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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는 당신에게

나를 구원하는 당신에게

필애

Last update: 2023-07-14

제1화 뜻밖에 갑부를 구하다

  • 병원.
  • 엄청 마른 몸매의 민연초가 온몸이 피범벅이 된 남자를 힘겹게 업고 응급 외래 접수창구로 달려왔다.
  • “응급이요. 이 사람이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었어요!”
  • 민연초는 다급하게 말했다.
  • 민연초는 오늘 정말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 그녀가 축전지차로 배달을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페라리가 신호위반 트럭에 치였던 것이다.
  • 페라리는 심하게 변형됐고 유리창이 산산조각 났으며 트렁크에 불까지 붙어 언제든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 운전자는 피투성이가 된 채 차 안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 민연초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고민 없이 바로 달려들어 그 남자를 필사적으로 끌어냈다.
  • 몇 미터 밖으로 끌고 나가자 ‘펑’하는 굉음과 함께 차가 그대로 폭발했다.
  • 민연초는 소름이 끼쳤다. 그녀가 조금 더 늦었더라면 함께 폭사당했을 것이다!
  • 중상을 입은 남자는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그녀의 손목을 힘껏 움켜쥐고 혼미한 정신으로 이렇게 말했다.
  • “살려줘! 병원에 데려다줘… 200억 줄게…”
  • 200억이라니!
  • 설마 세계 최고의 갑부를 구한 건 아니겠지?
  • 수납 창구의 직원이 물었다.
  • “이름이 뭐예요?”[
  • 민연초가 대답하려던 그때.
  •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본 직원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
  • “아, 저희 원장님 따님이신 이윤아 씨 아니세요? 아가씨,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바로 의사 선생님을 배정해 드릴게요…”
  • 민연초는 쓴웃음을 지었다.
  • 이윤아는 그녀의 친언니였다. 두 사람은 똑같이 생겼지만 운명은 사뭇 달랐다.
  •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유괴되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지금의 양부모에게 팔렸다.
  • 하지만 한 달 전 양부모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입원을 하게 됐다. 그래서 큰 액수의 치료비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 그때 갑자기 친부모가 나타나 양부모의 병을 치료해 줄 수 있는데 우선 백혈병에 걸린 이 씨 가문의 막내아들에게 골수이식을 해줘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내걸었다. 그리고 이윤아와 똑같이 생긴 얼굴을 드러내지 말라고 했다.
  • 친어머니인 조유란은 이렇게 말했다.
  • “우리 윤아는 거문고, 바둑, 서예, 그림, 작문, 가무에 능통한 연성 제일의 미인이야. 근데 넌 그냥 시골 계집애니까 나설 처지가 못 돼. 절대 너의 존재 때문에 우리 윤아의 좋은 명성에 흠집을 낼 수는 없지.”
  • 양부모의 치료를 위해 민연초는 모욕을 참으며 승낙했다.
  • 그녀는 연성에서 평소에 일부러 못생겨 보이는 화장을 했다. 오늘에는 늦은 밤에 배달을 하는 거라 화장을 하기가 귀찮아 스킵 한 것이다. 그들이 알아볼 줄 몰랐고 깜빡하고 친아버지의 병원에 들어온 것이라 본인이 ‘이윤아’라고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으로 수술비 100만 원을 넣었다.
  • 모든 일을 해결한 민연초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월세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했다. 더러워진 옷을 세탁하던 그때, 주머니에서 블랙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를 발견했다.
  • 아까 그 남자가 자신의 옷을 잡아당길 때 주머니에 떨어뜨린 거겠지?
  • 그녀는 별생각 없이 탁자 위에 반지를 올려두고 잠시 눈을 붙이려 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 그녀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걸어가 문을 열었다.
  • “민연초, 너 너무 천박한 거 아니야? 내가 너한테 했던 말 다 잊었어?”
  • 늘씬한 몸매의 이윤아가 바로 민연초의 뺨을 내리쳤다.
  • “연성에 왔을 때 내가 경고했지. ‘내 얼굴’ 쳐들고 돌아다니지 말라고. 네 양부모의 목숨은 필요 없어진 거야?”
  • 민연초는 화가 치밀어올라 똑같이 이윤아의 뺨을 때렸다.
  • 양부모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친부모에게 괴롭힘을 당했지만 그녀는 결코 남에게 유린당하고 강한 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 이윤아는 새된 소리를 질렀다.
  • “민연초, 네가 감히 날 때려?”
  • 민연초는 이윤아보다 훨씬 힘이 셌다. 뺨 한 대로 이윤아의 얼굴이 약간 부어올랐다.
  • 민연초는 손을 털더니 에쁜 눈썹을 찌푸렸다.
