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이 아주 거셌지만, 그녀들의 향긋한 체취를 느끼며 나는 오히려 안정된 기분으로 느긋하게 잠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광풍에 휘말려 큰 강에 처박혔다. 얼어 죽을 것같이 차가운 강물에서 나는 끊임없이 손발을 허우적거렸으나 몸은 오히려 천천히 강 밑으로 가라앉았다.
“악…”
나는 경황없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몸은 꼼짝할 수 없었다.
“이건 무슨 소리야! 성가셔!”
여혜미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리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까지 덜덜 떨고 있어… 아! 열이 나네… 정말 뜨거워…”
이건 심윤아의 목소리가 아닌가?
“어쩌지? 정말 뜨거워…”
“이대로 두면 죽을 것 같은데…”
광풍이 기승을 부리고 빗방울이 흩날려 들어오는 동굴에서 그녀들의 목소리는 점점 구별하기 어려웠다. 나는 추워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곧 죽는다고?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나는 이미 죽은 전우 들개를 보았다. 들개는 한 가닥 빛 속에 서서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그냥 이렇게 끝내고 말아야지… 그녀들은… 각자 알아서 살아가겠지! 내가 떠나는 걸 용서할 거야…
나는 들개를 향해 활짝 웃으며 그가 내미는 손을 잡고 가볍게 날아올랐다.
갑자기 따뜻하고 나긋나긋한 몸이 나를 끌어안으며 날아가려는 내 몸을 꼼짝 못하게 붙잡았다.
부드러운 품속에서 향긋한 냄새와 따뜻한 체온이 내 몸에 전해졌다. 도대체 누구인지 알고 싶어 눈을 뜨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도저히 올라가지 않았다.
여자의 부드럽고 향기로운 품은 뼛속까지 스며든 내 몸의 냉기를 천천히 몰아냈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나를 안았던 여자가 문득 내 몸에서 떨어졌다.
“가지 마…”
내가 서운해서 목이 쉰 소리로 만류하자 또 다른 향긋하고 나긋한 몸이 나를 끌어안았다.
그녀들은 번갈아들어 나를 끌어안으며 저들의 몸으로 내 몸의 열을 내리고 있었다…
머릿속에 희미하게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나는 무의식중에 손으로 한 쌍의 부드럽고 풍만한 ‘고무공’을 만졌다. 이렇게 나는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나는 한마디 신음을 들으며 조수처럼 밀려드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다시 의식을 회복했을 때, 나는 얼굴이 가려웠다. 조용히 눈을 뜨니 바로 눈앞에 심윤아의 얼굴이 보였다. 나를 꼭 끌어안은 그녀는 흑백이 분명한 두 눈을 크게 뜨고 긴장하게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가볍게 내 얼굴을 스치고 있었다.
내가 조용히 눈을 떴는데도 그녀는 이내 알아차리고 수줍게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던 손을 풀었다.
“저기… 고마워!”
입을 열면서 나는 목구멍이 바작바작 타들고 목이 심하게 쉰 것을 발견했다.
“걔한테만 감사해?”
여혜미의 목소리에 곁눈질로 흘끗 보니 그녀가 나의 그 도끼를 들고 옆에 서 있었다.
내가 그녀를 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자 그녀는 힘차게 도끼를 휘둘렀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코코넛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녀는 내 옆에 무릎을 꿇어앉아서 조심스럽게 반 사발 정도의 코코넛즙을 내 입에 대고 기울였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어젯밤에 내가 열이 심하게 나서 그녀들 셋이 번갈아들며 나를 끌어안아 마침내 열이 내리게 했다고 알려 주었다.
코코넛즙을 다 마시고 나서 나는 몸이 많이 나아진 듯해 일어나 앉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온몸이 나른해서 조금만 움직여도 식은땀이 나는 걸 봐서는 아직 일정한 회복 기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가 없으면…’
“티나 씨, 쟤를 잘 보살펴요. 만약 다시 열이 나면 바로 끌어안고.”
