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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한밤중에 내 방엔 왜 왔어요

  • 그 뒤에도 서명훈과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며 오후 5 시가 넘도록 강진섭의 병상을 지킨 강서연은 이내 마트에서 저녁거리를 사고는 버스를 타고 명원으로 돌아갔다.
  •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도 부시안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강서연은 이내 방으로 돌아가 씻고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 잠결에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낀 강서연은 스르르 눈을 떴다.
  •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아래층으로 내려온 강서연은 물 한 잔을 마신 뒤 뿌연 시야로 힘겹게 방으로 돌아가 다시 잠을 청했다.
  • 새벽 2시, 접대를 마치고 돌아온 부시안은 곧장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불을 켜고서 샤워실로 향하려던 부시안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 그의 침대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있었다.
  • 여인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단잠에 빠져 있었는데 말려 올라간 순면 치마 사이로 길고 하얀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 부시안의 눈빛이 일순 짙게 가라앉았다.
  •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간 부시안은 거친 손길로 강서연의 팔을 움켜잡았다.
  • “강서연!”
  • “음… 뭐예요!”
  • 눈을 비비며 부시안의 손을 뿌리친 강서연은 눈을 부릅뜨고서 부시안을 노려보았다.
  • “한밤중에 내 방엔 왜 왔어요?”
  • 부시안이 베일 듯 날카로운 눈으로 강서연을 응시했다.
  • “눈 뜨고 똑똑히 봐. 지금 이곳이 누구 방인지.”
  • 순간 무겁게 짓누르던 졸음이 싹 달아나 버린 강서연은 황망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보아도 여긴… 부시안의 방이었다!
  •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방금 전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잔뜩 겁을 먹은 채 침대에서 내려온 강서연은 조심스럽게 부시안의 눈치를 살폈다.
  •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잠결에 헷갈려서 방을 착각했나 봐요.”
  • “착각?”
  • 부시안은 추측과 의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강서연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 “정말 착각한 거 맞아? 다른 속셈 있는 거 아니고?”
  • 강서연이 턱을 치켜들고서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 “정말 착각한 거예요! 난…”
  • 그러자 부시안이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서늘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허리를 싹둑 잘랐다.
  • “꺼져!”
  • 강서연은 흥하고 콧방귀를 뀌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큼 방을 나섰다.
  • 부시안은 자신의 공간에 갑자기 낯선 여자가 나타난 것에 내심 짜증이 났지만 부형철 쪽에서 언제 수상한 낌새를 눈치챌지 알 수 없기에 지금은 일단 꾹 참고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부시안은 머리맡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강서연의 체취에 살짝 미간을 구겼다.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 그녀가 방에 들어왔을 때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재생되었다.
  • 짜증이 울컥 치밀어 오른 부시안은 침구를 전부 바꾼 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 하지만 공교롭게도 다음날 집을 나서려던 강서연은 부시안을 마주치고 말았다.
  • 앞뒤로 별장을 나선 두 사람은 하나는 롤스로이스에 타고 다른 하나는 1킬로미터 떨어진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 버스 타 올랐다.
  • 애초에 부시안이 BC 그룹까지 그녀를 태워다 주기를 바란 적도 없었다. 이 관계가 막 시작할 때 이미 두 사람의 결혼 사실을 회사 사람들에게 절대 누설하지 말라고 단단히 경고를 받은 뒤였다.
  •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서연은 본부장 사무실로 불려갔다.
  • 강서연은 회사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맡고 있었고 디자인 부서의 본부장 장근철은 30대의 남성이었다.
  • 장근철은 유독 강서연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막 입사했을 당시 장근철의 고백을 무자비하게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 “연차에 무단결근에, 강서연, 회사가 아주 너희 집이지! 난 아예 안중에도 없다 이거야? 혜길 쪽 설계도는 다 끝냈어?”
  • 혜길은 BC 그룹에서 새로 개발한 아파트로 현재 많은 디자이너들 중 하나를 골라 인테리어 디자인을 해야 했다.
  • 이틀 내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는데 디자인을 생각할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 강서연은 입을 삐죽거렸다.
  • “본부장님, 이 프로젝트는 이틀 전에 내려온 거 아니에요? 아직 일주일이나 시간이 남았는데요?”
  • 설령 설계도를 그려낸다고 해도 그녀의 디자인이 채택될 일은 거의 없었다. 강서연은 비록 재능이 출중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장근철에게 눌려 재능을 보여줄 기회가 전혀 없었다.
  • “지금 감히 말대꾸를 해? 너! 내가 조만간 꼭 해고한다! 됐어, 됐어, 이 서류나 인쇄하러 가!”
  • 강서연은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희번덕거렸다. 또 이딴 잡심부름이나 시키다니!
  • 이제 회사 사모님인 몸인데 확 부시안에게 해고하라고 고발해 버릴까 보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생각할 뿐,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강서연은 풀이 죽은 채 서류를 인쇄하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