀 하시는 게 좋을 듯싶네요.”
  • “…”
  • 죽으러 가는 상황 파악 말인가?
  • 부모님이 아직 정 씨 가문의 병원에 계신다는 생각에 민연초도 더 이상 쓸데없는 몸부림을 치지 않았다.
  • 10여 분 뒤, 그녀는 사람들에게 이끌려 테라 38층, 정민한의 개인 룸에 도착했다.
  • “보스, 민연초 씨 모셔왔습니다.”
  • 송진은 민연초를 정민한 앞에 데려갔다.
  • “그럼 전 나가있겠습니다.”
  • 그는 돌아서서 룸을 나갔다.
  • 민연초는 가방끈을 꼭 쥐고 다리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업무를 보고 있는 정민한을 쳐다봤다. 그는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집중하고 있었고 길고 가는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냉혹한 그에게서는 타고난 리더의 기운이 느껴졌고 하늘 위에서 사람을 판결하는 신처럼 보였다.
  • 특히 아름답게 빠진 얼굴 윤곽과 입체적인 이목구비는 마치 하나님이 만든 완벽한 예술 작품처럼 흠잡을 데가 없이 훌륭했다.
  • 잘생긴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민연초조차도 자기도 모르게 힐끔힐끔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 “마음껏 봤어?”
  • 정민한은 갑자기 노트북을 닫아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불쑥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 “누, 누가 봤다고 그래요.”
  • 민연초는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 “김칫국 마시기는.”
  • 검은 셔츠를 입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정민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날카로운 시선으로 민연초를 쳐다봤다.
  • “할머니가 당신 편에 서주니까 내 앞에서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해?”
  • 엄습해오는 강한 위압감에 민연초는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 “아…아니, 절대 아니에요.”
  • “벌써 겁먹으면 어떡해. 그날 저택에서 네 입으로 직접 내 아이를 임신하고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잖아?”
  • 이 빌어먹을 여자가 분수를 모르고 감히 그를 도발했다.
  • “하하하…”
  • 민연초의 얼굴은 조금 창백해졌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 “정 도련님, 노여워 마세요. 그날은 제가 농담한 거예요, 하하하, 농담이에요.”
  • 그녀는 계속 뒤로 물러섰지만 결국 정민한에게 멱살을 잡혔다.
  •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협박 받는 거야. 축하해, 네가 그걸 해냈어.”
  • 말은 축하한다고 했지만 민연초는 차가운 정민한의 얼굴을 보았고 마치 시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그녀는 하마터면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 “정 도련님, 그건 다 제 장난이었어요.”
  • ‘세상에, 너무 무섭잖아.’
  • “장난인지 아닌지는 네 입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야.”
  • “그…그그…그럼 어떻게 증명하죠?”
  • 겁에 질려 간담이 서늘해진 민연초는 말까지 더듬었다.
  • 정민한은 먹물로 칠한 것 같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입을 열었다.
  • “정말 그날 저택에서 했던 말이 모두 농담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