여혜미가 티나에게 부탁을 남기고 손에 도끼를 든 채 심윤아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는 거야?”
나는 그녀들의 뒤에 대고 소리쳤다.
여혜미가 머리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먹을 게 다 떨어졌어!”
“밀림엔 들어가지 마. 거기엔 멧돼지랑…”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혜미와 심윤아는 등나무 사다리를 타고 동굴 입구로 사라졌다.
이때에야 나는 사라졌던 작은 폭포가 다시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 솨ㅡ솨ㅡ 쏟아지는 폭포가 동굴 입구를 막고 있었다. 끊겼다 나타났다 하는 작은 폭포가 비와 관련이 있다는 내 추측에 신빙성을 한층 더해 주었다.
나는 티나를 시켜 등나무 사다리를 걷어 올리게 했다. 지금 나는 기력이라고는 거의 없는 상황인데 혹시 박준의 무리가 등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면 우리에게 불리할까 봐 두려웠다.
티나는 나를 등지고 사다리를 걷어 올리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답고 조용한 뒷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속에는 몸에 또 열이 난다고 엄살을 부려 볼까 하는 못된 생각이 떠올랐다.
사다리를 거두고 나서 티나는 작은 폭포에 손을 씻고 돌아와 내 옆에 꿇어앉으며 차가운 손을 내 이마에 얹었다.
“느낌이 어때요?”
순진하게 나를 보며 배려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방금 떠올랐던 치졸한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습니다!”
나는 힘없이 웃으며 나직이 말했다.
“어젯밤에 감사했고요!”
티나는 대뜸 얼굴을 붉히며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땅히 우리가 감사하죠. 만약 여택 씨가 없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 수 없다는 것을 저도 알아요…”
“크크…”
웃고 나니 머리가 어지러워 나는 티나에게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보라고 당부했다. 기력이 다한 나로서는 지금의 상황에서 나무를 문질러 불씨를 얻을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티나는 귀엽게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눈을 감고 몽롱한 정신으로 안정을 취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내 귓전에 길게 호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떠보니 티나가 두 손으로 배를 부여잡고 있었는데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그녀는 내가 안정을 취하는 데 방해가 될까 봐 이를 악물고 신음 한마디도 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일그러진 그녀의 작은 얼굴에 그녀의 고통이 낱낱이 드러났다.
‘큰일 났어!’
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이 이틀간 먹은 음식이 깨끗하지 못해 티나가 위장염에라도 걸린 게 아닐까?
열대 밀림 속에서 위장염은 흔히 발생하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빈번한 설사와 구토로 인해 인체의 수분이 신속하게 빠져나가는데 이처럼 의사와 약품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불치병이나 다름이 없다.
나는 어디에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모른다. 벌떡 일어나 티나의 앞으로 다가가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죠?”
“전…”
티나는 얼굴이 숯불처럼 벌겋게 상기된 채 바닥에 앉아 두 다리를 힘껏 조였다.
“괜찮아요…”
“뭐가 괜찮다고?”
나는 소매로 그녀의 이마에 돋은 식은땀을 닦아주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 정도가 됐는데 뭘 그렇게 참아요? 티나 씨…”
나는 붉은 피가 티나의 바지에서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하던 말을 멈추었다. 사실 그녀의 배가 아픈 것은…
생리통이었다!
티나는 나와 눈빛이 마주쳤다가 다시 바닥에 흐른 피를 보고 외마디 소리를 내뱉었다.
“아~”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두 어깨를 끊임없이 들먹였다.
지금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힘없이 말했다.
“아, 머리가 어지러워 잠깐 누워야겠네…”
티나는 낮은 소리로 흐느꼈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너덜너덜한 윗옷을 그녀의 앞에 던져 주었다.
“스스로 처리하고 다시는 찬물에 손대지 마세요!”