  • “맞았으면 참아! 내가 네 엄마도 아닌데 건방진 그 성격을 참아줄 거라고 생각했어?”
  • “네가 밤늦게 외간 남자를 데리고 우리 아빠 병원에 갔잖아. 그거 소문나면 난 어떻게 밖에 나가라고? 오히려 당당하네!”
  • 이윤아는 얼굴을 붉히며 그녀를 질책했다.
  • “오늘 아침에 우리 아빠한테 보고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난 아직도 아무것도 몰랐겠지! 네가 내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더러운 짓을 하고 다니는지!”
  • “네 얼굴… 하.”
  • 민연초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눈빛에 슬픔이 가득했다.
  • 이 불공평한 운명. 같은 얼굴로 태어난 건데 자신은 진짜 얼굴을 보여줄 자격도 없었다.
  • 그때, 이윤아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 한쪽에 서서 전화를 받던 그녀는 눈을 살짝 돌렸다가 마침 탁자 위에 놓인 블랙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았다.
  • 그 다이아 반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 “엄마, 무슨 일이야?”
  • 그녀가 물었다.
  • “세상에. 우리 딸, 언제 정도련님을 구한 거야? 그렇게 큰일을 왜 엄마한테 얘기하지 않았어? 방금 정씨 가문 쪽에서 사람을 보냈는데 일주일 뒤에 너랑 만나재.”
  • 수화기 너머의 조유란은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기뻐했다.
  • “정도련님?”
  • 탁자 위의 반지를 보던 이윤아는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전에 명문가 규수들의 사교모임에 갔을 때 그들이 보낸 정도련님의 사진에서 그가 이 반지를 하고 있었다.
  • 정씨 가문의 상속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다이아몬드 반지라고 했다.
  • 어젯밤에 민연초가 병원에 나타났던 일까지 떠올린 이윤아는 순간 깨달았다. 알고 보니 민연초가 어제 정민한을 구한 거였구나!
  • 그리고 민연초가 병원에 그녀의 이름을 말한 탓에 정민한이 자신이 그를 구했다고 생각하는 거였다.
  • 그녀는 뜻밖에 정도련님의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
  • 이건 로또에 당첨된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 “엄마, 나 지금 일이 좀 있어서 나중에 얘기하자.”
  • 이윤아는 기쁨으로 날뛰는 마음을 억누르고 민연초가 한눈을 파는 틈에 슬그머니 탁자 위에서 그 반지를 가져갔다. 그녀는 민연초의 앞에 다가오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 “다음에 또 그러면 네 양부모의 시신을 거두게 될 거야.”
  • 그녀는 화를 내며 나갔다.
  • 민연초는 새벽에 들어와 잠시 눈을 붙일 생각이었는데 늦잠을 자버렸다.
  • 그녀는 더 이상 이윤아와 따지고 싶지 않았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그 남자를 찾았다.
  • 보상금 200억.
  • 그녀가 목숨을 걸고 얻은 것이었다.
  • 그런데 맙소사. 그녀가 병원에 도착해 간호사에게 묻자 밤에 깨어난 그가 바로 나갔다고 했다.
  • 심지어 아무런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 “사기꾼, 개자식!”
  • 민연초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발을 굴렀다.
  • “그 100만 원은 두 달 생활비인데!”
  • 역시, 남자의 말은 믿을 것이 아니었다.
  • 괜히 생활비 100만 원을 날렸고 배달을 잃어버려 플랫폼 측에서 배달비를 2만 원 넘게 삭감했다.
  • 아르바이트로 배달을 뛴 것인데 휴가를 받은 이틀 동안 번 배달비를 전부 플랫폼에 배상한 꼴이 되었다.
  • 민연초는 마음이 아팠다.
  • 사회는 무서운 곳이고 그녀는 아직 너무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매일 더 열심히 출근을 했고 퇴근을 하면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병원에 있는 양부모에게 식사를 배달했다.
  • 테라.
  • 경비원 차림을 한 민연초는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며 보안팀의 동료와 CCTV 앞에 앉아 하소연했다.
  • “그 배은망덕한 놈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왜 이번 주에 매일 두 끼밖에 못 먹겠어? 배고파서 살이 엄청 빠졌다니까.”
  • 교통사고를 당한 양아버지는 지금까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양어머니는 매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 친부모가 치료비를 내주고 있지만 민연초는 여전히 적지 않은 일상적인 지출을 감당해야 했다.
  • 그녀는 마지막 남은 100만 원을 그 개자식의 수술비로 써버려서 돈이 바닥났다.
  • 동료 진탁이 물었다.
  • “연초 누나, 누나한테 그 사람 말은 많이 들었는데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거예요?”
  • “얼굴은 기억나. 그때 의식을 잃었는데 내가 어떻게 그 사람 이름을…”
  • 민연초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CCTV 화면 속의 누군가를 가리켰다.
  • “저저저… 보이지… 쟤야. 저 사람이라고!”
