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5화 정민한의 아이를 낳아주다

  • 정 씨 가문 저택, 거실.
  • “할머니, 시간이 늦어서 저는 이만 부모님께 식사를 전해주러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 억지로 정 씨 가문 저택에 끌려온 민연초는 빠져나갈 이유를 찾아 둘러댔다.
  • 정 씨 노부인은 자상하고 상냥하게 말했다.
  • “네 부모님은 내가 이미 사람을 보내 우리 정 씨 가문 사립 병원으로 모셔왔어. 전문 간병인이 돌보고 있으니까 걱정 말렴.”
  • 그 말을 들은 민연초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부인에게 따져 물었다.
  • “제 동의도 없이 부모님을 다른 곳으로 모셔가다니요, 저를 협박하시려는 거예요?”
  •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 정 씨 노부인은 화를 내지 않고 도리어 웃으며 말했다.
  • “어찌 보면 이것도 너랑 내 손자 녀석의 인연이란다. 너도 알다시피 민한이 그 녀석도 이젠 나이가 적지 않은데 곁에 여자가 없어. 그래서 내가 수를 써서 민한이한테 약을 탔지. 원래는 서 씨 가문 아가씨와 민한이를 맺어줄 생각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일이 틀어져서 너로 바뀔 줄 누가 알았겠어. 그나마 너도 괜찮은 애라서 다행이야.”
  • 정 씨 노부인의 말을 들은 민연초는 그제야 정민한이 왜 약에 중독됐는지 깨달았다.
  • 그 개자식과 전생에 무슨 악연을 맺었길래 이렇게 꼬인단 말인가!
  • “전…”
  • 민연초가 무슨 말을 하려던 그때, 백발의 늙은 집사가 걸어 들어왔다.
  • “여사님, 도련님 오셨습니다.”
  • “그놈 당장 내 앞에 튀어오라고 해.”
  • “네, 여사님.”
  • 집사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 곧, 회색 슈트를 입은 정민한이 걸어 들어왔다.
  • 그의 시선은 곧장 민연초를 향했다가 다시 노부인을 보며 말했다.
  • “할머니.”
  • “이제야 기여 들어와?”
  • 정 씨 노부인은 퉁명스럽게 한 마디 내뱉은 뒤, 민연초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 “마침 내가 너한테 소개해 줄 사람이…”
  • 노부인의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정민한이 말허리를 잘랐다.
  • “할머니, 그전에 제가 소개해 드릴 사람이 있어요. 제 여자친구예요.”
  • “여자친구?”
  • 정 씨 노부인은 멈칫했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 놀란 건 민연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억울한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 정 씨 노부인이 손자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잘 알았더라면 그녀가 결백을 잃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 “들어와.”
  • 정민한이 문밖을 향해 한 마디 했다.
  • 사람들의 시선은 밖으로 집중됐고 곧 허리 라인이 돋보이는 하늘색 플리츠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하이힐을 신고 고개를 숙인 채 안으로 들어왔다.
  • 그런데 그 모습이 왜 이렇게 익숙한 걸까?
  • “제 여자친구 이윤아예요.”
  • 정민한이 정 씨 노부인에게 이윤아를 소개했다.
  • ‘이윤아’라는 이름에 민연초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멍해졌다.
  • 민연초가 이윤아를 쳐다보고 있던 그때, 이윤아도 고개를 들어 민연초를 보았다.
  • 두 자매의 눈빛은 공중에서 부딪혔고 눈동자 속의 의아함은 감출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똑같은 의문이 생겨났다.
  • ‘네가 왜 여기에 있어?’
  • “이 분은 연성에서 뛰어난 미모와 재능을 자랑하는 이 씨 가문의 이윤아 아가씨잖아, 또 무슨 수로 설득을 했길래 이 아가씨가 네 여자친구 행세를 하기로 한 거야?”
  • 역시 구관이 명관이다.
  • 정 씨 노부인은 한 마디로 급소를 찔렀다.
  • “안녕하세요, 할머니.”
  • 이윤아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 “일주일 전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윤아가 날 구해줬어요. 윤아가 나를 차에서 구해냈을 때, 난 정 씨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온 이 반지를 윤아한테 줬어요. 할머니도 이 반지가 뭘 의미하는지 잘 아시잖아요.”