티나는 오히려 더 크게 울었다. 내가 어쩔 바를 몰라 한숨을 쉬는데 뒤에서 여혜미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른 다가가서 등나무 사다리를 내려놓았다. 얼마 안 돼 그녀들 둘이 등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동굴로 들어왔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면했다. 여혜미는 손에 쥔 게 몇 마리를 높이 쳐들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너를 몸보신 시킬 거야…”
그러다가 다음 순간, 티나의 울음소리와 함께 그녀의 두 다리 사이에 있는 피를 보고 여혜미 얼굴의 웃음기가 대뜸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내 뺨으로 그녀의 손바닥이 날아왔다.
“짐승 같은 놈!”
그녀가 화를 내는 속도가 책장을 번지는 것보다 더 빠를 줄은 상상 밖이었다. 뺨 한 대에도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어 화만 돋았다.
“너 미쳤어?”
“티나!”
여혜미는 내 곁을 지나 바로 티나의 옆으로 갔다.
“저놈이 혹시…”
나는 이제야 알았다. 내가 옷을 티나에게 벗어 주고 지금 내 몸이 속옷 바람인 데다 티나의 아래 몸에서 흐른 피를 보면 얼마든지 오해를 살 수 있었다.
“저… 아니… 그게… 바로…”
티나와 여혜미가 얘기하는가 싶더니 이내 여혜미의 목소리가 커졌다.
“여택, 네 얼굴의 모기는 내가 잡아주마!”
‘제기랄! 이제는 너에 대한 손톱만큼의 미련마저 바닥이 났어! 비록 내가 지금 너를 이길 수는 없어도 사생결단은 할 수 있단 말이야!’
나는 화가 나서 그대로 누워버렸다. 세 여인만 소곤거리는 소리에 나는 완전히 내가 소외된 느낌이었다.
혼미한 상황이 한참 지난 뒤에 누군가가 나를 깨웠다. 눈을 떠보니 여혜미가 활짝 핀 꽃처럼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대게야!”
그녀는 새빨간 게를 쳐들고 눈부시게 웃었다.
“내 동생 귀여워서 누나가 먹여 줄게.”
나는 그녀를 흘겨보았다.
“네가 웃는 건 모두 가짜야!”
“못난 놈!”
여혜미는 손을 내밀어 내가 방금 맞았던 그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직도 아파?”
“여기가…”
나는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몹시 아파!”
“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여택이 여태껏 떳떳하고 바르게 살아오면서 세상 무서운 것이 없었는데 친인들의 오해가…”
커다란 게알이 내 입을 막았다. 신선한 맛이 목구멍을 자극하는데 여혜미가 빙그레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너에 대해 익숙히 알지 못했다면 난 죽도록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거야! 나는 네가 지금 어떻게 내 바지를 벗기고 엉덩이를 때리며 혼내려 하는지도 알아…”
‘그래, 우리 둘이 너무 익숙하니까 마음도 통할 수 있겠지.’
나는 헤헤 웃고 게걸스럽게 게를 먹으며 아무 말도 안 했다.
배가 부르자 또 한 번 잠을 실컷 잤다. 그리고 깨어나니 정력이 많이 회복된 느낌이었다. 내가 먹을 것을 찾으러 나가겠다고 하자 여혜미와 심윤아가 극구 말리며 자기들끼리 다시 나갔다.
그들이 떠나갈 때, 나는 그들에게 절대 밀림에 들어가지 말고 해변에는 갈 수 있되 절대 깊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일일이 당부했다...
그들이 떠나간 후, 티나가 내 곁에 다가와서 부드럽게 물었다.
“아직도 아파요?”
“에… 난 낯가죽이 두꺼워서 괜찮아요!”
나는 웃으면서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내 윗옷을 자기의 그곳에 끼우고 있었는데 그 모양새가 어설프고 그곳 또한 볼록해서 어쩌면 그 꼴이 임신부와 흡사했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주의력을 돌리기 위해 나는 그녀에게 두바이에는 뭐 하러 가며 왜 남자 친구는 함께 가지 않느냐고 이것저것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