  •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 “개자식, 드디어 내가 널 찾았구나.”
  • “연초 누나, 잠깐만요.”
  • 진탁은 민연초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CCTV 화면 속 그 사람을 가리켰다.
  • “이 사람 확실해요?”
  • “그 개 같은 남자는 재가 되어도 알아볼 수 있어.”
  • 민연초가 나가려는데 진탁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 “연초 누나, 진정해요. 저 사람 이름은 정민한인데 연성의 4대 가문 중 하나인 정씨 가문의 상속자예요. 저 사람은 차갑고 악랄해요. 손에 피까지 묻혀본 사람이라고요. 누나한테 은혜를 갚으려고 했다면 말 한마디면 해결됐을 거예요. 그런데 누나를 안 찾은 걸 보면 돈을 줄 생각이 없었던 거겠죠. 연초 누나, 목숨이 더 중요해요. 100만 원일 뿐이잖아요. 우리 그냥 개한테 줬다고 생각해요.”
  • “정민한?”
  • 민연초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 그녀가 일하는 클럽은 연성에서 제일가는 재벌들의 유흥 장소였다. 사업가와 유명 인사들만 오는 곳이어서 그녀도 정민한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 진탁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달갑지 않았다.
  • 그래서 민연초는 새벽 한 시까지 기다렸다. 정민한이 룸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그녀도 따라 들어갔다.
  • 테라 클럽의 1층부터 8층까지는 술집이었고 위에는 호텔 스위트룸이 자리해 있었다.
  • 엘리베이터. 민연초는 곁눈질로 자신보다 얼굴 하나 더 큰 정민한을 쳐다보았다. 그의 몸에서 술기운이 느껴졌는데 준수한 얼굴에 비정상적인 홍조가 어려 있었다. 그는 이따금 기다란 손가락으로 목에 있는 넥타이를 잡아당겼는데 술에 취해서 더운 것 같았다.
  • 띵-
  • 38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 남자가 밖으로 나갔고 그녀도 그 뒤를 따랐다.
  •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정민한이 갑자기 멈춰 섰고 민연초도 조심하지 않아 그의 등에 부딪혔다.
  • “아야… 당신…”
  • 남자는 이내 커다란 손바닥으로 그녀의 목을 조르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 “말해, 너 누구야?”
  • “아파요…”
  • 민연초는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뇌로 가는 산소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정민한의 손을 쳤다.
  • “놓아줘요, 나… 나 숨이 안 쉬어져…”
  • 그 말을 들은 정민한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그녀가 쓰고 있던 경비원 모자를 날려버렸다.
  • “여자였어?”
  • 민연초는 클럽에서 일하기 때문에 추행을 당하는 걸 피하려고 남자 목소리로 위장했고 얼굴에도 분장을 했다.
  • 매니저와 보안팀을 제외하고는 그녀가 여자인 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 “네, 네.”
  • “말해. 누가 보냈어?”
  • “저… 저는 그저…”
  • 민연초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정민한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 “내 여자가 되고 싶은 거야?”
  • 그는 일찌감치 눈앞의 경비원이 수상쩍다는 걸 발견했다. 오늘 술에도 양념이 되어 있었겠지.
  • 역시나, 또 그에게 약을 먹이고 그의 침대에 올라가려는 여자였다.
  • 민연초는 목이 졸려서 죽을 것 같았다.
  • 개자식,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분수가 있지!
  • 그녀는 화가 나서 욕을 했다.
  • “무슨 그런…”
  • ‘개소리’라는 말을 뱉기도 전에 남자가 손을 풀었다.
  • 민연초는 몸이 나른해져서 주저앉더니 손으로 바닥을 짚고 숨을 몰아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 그 순간, 그녀는 38층이 통으로 개인 주택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 실버 그레이 컬러의 쿨톤 인테리어가 럭셔리하고 고급스러웠다.
  • 보아하니 정민한은 진작에 그녀가 수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 “나 정민한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 남자는 눈에 핏발을 세운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 “콜록콜록콜록…”
  • 민연초는 졸렸던 목이 따끔거려서 기침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죽으러 온 거 같으니까 네 소원을 들어줄게.”
  • 말을 마친 정민한은 그녀의 팔을 병아리 잡듯 잡고 안방으로 데려가더니 침대에 내던졌다.
  • “저기, 당신… 뭐 하려는 거예요?”
  • 민연초는 깜짝 놀랐다. 정민한이 앞에 있으니 솔직히 두려웠다.
  • 남자는 한 손으로 넥타이를 잡아당기고 한 손으로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침실의 커튼이 닫혔고 순식간에 깜깜해졌다.
  • 어둠 속에서 ‘찌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연초의 옷이 정민한에 의해 찢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