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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남자친구분 안목이 좋으시네요

  • 다음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깬 강서연은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 씻고 나온 강서연은 크고 깔끔하게 정돈된 옷방으로 들어갔다. 정교한 장식을 자랑하는 옷장 안에는 그와 어울리지 않는 싸구려 옷들이 듬성듬성 걸려 있었다.
  • 강서연은 얼마 되지 않는 선택지들 사이에서 작년에 구입한 원피스를 꺼내 갈아입고서 옅게 화장을 했다.
  • 모든 준비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자 부시안이 나른하게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은 채 곧장 별장을 나섰다.
  • 강서연은 부시안의 얼굴을 응시하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 “저 오늘 연차 낸 거라 이번 달 출석을 채우지 못했어요.”
  • “겨우 20만 원 가지고.”
  • 수천억대 자산가에게는 보잘것없는 금액일지 몰라도 강서연에게는 한 달 생활비에 준하는 금액이었다. 강서연이 억울함에 몸부림을 치는 사이, 부시안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늘 할아버지를 기쁘게 하면 개근 수당 보충해 줄게.”
  • 그 말에 어둡게 가라앉았던 강서연의 눈동자가 돌연 반짝였다.
  • 곧장 병원으로 향할 줄 알았던 차는 백화점 앞에 멈춰 섰다. 강서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할아버지 보러 가는 거 아니었어요?”
  • 강서연의 입고 있는 원피스를 힐끗 바라보던 부시안이 야멸찬 어조로 말했다.
  • “지금 그 옷차림으로는 우리 BC 그룹이 파산했다고 생각하실 거야. BC 그룹 안주인 되는 사람의 옷이 이렇게 낡은 걸 보면.”
  • “…”
  • 그렇게 낡았나? 이래 봬도 올해 S 패션 위크에서 가장 히트를 친 원피스거늘! 짝퉁 버전이지만.
  •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내뱉을 엄두가 나지 않아 강서연은 순순히 부시안의 뒤를 따라 고급 브랜드 숍으로 들어갔다. 매장을 휙 둘러보던 부시안은 대충 보이는 대로 원피스 몇 벌을 집어 들더니 뒤에 있는 강서연에게 던졌다.
  • “입고 와.”
  • 강서연은 기계적으로 옷을 들고서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 태그를 힐끗 바라본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히익 하고 숨을 들이켰다. 개중에서 가장 저렴한 원피스만 해도 200만을 넘었다. 200만이면 그녀의 한 달치 월급인데.
  • 이렇게 비싼 옷은 난생처음 입게 된 강서연은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아주 조심스럽게 다뤘다.
  • 부시안이 골라준 옷을 전부 입어 보았지만 소파에 여유작작하게 앉아 있는 ‘물주’의 마음에는 들지 못한 것 같았다.
  • 지칠 대로 지친 강서연은 마지막 연청색 원피스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 가게 안의 종업원이 환히 웃으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 “손님, 남자친구분 안목이 정말 좋으신 것 같아요. 이 원피스 아주 손님분한테 딱이에요.”
  •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부시안은 눈을 들어 강서연을 바라보았다.
  • 그의 눈높이에서는 마침 거울을 보고 있는 강서연의 잘록한 허리가 보였다.
  • 고개를 돌린 강서연은 고운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 “이거 괜찮아요?”
  • “괜찮네.”
  • 짤막하게 대꾸하고서 몸을 일으킨 부시안은 또 강서연에게 구두 몇 켤레를 더 고른 다음 점원에게 말했다.
  • “지금 입고 있는 거랑 방금 입어본 옷들 전부 포장해 주세요.”
  • 그 말에 일순 멈칫하던 점원은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 “네, 네! 손님 남자친구분 정말 자상하시네요.”
  • 언제나 뻔뻔스러웠던 강서연도 이번만큼은 얼굴을 붉히며 넌지시 부시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 “다 살 필요 없어요. 전 지금 입고 있는 이거면 돼요.”
  • 그러자 부시안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 “앞으로 할아버지 만날 때 그것만 입고 갈 거야?”
  • “…”
  • 카드를 꺼내 빠르게 결제를 마친 부시안은 이내 1층에 위치한 보석가게로 향했다.
  • 강서연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다짜고짜 한 쌍의 반지를 고른 부시안은 이내 여자 반지를 그녀의 손에, 그리고 나머지 반지는 자신의 손에 꼈다.
  •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내내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 부시안이 계산을 하는 동안 입구에 선 채 기다리고 있는 강서연의 귓가로 점원들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 “아아, 둘이 너무 잘 어울려요!”
  • “잘 어울리긴 한데, 남자 쪽이 사랑하지 않는 거 아냐? 반지도 대충대충 고르고 여자친구 손에 끼워주지도 않았잖아.”
  • 나무랄 데 없는 추측들에 강서연은 입꼬리가 씰룩거렸다.