  • 정민한은 그렇게 말하면서 왼손을 들어 손가락에 낀 반지를 가리켰다.
  • 그 블랙 다이아몬드 반지를 본 민연초는 순간 머릿속에 퍼즐이 맞춰졌다. 어쩐지 그날 정민한을 구한 뒤 주머니에 반지가 하나 들어있더라니, 알고 보니 정민한이 구조될 때 그녀의 주머니에 넣은 것이었다.
  • 그러나 다음날 이윤아가 나타난 뒤로 반지는 사라졌다.
  • 민연초도 반지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었는데, 지금 보아하니 이윤아가 반지의 주인이 정민한이라는 것을 진작에 알고 훔쳐 간 것이었다!
  • 민연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 반지는…”
  • “연초야, 네가 왜 여기 있어? 널 여기서 만날 줄은 정말 몰랐어.”
  • 이윤아는 놀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정민한의 손목을 덥석 잡고는 재빠르게 민연초의 말을 끊어버렸다.
  • “연초야, 이 사람이 바로 내가 너한테 얘기했던 내가 ‘죽음을 무릅쓰고’ 구한 사람이야.”
  • 그러고는 이내 정민한을 향해 소개했다.
  • “민한 오빠, 이 친구 이름은 민연초이고 내가 배달 체험 때 만난 친구예요.”
  • 이윤아의 뻔뻔스러운 헛소리에 민연초는 구역질이 났다.
  • 심지어 어느 한순간은 역겹도록 위선적인 이윤아의 ‘추한 가면’을 벗겨버리고 싶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일단 참기로 했다.
  • 정민한을 구해준 사람이 민연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그 반지, 그리고 병원에 남겨진 이름과 CCTV 영상뿐이다.
  • 하지만 이윤아가 몰래 반지를 훔치고 정민한을 속일 수 있었던 것은 분명 CCTV 영상을 조사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 CCTV 영상도 이미 이 씨 가문에서 폐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 지금 이윤아의 가면을 벗기려고 무모하게 나섰다가는 자신이 정민한을 구했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어 오히려 당할지도 모른다.
  • 그럴 바엔 차라리 가만히 지켜보는 게 나을 듯싶었다.
  • “그래?”
  • 정민한은 길쭉하게 뻗은 날카로운 눈으로 민연초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연초야, 널 여기서 다 만나고, 이런 우연이 또 어디 있겠어. 너도 민한 오빠를 알아?”
  • 이윤아의 머릿속에 정 씨 노부인이 혼사를 주선했다던 정민한의 말이 떠올랐다.
  • ‘설마 그 상대가 민연초?’
  • ‘그런데 민연초가 어떻게 정 씨 가문 사람을 아는 거지?’
  • 이윤아는 마음이 불안불안했다.
  • 연기에 맛 들인 이윤아를 상대하기 귀찮은 민연초는 바로 정 씨 노부인을 향해 말했다.
  • “할머니, 정 도련님한테는 이미 여자친구가 있으니 제가 여기 더 있을 이유는 없는 것 같네요. 전 이만 가볼게요.”
  • 민연초는 다음 계획을 세우기 위해 정 씨 노부인의 태도를 살폈다.
  • 실력이 강하고 인정사정없는 정민한과 시시때때로 그녀의 양부모를 빌미로 협박을 해오는 이 씨 가문, 민연초는 반드시 신중해야 했다.
  • 민연초가 가려고 하자 정 씨 노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 “흥분하지 말고 먼저 여기 와서 앉아봐.”
  • 노부인은 민연초를 끌고 와 의자에 앉힌 후 정민한을 향해 매섭게 말했다.
  • “너 이 자식, 당장 따라와!”
  • “네, 할머니.”
  • 정민한은 민연초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고는 정 씨 노부인을 따라 안방으로 향했다.
  •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안방 문이 닫혔다.
  • 이윤아는 더 이상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민연초, 이 천한 년…”
  • 찰싹, 찰싹…
  • 이윤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연초는 손을 들어 올려 이윤아의 뺨을 두 대 세게 내리쳤다.
  • “넌 매일 천박한 일만 골라서 하는 것 빼고는 할 줄 아는 게 뭐야? 아, 맞다, 남이 한 일에 숟가락 얹고 순진한 척할 줄도 알지. 내 말 맞지,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