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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반지는요?

  • 그의 기다란 약지 손가락에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 그녀가 샀던 그 반지였다.
  • 오윤희는 자리에 앉는 것도 잊은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남욱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봤다.
  • “왜 그래요?”
  • 담담히 입을 연 남욱은 텅 빈 그녀의 손을 확인하더니 눈썹을 치켜올렸다.
  • “반지는요?”
  • 순간 오윤희는 이 상황이 어색해서 미칠 것 같았다. 어제는 자신이 산 반지가 남욱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자신도 반지를 착용하지 않았는데, 남욱이 숨겨둔 반지를 찾아내서 손에 낀 것이다.
  • 오윤희는 어쩔 수 없이 핸드백에서 반지를 꺼내 손에 끼우면서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 “죄송해요. 디자인은 대충 고른 거라서….”
  • 남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괜찮아요. 예쁘네요.”
  •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던 그녀는 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식사에만 열중했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남욱은 신문을 내려놓더니 담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 “회사까지 태워다 줄게요.”
  • “괜찮아요.”
  • 오윤희가 다급히 거절했다.
  • “택시나 지하철 타고 가면 돼요.”
  • ‘안 될 소리!’
  • 혹시라도 잡지사의 동료들이 남욱을 알아보면 여자 직원의 그 따가운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 “여기 지하철역이랑 거리가 멀어요.”
  • 남욱이 눈썹을 찌푸렸다.
  • “그리고 택시도 다니지 않아요.”
  • 그건 사실이었다. 오윤희도 어제 이사 올 때 이미 느낀 바가 있었다. 이런 부자 동네는 집집이 차가 있어서 택시나 지하철역이 있을 리 만무했다.
  • 시계를 확인하니 출근 시간이 다 돼가고 있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 “그럼 근처 지하철역까지만 데려다주실래요?”
  • 남욱이 그런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고 그녀는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남욱을 따라 문밖에 나와보니 이미 검은색 벤틀리가 세워져 있었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젊은 남성이 다가와서 자기소개를 했다. 여준이라고 부르는 남자는 남욱의 수행 비서였다.
  • 여준이 차 문을 열었다. 오윤희가 남욱이 어떻게 차에 오를까 걱정하던 찰나, 차에서 철판이 자동으로 내려왔다. 남욱은 휠체어를 운전해 순조롭게 차에 탔다. 차에 올라타니 자동차 내부도 남욱에게 맞게 개조한 상태였다. 한쪽에 남욱의 휠체어 전용 자리가 있었다.
  • 오윤희가 올라타자 차는 빠르게 달려 인근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 차가 지하철역 앞에 멈추자 밖의 혼잡한 소리가 차창을 통해 들려왔다. 남욱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 “이렇게 출근하는 거 너무 불편하겠어요. 제가 회사까지 바래다주는 게 불편하면, 따로 차 한 대 준비해 드릴게요.”
  • 오윤희는 잠시 멈칫했다가 다급히 대답했다.
  • “정말 괜찮아요.”
  • 그녀는 차 한 대가 남욱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꾸 남욱의 돈을 받아 쓰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 오윤희의 완곡한 거절에 남욱의 눈동자가 어둡게 빛났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제가 평소 별장에 자주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혼자서 어떻게 출근하려고 그래요?”
  • 이 문제에 대해서 오윤희도 미리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그녀는 곧장 핸드폰을 꺼내 흔들며 대답했다.
  • “콜택시를 부르면 편해요.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서 콜택시 불러서 타고 가면 돼요. 저… 좀 있으면 지각이라서요, 먼저 갈게요. 조심히 가요.”
  • 말을 마친 오윤희가 차에서 내렸다. 남욱은 급하게 달려가는 가녀린 뒷모습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운전석에 있던 여준도 이 장면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 “그게… 도련님, 작은 사모님께서는 전에 조사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신 것 같네요?”
  • 남욱은 창밖의 오윤희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 “많이 다르긴 하네.”
  • 오윤희가 차를 선물하겠다는 그의 제안을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거절할 줄 예상치 못했던 남욱이었다. 여준을 통해 오윤희의 과거를 조사해 본 결과, 그녀는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된장녀였다. 그랬기에 남욱도 그녀를 선택했던 것이다.
  • 약간의 돈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여자가 그의 전 재산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재벌 2세들보다 훨씬 마음이 놓이고 통제하기 쉬울 테니까.
  • 물론 그녀를 선택한 데는 그녀에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돈에 이 정도로 관심이 없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 ‘생각보다 영악한 여자라, 나랑 밀당을 하는 건가?’
  • 남욱의 짙은 눈동자가 어둡게 빛나더니, 드디어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 “출발해.”
  • ….
  • S시티 금융 구역, 성욱 그룹 빌딩 맨 위층.
  • 남욱은 책상 앞에서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손놀림에 따라 스크린의 도표와 숫자들이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 따르릉.
  • 갑자기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가 울렸다. 남욱이 버튼을 누르자 여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도련님, 임정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
  • “들여보내.”
  • 잠시 후, 사무실 문이 열리고 분홍색 셔츠를 입은 매력적인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 “남욱아, 아직도 일하고 있어?”
  • 남욱을 본 남자가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 “결혼하고 나면 좀 달라질 줄 알았는데. 아니 결혼식은 생략하더라도 최소한 신혼여행은 다녀와야지.”
  • 남욱은 시선을 여전히 컴퓨터에 고정한 채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 “그럴 시간이 없어서.”
  • 남욱의 책상 위에 걸터앉은 남자는 상대의 차가운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 “너 같이 재미없는 남자랑 결혼한 제수씨가 참 불쌍해.”
  • 남욱은 그제야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무표정으로 물었다.
  • “임정,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임정이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밝게 미소 지었다.
  • “그냥 심심해서, 제수씨 좀 만나게 해줘.”
  • “됐어.”
  • 남욱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 “내가 왜 그 여자와 결혼했는지 너도 잘 알잖아.”
  • “당연히 알지.”
  • 입을 삐죽이던 임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 “하지만 어쨌든 이제 가정도 이루었잖아. 그해 있었던 일은 이제 그만 잊어.”
  • 순간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던 남욱이 잠시 멈칫하더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잊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 한참의 정적이 흐르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사람은 죽으면 끝이잖아.”
  • 그런 남욱을 바라보던 임정은 입술을 움찔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결국엔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 “그럼 그해 그 소녀는?”
  • 잠시 침묵하던 임정이 다시 물었다.
  • “행방은 찾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