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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돌아온 남준

  • 여전히 그녀가 기억하는 그 얼굴이었다. 다만 학창 시절의 풋풋한 모습과는 다르게 턱선이 더 또렷해졌고 더 침착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 하지만 그 익숙한 얼굴에는 그녀가 그리워하던 자상함 대신, 차갑고 담담한 표정만 있었다.
  • 그는 한창 부하 직원의 보고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간단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편집장 사무실로 들어갔다.
  • 오윤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남준이 어떻게 돌아왔지? 왜 돌아왔지….’
  • 그해 작별 인사 한마디 없이 단호하고 차갑게 떠났던 남준이었다. 그런데 왜 돌아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이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그녀도 이제는 어느 정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출현은 여전히 파도와 같이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 너무 짧게 스치고 지나가서 그도 그녀가 그랬듯이 한눈에 자신을 알아봤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오윤희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 ‘알아보면 어떻고 못 알아보면 또 어때? 이제 남준과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잖아….’
  • 오윤희는 종일 남준이 자신을 알아보기라도 할까 봐 불안한 마음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자신이 크게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새로 취임한 남준은 인사와 향후 방향에 관한 회의를 열어 대책과 방안을 논의했다. 회의에서 그는 각 팀장들의 보고를 주의 깊게 들으며 간단한 지시를 내리는 외에, 시종일관 회의실 구석에 있는 오윤희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 그는 이제 그녀를 깨끗이 잊은 듯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만약 그녀에게 기억할 가치가 있었다면, 2년 전 그렇게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떠나 있는 동안 그는 한 번도 그녀에게 연락한 적 없었다.
  • 힘겹게 퇴근 시간까지 버틴 오윤희는 사무실에 잠시도 더 있기 싫어져서 곧장 핸드백을 챙겨 나가려 했다. 하지만 이때, 팀장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 “잠깐만, 오윤희 씨. 이 보고서 좀 편집장님께 전달해드리고 간단히 보고 좀 하고 와.”
  • 순간 오윤희는 흠칫하며 난감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 “팀장님, 오늘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요….”
  • 팀장 강희진은 오늘 회의에서 옆 팀 팀장보다 존재감이 없어서 기분이 안 좋은 상태였다. 그런데 오윤희한테까지 거절을 당하자, 순간 일그러진 얼굴로 쏘아붙였다.
  • “오윤희 씨, 인기 인물 취재 좀 했다고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야?”
  • 강희진은 평소에도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상사였다. 더는 핑계를 댈 수 없어진 오윤희는 창백한 얼굴로 울며 겨자 먹기로 답했다.
  • “팀장님,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세요. 지금 갈게요.”
  • 서류를 들고 남준의 사무실 앞에 도착한 오윤희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 가볍게 노크했다.
  • 똑똑똑.
  • 그냥 노크일 뿐인데 벌써 체력을 다 쓴 듯한 느낌이었다.
  • “들어오세요.”
  • 남준의 익숙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오자 오윤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남준의 사무실은 비록 남욱의 사무실처럼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정교하게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그는 한창 책상 앞에서 남욱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를 읽고 있었다.
  • “남 편집장님.”
  • 오윤희가 애써 침착한 척 입을 열었다.
  • “강 팀장님께서 이번 성욱 대표님 인터뷰에 관해 편집장님께 간단히 보고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 “네.”
  • 남준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짧게 답했다. 오윤희는 어쩔 수 없이 긴장한 표정으로 보고를 시작했다. 보고가 끝난 뒤에도 남준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오윤희는 더 기다리기 힘들어졌다.
  • “저기….”
  • 그녀는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 “편집장님, 다른 일 없으시면 저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 말을 마친 그녀는 빠르게 뒤돌아섰다. 하지만 문어귀에 도착하기도 전에 남자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 네 번째 손가락에 있는 반지에 닿았다.
  • “결혼했어?”
  • 오윤희는 그와 시선을 마주칠 용기가 없어 얼굴을 돌린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뚫어지게 그녀의 반지를 쏘아보는 남준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서렸다. 갑자기 그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 “오윤희, 그렇게 고르고 고른 남자가 이런 싸구려 다이아 반지나 선물하는 남자였어?”
  • 말을 마친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 혐오스러운 감정을 드러냈다.
  • “하긴, 돈을 위해서라면 몸도 파는 여자가, 남자가 돈 좀 써 주니까 홀랑 넘어갔겠지.”
  • 그 청천벽력 같은 말에 오윤희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렸다.
  • “너…2년 전 일을 알고 있었어?”
  •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 “하.”
  • 오윤희가 부인하지 않자 남준은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쓰렸다.
  •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 알고 있었어. 2년 전에 이미 알았어. 오윤희, 내가 너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내가 삼 년을 아끼고 사랑해준 여자가 이런 더러운 여자라는 걸 알고 미국 유학을 결심했거든.”
  • 오윤희의 안색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
  • 무려 2 년이었다. 2 년 전 자신이 가장 남준이 필요할 때 그가 유학을 떠난 이유에 대해서 항상 궁금했었다.
  • 그리고 지금, 드디어 그 이유를 알았다.
  • ‘그 일 때문이었구나.’
  • 하지만 좀 이상했다. 2년 전, 남준은 분명 그 일이 일파만파 퍼지기 전에 출국했다. 그렇다면 그는 결국 소문이 나기 전에 알았다는 건가?
  • ‘그럴 리 없어….’
  •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오윤희는 통증에 창백해진 얼굴을 가까스로 들고 입을 열었다.
  • “남준아, 2년 전 일은 오해였어. 사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