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다음 화
상사와 결혼을 해버렸다

상사와 결혼을 해버렸다

필애

Last update: 2023-03-07

제1화 맞선

  • 해성 시, 모 고급 찻집.
  • 모친의 성화에 못 이겨 등 떠밀듯 맞선을 나온 강서연은 30 분이 지났지만 상대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아름다운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서렸다.
  • 그 뒤로 10 분쯤 더 지난 뒤에야 회색 정장 차림의 사내가 천천히 그녀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 “강서연 씨 맞으십니까?”
  • 키가 땅딸막하고 배가 튀어나온 사내는 눈빛마저 음흉했다. 여러모로 보아도 심윤주가 말한 옥골선풍과는 거리가 멀었다.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 “유인석입니다.”
  • 자신을 유인석이라고 소개한 사내는 의자를 당겨 맞은편에 앉으며 강서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만족스러운 듯 활짝 웃었다.
  • “강서연 씨 사정은 대충 들었습니다. 전 제 안사람이 되는 여자에 대한 요구가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결혼한 뒤에는 생활비를 제가 일절 책임질 테니까 강서연 씨는 지금 다니는 직장 그만두고 편안하게 전업주부나 하세요. 그리고 강서연 씨도 아시다시피 저한테 아이가 둘 있습니다. 강서연 씨 친자식처럼 생각하시고 챙겨주셨으면 좋겠고 제 부모님들은…”
  • “잠깐만요, 유인석 씨.”
  • 강서연은 황급히 유인석의 말허리를 자르고서 깊이 숨을 들이켰다.
  • “죄송합니다만, 저희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요.”
  • 그러자 싱글벙글하던 유인석의 표정이 손바닥 뒤집듯 확 돌변했다.
  • “강서연 씨, 잘 모르시나 본데, 전 지금 한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회사 대표입니다. 뭐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엘리트죠. 강서연 씨한테는 너무 과분한…”
  • 유인석이 어쩌고저쩌고 쉴 새 없이 입을 나불거렸다.
  • “죄송합니다, 유인석 씨.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희는 맞지 않아요.”
  • 엘리트고 뭐고 사내는 일단 나이만 봐도 강서연의 아버지뻘이었다.
  • “후회할 겁니다!”
  • 여느 악당처럼 말을 내뱉고서 벌떡 몸을 일으킨 유인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찻집을 나갔다.
  • 강서연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지끈거리는 미간을 문질렀다. 애초에 심윤주의 말을 믿는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 이미 반나절은 꼬박 땡땡이를 친 상태였지만 강서연은 회사로 돌아가는 대신 조용히 자리에 앉아 흥미진진한 얼굴로 옆 테이블에 앉은 남녀를 구경했다.
  • 옆 테이블도 맞선 중이었다.
  • 하지만 유인석과 달리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내는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슈트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완벽하게 조각된 예술품처럼 잘생긴 얼굴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을뿐더러 일거수일투족에 절제된 우아함이 배어 있었다.
  • 사내의 맞선 상대는 홀딱 반한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 “시안 씨, 저희 결혼식은 아일랜드에서 올리는 게 어때요? 하객분들도 많이 초대하고…”
  • 사내는 시종일관 눈을 내리깐 채 냉랭한 기운을 풀풀 풍겼다. 꽉 다물린 입술에서 내뱉는 목소리도 한겨울 빙하처럼 싸늘하기만 했다.
  • “죄송하지만, 그쪽이랑은 이제 볼 일이 끝났으니 이제 그만 일어나시죠.”
  • 그 말에 여인의 입꼬리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 “우리 이제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되었는데요? 첫 만남에 결혼 얘기를 하는 게 부담스러우시다면 죄송해요. 일단 만나보고 천천히 절 알아가셔도 돼요. 저 꽤 좋은 여자예요…”
  •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린 부시안은 지극히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얼굴에 온통 필러 자국인 여자는 관심 없습니다.”
  • 옆 테이블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강서연은 하마터면 방금 들이켠 차를 뿜을 뻔했다.
  • 가히 충격적인 거절 사유에 강서연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 조롱 섞인 부시안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상대 여인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모처럼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사라지자 내심 아쉬웠던 강서연도 입맛을 다시며 몰래 빠져나가기 위해 가방을 챙겼다.
  • 그 순간, 바로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강서연.”
  •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돌린 강서연은 영업용 미소를 장착한 채 사내에게 인사를 건넸다.
  • “안녕하세요, 부 대표님. 여기서 다 뵙네요.”
  • 사내는 특유의 심드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다 봤어?”
  • “못…”
  •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던 강서연은 자신이 여태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음을 깨닫고서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 “대표님 본 거 아닌데요.”
  • “앉아.”
  • 강경한 명령조로 내뱉는 말에 강서연은 마지못해 부시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사내를 훑어보았다.
  • 해성 최고라고 할 수 있는 BC 그룹 대표인 부시안은 이제 겨우 26 세의 나이에 몇 조 원의 재산을 소유한 자산가였다.
  • 그에 반해 강서연은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었다.
  • 고고한 지위에 있는 부시안이 BC 그룹 수천 명의 직원들 중 일개 디자이너인 강서연을 알고 있을 리 만무했지만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3 년 전, 부시안이 BC 그룹을 인수하고 각 부서를 순회할 때, 하고많은 디자이너들 중에서 하필이면 강서연에게 다가와 물었다.
  • “이름이 뭡니까?”
  • 강서연은 어안이 벙벙한 채 더듬더듬 부시안에게 이름을 알려주었다.
  • 직장 내에서의 신분은 지극히 평범했지만 강서연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외모의 소유자였다. 안색이 노랗고 퀭한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도 단연 군계일학이었지만 BC 그룹 전체를 놓고 보아도 손에 꼽히는 미모였다. 그래서 디자인 부서의 모든 직원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부시안이 강서연에게 한눈에 반한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 동료들은 옆에서 호들갑을 떨어댔지만 정작 당사자인 강서연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단언했다.
  • 아니나 다를까, 지난 3 년 동안 한 회사에 다니면서도 부시안을 마주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 오늘도 찻집에 들어오자마자 한눈에 부시안을 알아보았지만 감히 아는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개 회사 직원인 강서연을 진작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서 태평하게 앉아 부시안을 구경했던 것인데…
  • “저, 대표님, 별다른 용건이 없으시다면…”
  • 강서연이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을 깨고서 말문을 꺼내자 부시안이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 “결혼이 고픈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